홈으로 미술용어사전


간다라 미술 Gandhara Art

파키스탄 북부 현재의 페샤와르 지방에 해당하는 , 예전의 간다라국을 중심으로 하여 기원 초부터 수세기 간 번영했던, 조각을 위주로 한 불교 미술. 동서 문화교류에 의해 서방적 요 소가 풍부해진 미술이다. 불상 중심의 미술을 전개하여 널리 인도. 중앙아시아. 중국의 불교 미술에 영향을 끼쳤다. 간다라를 중심으로 스와트, 탁실라 지방, 아프가니스탄 일부까지 분포되어 이들이 간다라 미술권을 형성하였다. 유적으로 불탑이라든지 절터가 남아 있다. 건축은 돌로 쌓았는데, 쌓 는 방식에 따라 시대적인 차이가 있으며 연대 추정에 도움이 된다. 불탑은 중인도의 오래 된 복발탑(覆鉢塔)형식을 일찍부터 이어 받았으나 점차로 기단을 몇 층씩 겹쳐서 높게 하는 방식으로 전개하였으며, 또 이를 부조로 풍부하고 장엄하게 장식하였다. 불탑으로는 카니시 카 대탑이 유명하다. 불탑이나 챠이티야 당 또는 불당에 수반하여 승려들이 사는 승원이 조성되며, 이것들이 형 성하는 대규모의 가람이 번성햇던 것을 석조나 소조작품 등의 유적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지방의 역사가 불분명한 점도 있어, 이 미술 연대나 양식적 전개를 둘러싼 여러 문제에 이론이 많다. 간다라 미술의 기원은 아마도 그리스 문화를 애호한 파르티아 인 이 점거했던 시대(1세기 중기)에, 그리스풍의 표현수법으로 된 불탑 등의 장엄한 조형활동에 서 비롯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급속한 발전은 당시 로마와 해로 및 육로를 통한 통상의 번창과 일찍부터 전래된 불교에 대한 독실한 믿음 등에 의한 것이다. 또 불상의 등 장하고 곧이어 독단적인 예배상이 성립한 것도 이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조상 중심의 간다라 미술의 전개를 당시 신흥 대승불교에 의한 것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간다라 미술의 중심을 이루는 조각은 석조를 주로하는 전기와 소조(塑造)를 주로하는 후기 로 대별할 수 있다. 석조는 모두 청흑색의 편암과 변성암을 사용하고 소조에는 치장 벽토를 사용하였다. 내용적으로는 건축의 장식의장 등을 제외한다면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한 불전 도(佛傳圖)가 가장 많고 또한 예배 대상인 불, 보살상이나 천부상도 많이 만들어졌다. 이들 은 모두 부조로서 불, 보살 등의 단독 석상도 환조도 아니고 뒷면을 평평하게 한 고부조(高 浮彫)이다. 이들 조각은 얼굴 모습이나 옷 주름 등 모두 그리스풍으로 특히 사실성이 풍부 한 것을 특색으로 하며, 서방의 모티브나 조각 형식을 그대로 모방한 것도 적지 않다. 당시 로마에서 행해지고 있던 헬레니즘 미술의 강한 영향하에서 전개된 점이 분명하며, 조각가의 왕래도 있었음에 틀림없다. 수입된 로마 작품은 탁실라 또는 아프가니스탄의 베그람 유적에서 적지 않게 출토되고 있 다. 대체로 이 미술은 제2 쿠샨왕조 시대(2세기 중기~3세기 중기)에 성행했고 이후 점차로 쇠퇴했다가 키다리 쿠샨 시대(390~460년경)에 재차 융성했으며 탁실라와 핫다에서 일시 유 행했다. 최후로 에프타르족의 침입과 파괴로 인해 이 지방의 불교 미술은 종말을 고했다

감정(感情) feeling(영)

감정은 인간 주위의 세계, 외계의 여러 현상과 타인의 행동, 또한 자기 자신에 관해 반응하 는 심적 상태이며, 실재하는 주위의 사물에 대한 정신활동의 특수한 형태이다. 그것은 사회 속에서 형성되고, 인간의 행동, 즉 실천활동과 인식활동에서 큰 역할을 한다. 감정에는 갖가 지 음영. 격조가 있어 복잡하지만, 우선 쾌(快)와 불쾌(不快)로 나눌 수 있다. 나아가 짧게 지속되는 감정은 정서(emotion)라고 불리는데, 즐거움과 슬픔 등이 해당한다. 정서는 인간 활동의 성공과 실패, 자기의 필요에 일치와 불일치를 지시하는 역할을 하고 인간의 활동을 통제하는 작용을 한다. 만족스러울 때 정서는 적극적이고 활기에 찬 활동을 촉진하고, 불만족스러울 때는 소극적이고 활발하지 못한 요소들을 만든다. 감정은 또한 기분 (mood)으로서도 나타나는데, 이것은 길고 지속적인 감정으로 인간의 행동. 사상에 일정한 색조를 부여한다. 또한 고도의 감정, 탐구하려는 문제를 해결했을 때 오는 지적 만족감, 그 리고 미적 감정 등이 있다. 미적 감정은 작품의 내용, 형식 또는 대상, 인격에 대하여 받아들이는 자의 마음속에서 환기 되는 갖가지 상태이다. 일반적으로 정감(sentiment)이라고 하는 것은 이 상태의 감정을 가리 킨다. 정조(sentiment)는 그 규정이 일정하지 않고, 경우에 따라 도덕적. 지적. 미적 감정 혹 은 사랑. 증오. 존경. 경멸 등의 정서와 동일시된다. 철학사에 있어서 감정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플라톤은 이데아에 대한 사랑(에로스)을 설명하고 스토아 학파는 감정에 흐트러 지지 않는 상태 즉 무감동(apathy)을 장려하였다. 근래에 들어와 데카르트는 감정을 거의 유물론적으로 설명하였고, 이것을 받아들인 스피노자는 외부에 작용하는 감성으로부터의 탈 피를 탐구하는 동시에 '신에 대한 지적인 사랑'을 높이 평가했다. 18세기의 프랑스 유물론자와 19세기의 헤겔은 감정이 역사를 움직이는 힘이라는 것을 인정 하고 있다. 또한 19세기 초 독일의 철학자 야코비는 계몽적 합리론과 칸트 철학에 반대하고 비합리주의의 감정철학을 주장하였다. 도덕심에서도 쾌. 불쾌의 감정으로 선과 악을 규정하 는 감정도덕설이 오래 전부터 나타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 또한 감정이 없으면 진리에 대 한 인간의 그 어떠한 탐구도 있을 수 없다고 하여, 감정을 일면적으로 취급하지 않고 그 의 의를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

감정이입 感精移入 Einfuhnung(독)

타인과 동식물,기타자연에 나타나는 표정 .몸짓. 현상등을 조망할 때 거기에 자신의 감정을 투사하여 그것들이 가지는 감정을 추측한다는지 혹은 그러한 감정을 지니는 심적 활동. 독일의 철학자 립스 T.Lipps 는 예술에서 이러한 작용이 가장 잘 이루어지는 데 착안, 이를 미 의식의 근본이라고 규정하고 감정이입의 미학을 주창하였다. 이러한 감정이입이 인간에 대해 일어나는 경우를 본래적 감정이입 ,인간 이외의 자연물에 대한 경우를 상징적 감정이입이라고 구별한다.

강세황 - 姜世晃 (1712~1791)

조선의 문인·화가·평론가. 호 첨재. 서울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나, 소년기에 쓴 글씨조차도 병풍을 만드는 사람이있을 정도였다. 벼슬에 뜻이 없어 젊은 시절에는 주로 작품 활동에만 전념하였고 시·서·화의 삼절로 불리 는, 식견과 안목이 뛰어난 사대부 화가였다. 한국적인 남종 문인화풍을 정착시키는 데 공헌하였다. 이 밖에도 진경 산수화를 발전시켰고, 풍속화·인물화를 유행시켰으며, 새로운 서양화법을 발전시키는 데도 기여하였다. 주요 작품으로는〈첨재화보〉 〈벽오청서도〉 〈표현연화첩〉 〈송도기행첩〉 〈삼청도〉 〈난죽도〉〈피금정도〉 〈임왕서첩〉 등이 있다.

 

개념미술(槪念美術) Conceptual Art(영)

미니멀 아트 이후의 현대 미술의 한 경향. 언어에 의한 기술(記述), 사진이나 도표에 의한 종래의 예술가적 의식을 버리고, 완성된 작품 그 자체보다는 제작의 아이디어나 과정이 바 로 예술이라고 생각하는 반미술적 제작 태도를 가리킨다. 개념 미술을 하나의 시대 현상으 로서 포괄적으로 볼 경우, 그 분포는 유럽, 북미, 일본 , 그리고 오트레일리아와 남미의 일부 에까지 이르고 있다. 개념미술은 미니멀 아트의 논리적 귀결로 보는 것이 지배적인 견해이 나 한편으로는 네오 다다나 플룩서스로 대표되는 60년 전후의 여러 가지 형식 파괴적인 운 동에서도 거의 동시적으로 발생했다. 개념미술의 선구자는 마르셀 뒤샹이다. 그는 1913년 미술가의 역할이 물질을 교묘하게 치장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미의 고찰을 위한 선택에 있다고 정의했는데, 이것이 개념미술의 근본적인 미학이다. 레디 메이드와 그 후의 작품들을 통해 뒤샹은 기교와 형식, 그리고 회화 의 낭만성을 거부하고 평범한 대상물과 사상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뒤샹의 작품들은 1960 년대 말기에 홍수처럼 쏟아져 나온 미국의 젊은 개념미술 작가들에게 계속적인 아이디어의 원천이 되었다. 개념미술의 또다른 원천은 다다에서 발견될 수 있다. 1960년대의 많은 미술 가들은 정신적 고갈에서 반물질적인 태도를 표방했다. 그리하여 전혀 물질적 형태를 갖추지 않은 미술 작품을 만들어내고자 했다. 산업적으로 조 립된 회화와 조각은 미술에 있어서 '손재주'가 점차적으로 제거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복잡한 형태가 차차 제거되면서 이러한 현상은 그 귀결로서 미니멀 아트를 낳았다. 그 러나 개념미술에서는 더 나아가 미술 작품 자체가 제거되도록 시도되고 있다. 물질적 대상 으로부터 심리적 이미지로 옮겨지는 이러한 변천은 보통 사진이나, 문서, 상투적인 문구 또 는 일상적인 산문 위에 종종 작가들의 공식적인 서명을 수단으로 해서 이루어졌다. 이러한 것은 어떤 비평가가 지적했듯이 미술을 문학으로 대체하려는 시도인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한 다. 개념미술의 대표적인 작가인 조셉 코수드는 사전의 낱말풀이를 그대로 신문에 게재하여 작 품으로 발표했고, 더글러스 훼블러는 지도와 도면을 남겨, '지속적인 단편들'이란 명칭의 작 품을 구성했다. 또한 개념미술은 상품으로서의 적용되는 모든 가치 기준을 공격하고 있다. 개념미술의 작가들은 자신을 '장이'로서가 아니라 '마음'으로 간주한다. 그 때문에 거의 모 든 사물을 미술작품으로 자유롭게 제시한다. 그들의 주제는 일반적인 것이 될 수도 있고, 전 문적인 것이 될 수도 있다. 도 사소하거나 심오한 것, 사실적이거나 추상적인 것이 될 수도 있다. 그들은 우선 가능성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고자 한다. 따라서 결과로서의 작품은 그 자체가 가치를 지니지 않고, 거기에서는 표현되지 않는 작가 의 관념을 나타내는 것에 의해 가치를 갖는다. 감상자는 작품의 제작 기술도 마티에르도 부 정된 작품 내지 작품의 흔적을 앞에 놓고 작가의 행위 내지 개념을 추구하게 된다.

거리미술 street art(영)

야외 조각전시, 낙서, 작가들의 벽화, 거리 연극 등을 광범위하게 포괄하는 용어. 이들은 모 두 공고적으로 개방된 공간에서 공개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도시의 게시판들은 그 공공적인 성격 때문에 작가들에 의해 전시 장소로 사용되기도 한다. 게시판에 작품을 설치한 예술가들에는 죠셉 코수드, 다니엘 부렌, 이안 콜버슨, 데니스 마시 가 있다. 미국에서는 광고 이미지가 14.5*4.8m나 되는 크기의 게시판들이 그려졌는데 여기에 참여한 상업 작가팀은 르네상스 이탈리아 화가들이 사용한 것과 유사한 테크닉을 구사했다. 이런 작품들을 광고 게시판 미술(billboard art) 스카이라인 회화(skyline painting)라고 부르기도 한다. 거리미술 용어는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거리는 시민들에게 속하며 따라서 도시의 문제-마약. 쥐. 경찰의 무자비함 등-에 대한 세인들의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 해 작가들은 공개 토론 장소로 거리를 이용할 수 있다. 정치적인 의미에서 거리미술의 개념은 블라디미르 마야코프스키가 "거리를 우리의 붓으로 만들자, 광장이 우리의 팔레트가 되게 하자"고 하며 작가들을 고무하던 러시아 혁명 이후 의 대중을 위한 구경거리(mass spectacles)와 선전 미술(propaganda art)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건조제(dryer)

회화 재료의하나. 유화 물감을 녹이는 기름에 섞어 물감의 건조를 빠르게 하는 데 쓴다. 그 러나 분량에 주의하지 않으면 변색과 균열이 생기므로 잘 마르지 않는 물감에만 쓰는 것이 좋다 건축조각(Bauplastik) 건물 따위의 구조물과 결합하여 건설 의도를 나타내주며, 그 기능을 암시함과 동시에 장식 으로도 기여하는 조각을 말한다. 건축은 이 조각에 힘과 위용을 불어넣어 서로 단순한 건축, 독립된 조각 이상의 효과를 올린다. 현대에 들어와서 양자의 관계가 분리되는 과정을 걷기 도 했으나, 재검토되어 더욱 긴밀한 결합이 이루어지고 있다.

게소(gesso)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에 채색이나 도금용으로 캔버스와 패널의 바탕에 사용됐던 재료로서 석고와 아교를 혼합한 것. 혹은 테레핀 유로 묽게 용해시킨 백색 안료. 보통 바탕을 만들 때 는 게소를 여러겹 칠한다.

게슈탈트(Gestalt)

영어의 '구성'(configuration) 에 해당한다. 20세기 초엽 베르트하이머(Wertheimer), 퀼러 (Kohler), 코프카(Koffka) 등이 주축을 이룬 심리학의 한 학파가 주요개념으로 사용하면서 일반화되었다. 인간 경험의 궁극적인 요소가 '원자적'성분으로 분해될 수 없는 일종의 구조 내지 구성이라는 것을 기본 원리로 하고있는데, 원리 자체는 새롭거나 독창적인 것이 아니 지만 이전과는 달리 체계적인 실험을 거쳐 이 원리를 뒷받침했다는 데에 이 학파의 의의가 있다. 다음의 다섯 가지 보조 원리는 게슈탈트 학파의 이론적 특징을 보다 명확히 드러낸다. ① 모든 지각 경험은 배경으로부터 구별해낸 하나의 패턴임을 주장하는 '상(figure)/배경 (ground)'의 원리. ② 자극의 패턴과 지각 구조의 형성 사이에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주장 하는 '구별'의 원리. ③ 불완전한 구조로 변형되는 경향이 있음을 주장하는 '밀폐(close)'의 원리. ④ 한 지각 구조가 동일한 지각 패턴에 근거하고 있는 다른 지각 구조를 대신하는 경 향이 있음을 주장하는 ' 좋은 게슈탈트'의 원리.⑤ 생리적인 혹은 두뇌상의 과정과 일치가 있음을 주장하는 '동형구조(isomorphism)'의 원리. 게슈탈트 심리학은 다른 심리학과는 달리 예술적 경험에 대해 주목을 많이 해왔는데, 예를 들어 예술현상을 통해 자신의 정당성을 증명해 보이는가 하면 역으로 그 이론을 예술적 가 치 평가의 문제를 설명하는 데 적용하기도 한다. 게슈탈트 심리학에서 말하는 지각 구조라 는 것이 다수의 구성 요소들의 단순한 집합물로 환원될 수 없는 예술적 형식의 특성과 밀접 한 연관을 맺고 있다는 점이 흔히 지적되고 있다. 루돌프 아른하임 같은 학자의 저작은 예술적 가치평가의 문제에 새로운 접근 방식을 보여주기도 한다. 게슈탈트 심리학은 한편으로 감정이입 이론을 비판하면서, 이른바 '미적인' 혹은 '정서적인' 성질(유쾌함, 우아함, 엄숙함 등)은 우리가 대상을 향해 투사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통해 직접 지각하는 것이라고 설명 한다.

게인즈버러 (Thomas Gainsborough,1727~1788)

영국의 화가. 서포크 주에서 태어났다. 런던에서 그림을 배우면서 풍경화에 관심을 가졌으나, 초상화가로 데뷔하였다. 초상화에서는 반 다이크의 영향을 받아 모델의 성격을 정서적으로 파악하여 유연한 광선 밑 에 생겨나는 명암조와 우아한 색조로 표현하였다. 평생 풍경화를 계속 그렸으며, 좋은 풍경을 찾지 못하였을 때는 탁상 위의 소도구를 주제로 풍경화를 그릴 정도로 열정을 가졌다. 그는 자연에 대한 애정 표현으로 19세기 풍경화의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주요 작품으로는 <시든스 부인> <로빈슨 부인> <푸른 옷의 소년> 등이 있다.

결구법(結構法)

점·획을 결합·구성하는 법 결체와 용필은 서법에 있어서 나는 새의 날개와 같다. 용필에 익숙하면 결체도 자연 정연 해진다. 용필은 글씨의 점과 획을 만드는 법이고, 결체는 생동하는 점획을 결합 조직하는 방 법으로 옛부터 간가·결구 또는 분간·포백이라고도 하여 서법의 중요한 줄거리로 전해 내 려왔다. 엄밀히 말하면 간가는 점획의 간격을 적당하게 체제를 맞추는 것이고, 결구는 일점 일획을 조직하여 조립하는 것이다. 간가는 글자가 자간 점획의 분할과 분할된 여백의 공간 적 등분을 의미하고, 결구는 점획으로 조직된 글자의 자세와 균형을 말하는 것이다. 결구를 사람의 스타일과 얼굴 형태에 비유한다면 간가는 얼굴에 있는 눈썹·코·입의 미묘 한 포치에 비유할 수 있다. 요컨대 결체의 극치는 다양의 통일이다. 얼핏 보면 기발하게 보 이나 자연성이 풍부한 외에 평정히 보이면서 실은 내면에는 변화가 이루 말할수 없는 것이 다. 거기까지 도달하려면 예민한 관찰력과 풍부한 창작력이 배양되어야 하며, 우리들의 관찰력 과 창작능력이 향상함에 따라 털끝만큼의 부조화도 허용할 수는 없게 된다. 이것은 마치 사 람얼굴의 눈썹·눈·코·입의 위치가 근소한 차로 인해 잘 생기고 못생김이 구분되는 것과 같이 일종의 직각력이 민감하게 작동하여 그것에 대한 조화·부조화를 인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고개지 - 顧愷之 (?~?)

중국 동진(4세기 말엽)의 화가. 자 장강. 장쑤 성 우시에서 태어났다. 364년에 와관사벽면에 유마상을 그려 화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초상화와 옛 인물을 잘 그려 중국 회화사상 인물화의 최고봉으로 일컬어진다. 송나라의 육탐미, 양나라의 장승요와 함께 육조의 3대가라 일컬어진다.

고갱 Paul Gauguin

1848년 프랑스 파리에서 출생한 화가. 부친은 프랑스인이며 모친은 스페인 사람 이었다. 그가 태어났던 무렵에는 정국의 변화로 그의 가족은 멀리 페루로 망명하게 되었는데, 부친은 망명길의 배 위에서 심장 마비로 사망 하였다. 6년간의 망명 생활을 정리하고 프랑스로 돌아온 다음 그는 17세 때 선원이 되어 6 년간 해상 생활을 계속하였다가 보불 전쟁이 끝난 뒤인 1871년에 파리의 어떤 주식거래소에 고용되었고 그때 그는 여가 시간을 선용하여 그림을 그렸다. 그 시절의 작품들은 아카데믹 한 작품으로서 또한 들라크르와 나쿠르베의 영향을 간과할 수 없다. 얼마 후에는 인상파 화 가 중에서 특히 피사로와 사귀면서 그의 작품에 흥미를 갖게 되었고, 또 인상파 그룹에도 참여하면서 그에 따른 새로운 기법으로 작화를 기도하였다. 35세때(1883년) 그는 마침내 직 장을 버리고 화가로서 작품 제작에 몰두할 마음의 각오를 굳혔다. 이로 인해 가족과도 결별 하여 고독과 가난에 쫓기는 생활이 연속되었다. 1886년 브르타뉴의 퐁타방(Pont Aven)에 체 류하다가 이듬해 4월에는 대서양의 마르티니크섬에 건너가 잠시 머무른 뒤 12월까지 재차 퐁타방에 체류하였다. 그때 그는 자신을 중심으로 그 곳에 모인 청년 화가들과 함께 자연의 주관화와 단순화를 시도하여 인상파를 극복해 보이는 생태티즘운동에 나섰다. 1888년 10월 부터 12월까지 남프랑스의 아를르에서 고호와 공동 생활을 시작하였지만 두 사람의 성격 차 이로 인한 충돌이 잦아 결국 고호는 정신병 발작 현상이 나타났고 이 때문에 그는 고호와 헤어져 파리로 돌아 왔다. 이윽고 브르타뉴의 르 풀듀로 주거를 옮겼다. 이 무렵부터 생테티 즘의 추구가 점점 철저하였다. 1890년 12월 재차 파리로 돌아왔으나 문명 생활에 권태를 느 낀 나머지 원시적인 자연과 생활을 동경하여 이듬해인 1891년 태평양의 남동부에 위치한 고 도 타히티(Tahiti)로 건너갔다. 거기서 그는 토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나페아 파 이포이 포], [3인의 타히티인] 등의 대작을 제작하였다. 1893년 귀국한 그는 파리에서 작품을 팔아 그돈으로 재차 타히티로 돌아가 거기서 여생을 보내려고 염원하였다. 그러나 작품의 판매는 여의치 않았고 또 프랑스에서는 그다지 환영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실망하여서 1895년 2 월 예술의 유토피아를 찾아 재차 타히티섬으로 떠났다. 1900년에는 마르케이자스 제도에 여 행한 뒤 그 중의 하나인 라 도미니크섬에 자기의 작은 오두막을 갖고 한 때는 생활도 비교 적 여유있게 보냈다. 그러나 1902년 수족에 습진이 생겨 몹시 괴로움을 받았고, 이듬해 3월 에는 토인을 옹호하였다는 이유로 관헌과 시비하다가 부당한 금고형을 선고받는 등 일련의 사건으로 고독과 비탄 속에 살다가 5월 8일 사망하였다. 자전적인 수필집 [노아 노아]도 남 기고 있다. 고객은 세잔, 고호와 함께 이른바 [후기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3거장 중의 한 사 람이다. 그의 예술적인 특색은 브릴리언트한 색채와 단순화된 인체의 여러 형식의 채용에 있다. 색깔 그 자체를 색면으로 해서 구성하며 장식적인 효과가 현저하다. 종합과 안정감이 라는 점에서 이탈리아의 프리미티브(원시적인) 작가에게 통하는 것이 있다. 엑조틱한 인간 환경을 그린 최초의 근대 화가였다. 더구나 인상파의 수법에 반대하여 인간의 감정을 화면 에 직접 투입하려고 하는 생각에서 선이나 색의 설명적인 요소를 일체 생략하였고 또 전체 를 상징적, 종합적으로 통일하려고 하는 새로운 화면 구성을 시도하였다. 그는 1903년 어지 러운 자신의 생활을 마침고 그의 인생의 많은 작품을 인류에 선사하였다.

고딕 미술(Gothic Art)

로마네스크 미술에 이어 12세기 중기부터 르네상스 미술의 개화기에 이르기까지, 서유럽 전 역에 전개된 중세 기독교 미술의 발전 단계 및 그 일반적인 양식을 의미한다. 원래 이탈리 아 르네상스 예술가들이 중세 선축을 야만족인 고트(Goth)인이 가지고 온 것이라고 비난한 데서 유래된 미술사 및 비평 용어. 영국에서 'Gothick'이란 단어는 '재미없는', '기묘한' 혹 은 고전적 규범과 반대되는 것이란 의미로 17세기와 18세기 작가들이 사용해 왔다. 그러나 영국 골동품 애호가들이 중세 기념물에 관심을 나타내기 시작하면서 점차로 경멸적인 의미 에서 벗어났다. '고딕'이란 용어는 건축에서 특히 성당 건축에서 그 평가를 받게 되지만, 거기에 함께 형성된 장식, 조각, 회화, 공예에 이르기까지 총괄적으로 확산되어 적용되었다. 건축;중세 고딕식 석조 건축에서 둥근 천정의 무게가 벽을 붕괴시킬 위험이 있었기 샔문에,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천정의 무게를 가볍게 하고 장식판자를 붙일 수도 있는 기둥과 리브 골조구조(ribbed vault)가 개발되었다. 동시에 뽀족아치를 도입함으로써 외부 압력을 경감시 켰고 따라서 여러 곳에 둥근 천정이 가능해졌다. 그리하여 하중은 벽에서 부벽으로 옮겨졌 다. 이러한 것들과 함꼐 고딕건축의 특징인 부연부벽(flying buttess), 뾰족탑 등은 기능적 장점 외에도 형태상 상승감을 강조하는 미족 아름다움을 위한 것이었다. 1140년에 세운 생 드니 (Saint Denis) 사원의 예배당과 성가대석은 최초의 순수한 고딕 건뮬로 추정된다. 그외 의 순수한 고딕 건물로는 1163년에 시작된 파리의 노트르담(Notre Dame)과 브르주 (Brourges), 라용(Laon) 등이 있다. 생 드니는 고딕 성당의 특징들을 구체적으로 나타태고 있는데, 서쪽 정면에는 장미창이, 서쪽 현관에는 신학의 교과 과정이 세밀하게 조각되어 있 다. 아미엥(Amiens) 역시 순수한 고딕 양식을 따르고 있다. 이를테면, 기둥은 네 부분으로 된 궁륭의 리브들과 연결되고 성가대석 주위의 회랑은 측랑과 이어지며 세 개의 입구가 있 는 서쪽 정면은 네이브와 측랑의 윤곽을 반영한다. 영국에서 이러한 양상은 캔터베리 성당 성가대석에서 보여진다. 즉 성가대석은 회랑으로 마무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네모난 마리 아 당으로 끝난다. 가장 전형적인 초기 영국 성당은 1220년에 시작된 살리스베리 성당이다. 13세기 초의 고딕 양식은 큰 교회당 양식을 중단하고 수도원 건축, 지역구교회, 가정 건축에 서 사용되는 요소들을 채택함으로써 국가별 지역별로 다양해졌다. 고딕 가종 건축의 예는 중세 후반에 시작되는데, 서유럽 전역의 도시 건물, 길드 건물, 성 및 요새등에서 후기 고딕 의 몇가지 특징이 드러난다. 건축은 고딕 시대를 결정짓는 대표물로서 1140년부터 16세기 중반 이후까지 지속되었다. 조각;'고딕'이란 용어는 좀더 제한된 의미로 회화와 조각에도 적용된다. 전형적인 고딕 조각 의 발전은 렝스와 방베르 성당 조각들과 함꼐 13세기 초에야 비로소 결실을 맺게된다. 그 작품들은 고전적인 균형과 자연적인 것에 대한 충실함으로 특징되는데. 여기에서 로마네스 크 건축 조각의 육중한 엄격성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다. 뒤이은 고딕 건축의 경향은 고딕 조각과 병행한다. 그것은 기념비적이고 영웅적인 것으로부터 복잡하고 친밀한 것으로 발전 하는데 비례는 과장되고, 감정 표현은 강조되며, 콜로뉴 대성당 성가대석의 사도 인물상에서 처럼 주름장식이 인체를 감싼다. 같은 특징이 프랑스에서 수출된 상아와 금세공에서도 나타 난다. 새로운 주제들이 14세기 종교운동과 관련하여 채택되었는데, 그것은 개인적인 헌신과 신비로움 묵상에 강조점을 두었다. 14세기의 이러한 경향들은 연속되는 주름의 흐름과 아름 다운 형상으로 발전되어, 15세기 초의 국제적 고딕 양식과 연결된다. 또한 클라우스 슬루터 의 활발한 자연주의는 휘날라는 주름장식과 딱딱한 몸짓이 화려한 플랑보와양 건축과 조화 를 이루면서 고딕조각 마지막기의 토대를 마련했다. 회화;고딕 건축의 시초로 보는 12세기에 회화 범위는 비교적 제하노디어 있었다. 사실상 벽 공간이 점차로 제거된 것은 회화를 위한 공간이 없는 데서 연유한다. 그대신 스테인드 글라 스 창문에 디자인과 색채계를 표현하였다. 고전적인 주름, '고딕적 흔들림(Gothic sway)'과 같은 필사본의 서정적 세련성 등은 전형적이고 새로운 특징으로 간주된다. 13세기 도시와 성곽에서 증가하고 있었던 예술과 문학의 새로운 유행은 로맨틱 삽화의 산출을 자극하였다. 그 예로 하인리히 폰 펠덱케의 <에나이트 (Eneit)>,브누아 드 쌩모아 레의 <트로이 로맨스 > 등을 들 수 있다. 패널화는 제단뒤의 칸막이로 제공되기 이전에는 그다지 발전하지 못하 였다. 로마네스크 시기에 시작되기는 했으나, 실제로는 14세기에 둣치오니의 <시에나 성당 마에스타>에서 비로소 일반화 되었다. 마르티니의<수태고지>는 고딕 패널화의 특징을 지닌 중요한 작품이다. 14세기 초 지오토로 시작하여 15세기 말 로지에 반 디르 바이덴이나 보티 칠리로 집약되는 회화의 발전을 고딕으로 본다면, 양식화, 선적인 특징, '고딕식 흔들림'을 이 시기의 주된 특징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고딕의 부흥(Gothic Revival)

중세적인 형태와 중세풍의 취미에 대한 낭만주의적인 관심에서 18세기에 시작된 고딕 양식 의 부활. 일부는 문학에서 시작되었고, 또 부분적으로는 그 당시 널리 퍼져 있던 팔라디안의 엄격한 건축 디자인 규범의 파괴에서 시작도었다. 몇 개의 예외를 제외하고 초기에는 단지 고딕식 장식이 있는 그레고리안 건축이 그 표본이었다. 그러나 19세기 초의 양식은 종교적 부활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푸긴과 같은 건축가는 그것은 '이교적인 르네상스양식과 반 대되는 것으로 교회에 적합한 유일한 양식' 이라고 주장하였다. 교회는 중세의 고딕 건축물 을 조심스럽게 모방하며 건축되었다. 처음에는 대부분 14세기 건물을 모방하였다. 그러나 19 세기에는 영국이나 그 이외의 또다른 진보된 중세 양식들이 유행하였다. 위리엄 버터필드, 스프리트와 같은 건축가들에 이놹해 고딕의 원칙들이 채택되었다. 그 외의 지도적인 건축가 로는 길버트 스코트와 피어슨이 있다. 고딕 양식은 도시 및 상업건축을 포함하여 19세기 영 구 건축을 휩쓸었다. 찰스 이스트레이크 경은 1871년 <고딕부흥의 역사>란 책에서 고딕 양 식을 '영국에서 일어난 가장 널리 퍼지고 가장 영향력 있는 예술 운동'이라고 언급하였고, ' 조형예술에서 순수하게 영국적인 운동일 것'이라고 기술하였다.

고르키(Arshile Gorky)-(1904~1948)

호프만과 함께 미국 추상의 표현주의를 일으킨 사람이다. 전후 미국 현대 미술 형성에 중요 한 업적을 남겼다. 과거의 양식들에서 그가 원하는 것을 취해 새로운 조합을 만들어 냈는데 겉보기는 추상적 형태와 전통적인 조화로운 색채들을 사용한 경솔한 기법같다. '폭포'는 물의 의식과 신비를 표현하며 온화하고 꿈같은 색채를 갖고 있다. 초현실주의와 추상 표현주의를 연결하는 역할을 한 장본인으로 간주된다. 세잔느,피카소, 미로, 칸딘스키 등 20세기 초의 거장들의 화풍에 대한 성찰을 함으로써 미 술수업을 시작하였으나 이를 단순히 모방하는데 그치지 않고 앞시대 거장들이 이루어 놓은 개혁사항에 대해서 새로운 답을 주려는 시도를 하였다. 1930년대를넘기면서 급격한 변모를 보인다. 즉흥적 표현력은 더욱 자신감있게 발전시켜나간 다. 1940년부터 점점 추상적,유동적으로 변해간다. 미로의 시적 공간과 선형적 리듬, 마송의 색 채와 유기적 형태가 이 시기의 그에게 큰영향을 미친다. 주요 작품 : 한계, 꽃 같은 물레방아간의 물, 간장은 수닭의 벼슬 등

고전주의(Classicism)

유럽 예술 형식의 하나로, 낭만주의의 대립적 개념. 평형과 질서, 조화와 명석을 추구하며, 단정한 형식의 정돈, 엄격한 구성을 중요시하는 것이 특색이다. 고전주의는 주로 예술작품과 예술 이론에서 나타나지만 그 밖의 다른 문화 영역에서도 나타난다. 예술상에 나타나는 고 전주의의 주요한 특징은 우선 이성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 창작목적은 진실을 포착하는 데 있고 이것을 예츏적 형상속에서 표현하는 것, 자연을 존중하고 따르는 것, 사회의 도덕적 이 상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 인식과 미적 형상과 도덕적 질의 동일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입장은 신에게 예종하는 중세적인 인간으로부터 인간의 독자성을 자각하여 인간 본성의 발 전을 추구하고 그 근거를 고대 그리소 로마의 작품과 예술론에서 찾으려 했던 16세기 르네 상스기에 나타나, 휴머니즘적인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17세기에 들어와 고전주의는 특히 프 랑스에서 발전하였는데, 사회적으로는 절대주의 군주제의 성립 과정 속에서 나타났다. 즉 일 정한 제약을 지니고 있었지만 부르좌 계급의 사회적 요구를 반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저 주의의 발전은 형식주의에 빠져, 19세기 초가 되면 쇠퇴하고 만다. 그 까닭은 부르좌 사회가 지니는 본질적 모슨이 빈부의 뚜렷한 대립을 비롯한 다양한 모순을 노정하여, 종래의 고전 주의적 구상의 파탄을 초래하였기 때문이었다. 고전주의의 뒤를 이어서는 낭만주의 사조가 나타났다. 한편 미술사에는 17,8세기에 바로크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고전주의와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전반에 걸쳐서 루이 왕조의 궁정 미술을 극복하려고 일어난 신고전주의가 있 다. 전자는 고대의 목가적 세계를 그려 격조있는 화풍을 세운 푸생으로 대표되며 후자는 냉 정,명쾌한 화풍으로 프랑스 혁명 전후의 시민계급의 감정을 표현한 다비드와 그의 제자인 앵그르로 대표된다.

고호 Vincent Van Gogh (1853-1890/네덜란드)

후기 인상파. 네덜란드 브라반트 흐르트 츤데르트 출생. 고호는 목사인 아버지의 장남으로 태어나 처음에 는 큰아버지가 경영하는 미술상회의 점원으로 근무하다가 적성이 안맞아 그만두고, 전도사 가 되어 광산촌에서 근무했으나 역시 별 발전을 보지 못하고 결국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 다. 1880년경부터 본격적으로 원근법과 명암, 미술, 인체 해부학 등을 공부했으며 인상파의 색체 와 쇠라의 점묘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고호는 그의 내면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의 내면에 흐르는 열정적인 성격과 강한 개성을 바탕으로 인상파나 점묘화는 또 다른 자신의 세계를 창조하여 고갱, 세잔과 함께 후기 인상파의 대표적인 작가가 되었다. 또한 고호의 예술이 있기까지는 형의 재능을 믿고 끝까지 보살펴준 동생 테오의 힘도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고희동(1896~1965)

개화된 집안에서 태어나 한성어학교에서 불어를 배우고 궁중의 주사로 일을 하였다. 1905년 일을 그만두고 전통 서화를 배웠으나 중국화풍을 그대로 답습하는 방법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1909년 일본으로 건너가 1915년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하였다. 귀국 후 1918년 결성된 '서화협회'에서 중심적인 활동을 했다. 이후에는 서양화를 포기하고 전통회화로 돌아갔다.

곤살베스 (Nuno Gon lves,?~?)

15세기 포르투갈의 화가. 알폰소 5세 때 궁정 화가로 활약하였다. 유일한 현존 작품〈성 빈센티우스 수도원의 제단화〉가 1882년에야 성 빈센티우스 수도원에 서 발견되었다. 이 제단화가 1931년 파리에서 전시된 뒤비로소 세계 미술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화가 로 알려졌다. 6개의 화폭으로 구성된이 제단화는 리스본 시와 포르투갈 왕궁의수호 성인인 빈센티우스를 주제로 그린 작품이다. 중세 종교화로 분류되며, 이탈리아와플랑드르 미술의 영향에 그치지 않고 선의절제, 능란한 터치, 뛰어난 성격 묘사, 구성의 완벽함 등에서 독자적인 경지를 보여 준다.

공간(space)

①음악,문학 등의 시간 예술에 대하여 공간 예술이라 불리는 회화, 조각 등의 조형 예술은 직접으로는 현상의 공간적 여러 관계의 재현에 그 기능이 한정된 재료 및 수단을 쓰며,스스 로를 공간적으로 한정하고 구성한다. 현대 조각에 공간의 문제를 새로이 제가한 것은 가보 및 페브스너다. 그들은 종래의 매스 편중이 잘못이라 하여, 시간과 공간의 통일적 형식을 실 현하기 위한 중요한 계기로서 동력학적인 리듬을 다루었다. 이어서 모흘리 나기도 물리적 공간 속에 실제로 긴장을 만들어내고 있는 여러 가지 힘을 동적이고 구성적인 시스템에 따 르게 하고, 이로써 공간을 능동화 할 것을 주장하여 모빌 조각의 이론적 효시를 이루었다. 회화에서도 착각적으로 공간을 재구성한다는 종래의 방법을 배제하고, 회화의 평면성을 근 거로 하는 그성에 비해, 비재현적인 조형 공간을 창조하려는 입장을 입체파에서 비구상 회 화에 이르는 현대 회화에서 볼 수 있다. 이 조형 공간의 창조에는 동적인 색면 및 포름의 구성의 중요한 문제이다. 이런 점에서 볼 샔, 미술가는 양감을 면의 요소로 분배하고, 또 포 함된 공간과 동시에 배제된 공간의 조형적 설명을 붙일 수 있는 능력, 그밖에 많은 특수한 조형적 능력이 필요하다고 논해지고 있다. ② 브리짓드 릴리, 피터 세들리, 이레네 윌스 등 이 1968년에 설립한 런던에 있는 단체 이름. 미술가들에게 작업 공간을 마련해주는 일을 목 적으로 하고 있다. 이 단체는 미술가들에게 넓은 작업공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점과 낡아서 사용하지 않고 있는 건물들이 미술가들에게는 충분히 유용한 작업 공간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점 등의 두가지 사항을 일반에 인식시키는 데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이 단체 는 설립한 지 1년만에 런던에 있는 낡은 창고 건물인 성 캐더린 독을 입수하여 90명의 미술 가들에게 작업 공간을 마련해 주기도 하였는데, 여기서는 개인 작업뿐만 아니라 전시회도 자주 열렸다. 공간그룹 정기 간행물인 <오늘의 예술(Art d'Aujo-urd'hui)>지와 연관을 가진 미술가들에 의해 1951 년 파리에서 설립된 신구성주의 미술가들의 협회. 회원으로는 앙드레 블록, 델 마를, 피에, 베오티, 니콜라스 쇠페르, 고렝 등이 포함된다. 단순히 공간과 건축물 또는 도시 생활에 대 한 하나의 양상 바꾸어 말하면 사회적이며 비 개인적인 행동-으로서의 미술에 대한 그들의 개념은 신조형주의와 구성주의로부터 유래한 것이며 기타의 현대적 경향(공간주의, 제로 그 룹, 그리고 시각예술 탐구 그룹)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공간예술 일정한 공간을 구성함으로써 형상화되는 예술. 시간예술에 대칭되는 말. 예술 일반을 그 표 상형식의 차이에 의해 분류한 개념으로, 그것은 보통 조형예술과 뮤즈적 예술의 분류와 일 치한다. 즉 전자는 회화, 조각, 건축등과 같이 정지와 병렬의 예술을. 후자는 음악, 문예 등 과 같이 운동과 계기의 예술을 의미한다.

공간주의

이탈리아의 화가 루치오 폰타나가 제창했던 예술운동. 미래주의 이후 이탈리아의 가장 중요 한 예술 사조의 하나이다. 폰타나는 1946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발표한 '백색 선언'을 통 해, 기존 미술의 미학을 타파하고 시간과 공간의 통일에 기초를 둔 새로운 예술을 발전시켜 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개념을 구체화시키기 위하여 공간주의를 들고 나왔다. 그는 1947년 밀라노에서 뜻을 같이 하는 작가들을 모아 그룹을 결성하고 공간주의 운동을 추진해 나갔다. 공간주의는 구체미술의 사상에 다다이즘의 진보적이고 과격한 파괴 정신을 결합시 키고자 했다. 공간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사상은 '공간개념'이다. 즉 회화와 조각의 고전적인 구별을 제거하게 위해서는 새로운 공간개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폰타나는 <공간개념>이 라는 제목으로 2천여점 이상의 작품을 발표했는데, 그것은 <찢기>, <구멍>, <유채>, <돌 >, <바로크>, <초크>, <잉크>, <종이>, <수량>,<자연>, <금속>, <신의 종말>, <소무대 >, <타원> 등의 시리즈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들은 모두 폰타나의 여러 가지 수법의 변모 를 보여주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단색만 칠한 캔버스를 예리한 칼로 찢고 구멍을 내었던< 찢기>와<구멍>이 유명하다. "이탈리아와 같은 나라에서는 캔버스를 찢어 구멍을 뚫는데도 10년이나 걸렸다."란 그의 말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엄청난 대 전통을 자랑하는 이탈리아에 서 폰타나는 캔버스에 구멍을 뚫음으로써 참신한 공간개념의 탄생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이 운동에 동조, 참가했던 작가로는 도바, 크리파, 도나티, 바치 등이 있으며 이들의 새로운 사상은 <공간선언>이란 출판물로 발표되었다. 공간주의는 1960년대의 유럽의 전위 예술운동, 틀히 눌, 제로 등의 그룹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공동체 미술(Community Art)

박물관의 죽어 있는 예술과 상반되는 것으로서 살아있는 예술을 가리킴. 화랑이나 무대라는 사오항을 벗어나 예술행위를 구체화하고, 사회,정치적 목적을 위해 특정 집단과 밀접한 관계 를 유지하려는 욕구를 가진 일군의 예술가들의 활동. 공동체 예술가들은 특정 예술 형태로 전문가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규범을 성취하기보다는 집단내에서 작품의 결과에 주목한 다. 공동체 예술가들은 거리의 무대, 비디오 벽화, 교통수단, 기구(inflatables), 놀이구조 따 위를 이용한 보편적인 매체 접근 방법을 쓰고 있다. 그들은 때로 어른들과 교제하는 수단으 로 어린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기도 한다. 거리무대나 현장 비디오는 그 자체가 목적이라기 보다는, 목적에 대한 수단이다. '액션 스페이스'와 '인터액션'과 같은 그룹이 지역공동체 중 쳾김의 역할을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관객들과의 일차적인 만남은 거리, 공공건물 등과 같 은 환경속에서 작품을 성취함으로써 형성된다. 한편, 산업, 복지국가와 같은 기존제도에 대 한 공동체 미술 그룹들의 태도는 실용적인 협조에 속한다. 1970년대의 미술 공동체 미술 운 동은 1960년대의 반문화로부터 발전되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것은 점차 공식화되고 제 도화되었다. 공동체 예술가들은 전문가,직업적인 예술가들과 비전문가들 사이의 구분을 없앤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공동체 벽화운동에서 흔히 있는 일이다. 벽화는 황폐한 지역을 밝게하고, 민족 에 대한 관심을 끌어들이는 손쉬운 방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특히, 미국의 빈민가 에서 유행한다. 고동체 미술이 많은 열성적인 후원자들을 갖고 있더라도, 사회 변화를 위한 도구로서 그것의 가체에 대해 매우 회의적인 또다른 사람들, 즉 주로 개념적이고 이론적인 예술적 배경을 가진 미술가들이 있다. 그 이유는 정치적 효율성이 단편적인 방식으로 이들 공동체 미술가들을 제한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동체 미술은 대중매체를 통해 세계적인 규모 로 유지되어온 서구사회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에 참여하지 못한점과 그러한 이데올로기가 전달될 수 있는 회화적, 언어적 관례를 검토하지 못했다는 점을 비판받을 수도 있다.

공예(arts and crafts)

미술을 응요한 공작, 금속기, 칠기, 목죽세공, 도자기, 염직품, 자수 등을 말한다. 조각이나 회화는 실용이라는 점에 구속되지 않고, 자유로운 구상에 바탕을 두고 창작되는 예술. 이른 바 자유 미술인데 반해 인해, 공예는 실제로 실용되는 물건을 예술적으로 병행하는 것, 이른 바 응용미술이다. 손과 도구로 하는 수공예도 있고, 기계의 힘을 빌어 생산하는 기계공예도 있다. 공예가 조형예술의 한 특수 영역으로 간주된 것은 19세기 중반 이후의 일이다.

공예운동(Arts and Crafts Movement)

19세기 후반 영국에서 윌리엄 모리스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공예 개량 운동. 이는 1851년 대 전시회 이후 영국에서 제조상품의 질에 대한 불만의 소리가 높아 지고 , 민속 예술에 대한 관심이 증가되고, 제품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중세장인들의 사회적 제도에 대한 향수어린 관심을 갖게 된 데서 발단되었다. 즉 장인들의 도제와의 관계 및 길드와의 관계는 세습적이 고 목가적인 성격을 지닌 것으로 믿어왔다. 이러한 생각은 푸긴에게서 피력되어, 러스킨의 저서에서 발견되며, 윌리엄 모리스에게 영향을 주었다. 모리스는 먼저 자신의 집 건축과 가구에서, 그리고 1861년 모리스 마샬 앤드 폼커 회사를 통해 수공직물, 직조, 가구 등을 생산함으로써 기계시대에 수공업의 부활을 꾀하였다. 그러 나 예술작품은 도덕적인 개념의 산물이며, 따라서 기계는 도덕관념이 없으므로 예술을 생산 해 낼 수 없다는 러스킨의 생각과는 달리 모리스는 완전히 기계를 배척하지는 않았다. 1860 년 이후 모리스의 이러한 혁신운동은 많은 건축가와 공예가들의 호응을 받았으며 80년대에 들어와서는 공예기술의 행상을 위해 '센추리 길드','아트 워커스 길드','공예전람협회' 등의 단체가 조직되었다. 그 후 이 운동은 국제적 양식인 아르 누보와 연결되어 해외로 퍼져나갔 다. 특히 독일,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등에서 성공을 거두었는데, 독일에서는 기계와 관련된 용어로 전용되었고, 바우하우스의 설립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과정미술(process art)

작품을 만드는 과정을 그 작품의 주제로 삼는 미술. 이 개념은 이미1950년대부터 제시되어 왔는데 그 예로 액션 페인팅의 행위적 성격을 들 수 있다. 특히 1960년대 말 많은 전시회가 열려 과정미술이 부각되었다. 극히 단순한 테크닉이 채용되기 때문에 관객들은 최종의 작품 을 보고 그것이 만들어진 절차를 마음속에서 재구성할 수 있다. 그 전형적인 예로는 로버트 모리스의 작품으로 벽에 엽총을 발사한 다음 그 결과를 사진찍고 그 사진을 확대하여 다시 엽총을 쏘고 그 결과를 또 사진으로 찍는다는 식이다. 토머스 알브라이트는 과정미술을 '변화의 행위, 그 자신을 창조하는 과정' 이라고 정의 했 다. 최근의 미술에서 이런 예술 형식이 대중화된 것은 작가들이 과정을 통해 시간의 문제를 다룰 수 있게 됐고, 또한 소재와 재료의 선택이 자유로와졌기 때문이다. 작가 자신은 창조적 인 과정의 구현자로 신체미술에서처럼 미술작품 자체가 되기도 하며 이런 점에서 해프닝, 퍼포먼스, 이벤트의 개념과도 연관성이 있다

과학적 인상주의(Scientific Impressionism)

신인상주의에 대한 또 다른 명칭. 종래의 인상주의를 더욱 이론적이고 합리적으로 발전시켜 나갔다는 의미에꾲 붙여졌다. 이와 상대적으로 전통적 인상주의를 낭만적 인상주의 (Romantic Impressionism)라고 부르고 있다.

관조

미학상의 용어. 대상을 논리에 의하지 않고 직접 구체적으로 파악하는 정신 작용 및 그 작 용의 결과를 말한다. 여기에는 단순한 감각상의 수용으로부터 셀링의 관념론과 같은 고도의 지적 직관까지 많은 단계가 있는데 어느 단계나 모두 정적내지 수용적 태도다. 각 단계에는 각기 그에 상응하는 감정작용이 있고, 양자가 융화되어 각종의 미적 체험이 성립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예술창작이 미의식의 능동적 측면인데 반해서 미적 관조는 미적 향수와 마찬가 지로 미의 수동적 측면이다. 미적 관조는 자아와 대상 사이에 일정한 거리를 전제로하여 성 립되며, 더욱이 그것은 대상에 대한 무관심성을 전제로 하는 점에 있어서 인식론적 활동이 나 실천적 활동과 구별된다. 이 무관심성을 미적 정관으로 보는 경우도 있으나, 해석의 능동 성을 강조한 사고 방식도 있다. 여기에는 예술 체험으로서의 창조족 계기가 가해진 소위 상 상 관조 같은 것도 있는데 이것도 관조의 넓은 정신 작용에 포함된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광선주의 (光線主義) Rayonnisme(불)

인상주의와 미래주의의 영향을 받아 1911년 경부터 러시아에서 미하일 라리오노프와 나탈리 아 곤차로바를 중심으로 전개된 추상 회화 운동. 인상주의의 빛과 색채의 관계를 발전시킨 방사되는 광선 가운데서의 사물의 형태와 색채의 리듬을 파악하는 방법과 미래주의에서 강 조한 회화 속에 일종의 사차원적인 시간을 도입하여 1912년에는 '광선주의 선언'을 발표하 였으며, 순수하게 색과 모양만의 세계 즉 추상화 영역으로 몰입해갔다. 추상회화의 한 방향 을 제시한 점에서 광선주의는 역사적으로 의의 깊은 운동이었다

구도(構圖) composition(영)

스케치에서 작가의 사상이나 감정을 대응시켜 화면에 조화시키는 것 또는 조화시켜서 배치 하는 것. 구도는 두 가지 방법으로 생각할 수가 있다. 하나는 그려낸 것이 어떤 공간을 지배 한다는 예상에 입각한 방법인데, 이를 안으로부터의 구도라고 할 수가 있다. 또 하나는 한정된 공간에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충당해 가는 방법인데, 이를 밖으로부터의 구도라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동양화에서 여백을 살리는 방법 즉 백지 위에 감 한 개가 그 려져 있는 경우는 전자의 예에 속한다. 이 백지의 면적은 반드시 일정한 결정성(決定性)을 갖는 것이 아니며 얼마든지 대소 각각의 모양이 허용될 수 있다. 말하자면 한 개의 감은 여백 공간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화면 전체를 지배하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후자의 예는 미리 결정된 면적 예를 들면 벽면과 가튼 것에 여러 가지 형태와 색깔을 충당해 가는 것이므로 외곽인 벽의 면적이 내부의 형태를 결정하는 역할을 하게 된 다. 구도를 잡을 경우, 기본적으로 점태(點態), 선태(線態), 면태(面態) 및 그들의 복합과 전 면 적과의 관계가 항상 고려되지 않으면 안 되며, 또 이들 점. 선. 면은 색깔을 동시에 그 속성 으로서 취급해야만 한다. 그리하여 리듬, 비례, 균형, 조화, 통일, 변화, 강조 등과 같은 미적 질서의 법칙에 따라 배치되어야 한다.

구본웅 (1906~1954)

유복한 명문가정에서 태어났으나 두 살때 생모를 여의고 사고를 당해 몸에 장애가 생겼다. 표현주의적 스타일의 새로운 회화를 구축했다. 친구의 초상 (1935) 캔버스에 유채 65*53 국립현대미술관 누드와 정물 (1937) 캔버스에 유채 72*90 호암미술관

구석기 시대 미술(Pale olithic Art)

석기 시대의 한 구분으로 , 홍적세 시대에 인류가 제작, 사용한 타제석기 시대, 보통 초기촵 중기촵후기(기원전 35,000년 경) 로 나뉜다. 석기에 이어 점차 뼈나 숫돌로 된 도구를 개발 했으며, 유목과 수렵으로 공동사회를 이룸. 후기 단계에 이르러 동굴을 장식하여 그 속에서 살았으며 그무렵이 뼈나 뿔 그리고돌에 조각하는 기술을 개발하였다. 가장 뛰어난 작품은 동굴의 바위 표면에 선각촵채색 또는 조각된 동물의 상인데, 북부 스페인에 있는 알타미라 동굴의 들소그림과 프랑스의 도르도뉴 지방에 있는 라스코 동굴벽화가 유명하다. 실제로 그 그림들이 주술적 의식의 일부-어쩌면 사냥의 성공을 확실히 하기위한-로서 제작되었다는 것은 거의 의심할 여지가 없다.

구성주의

1917년 러시아에서는 공산정권인 볼셰비키 당이 정권을 장악하고, 국가 통치체재로서 사회 주의를 공표 하였다. 혁명을 전후로 한 시기에 러시아에서는 정치, 경제, 문화 전반에 걸친 개혁풍조가 일어났다. 그리고 예술계도 예외없이 이러한 새로운 시대를 추종하는 전위작가들이 등장하게 된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을 가지고 나타난 20세기 초반의 러시아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 부르조 아 계층에 반대하는 혁명파에 적극 가담하여 레닌의 사회혁명을 수행하기 위한 그림, 조각, 벽보들을 열성적으로 제작하게 된다. 그들은 예술의 개혁이 사회의 개혁과 병행하는 것으로 믿었다. 그래서 이들은 보다 많은 인민을 위한 실용예술로서 기능적인 복장, 가구들을 고안했으며, 산업계 노동자들과 연계하여 연합단체를 결성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이태리의 미래주의와 프랑스의 입체주의의 영향하에서 전통적인 재현의 수법을 거부 하고 순수한 조형수단으로서 기하학적 추상을 미술의 형태로 내세웠다. 이들이 기하형태를 주된 표현양식으로 삼은 이유는 첫째, 기하추상이 합리적 질서의 표상이 자 이상적 사회를 상징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발전하는 과학과 인민들을 위한 새로운 정치적 이념이 상충될 수 있는 세계, 즉 이상세계인 유토피아를 나타내는 방법은 화려하고 복잡한 장식성이나 대상모방성을 배제한 단순하고도 실용적인 외형을 갖춘 것이어야 했다. 또한 기하추상 형태가 보편적 통용성과 간결한 내용으로 효과적인 이념전달의 기능을 수행 할 수 있으며, 대량 생산체재에 기능적으로 적용하기에 모양이 용이해지기 때문이다. 이는 러시아를 비롯한 서구 유럽에 기하추상미술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하게 된다. 그러나 러시아의 혁명체제가 경제적 위기를 타파해 나갈 수 있는 실질적인 일에만 집중하게 되고, 레닌 당국이 예술가들의 창작 활동에 일일이 간섭, 제작품의 성격까지 제약하는 등, 일종의 미술규격화를 시도하면서 추상미술과 같은 실험적인 것에는 등한시하게 됨에 따라 구성주의 작가들은 그 자유로운 예술활동에 한계를 느낀다. 결국, 이들은 서구 유럽으로 하나 둘씩 망명하기에 이른다. 구성주의가 러시아에서 그 나름대로 중요성을 띠고 등장하고 형성되었지만 막상 그 개념의 확장은 망명한 러시아 구성주의자들에 의해 서구 유럽에서 더욱 활발히 진행된다. 나움 가 보나 안톤 페브너스와 같은 형제들은 그들의 구성주의를 적극적으로 서구유럽에 전개시킨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이로써 그들은 예술과 건축의 새로운 국제적 양식을 창조해 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다. 블라디미르 타틀린(1895-1956)은 러시아 구성주의가 탄생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한 작가이다. 1913년에 그는 베를린과 파리를 여행하게 되는데, 파리에서 피카소 화실을 찾게 된 그는 입 체주의 작품들을 보고 새로운 조형예술에 영향을 받게 된다. 특히 피카소가 조각에서의 콜라주가 지니는 의미를 연구하고 있었던 구조물들을 본 타틀린 은 자신의 이후의 작품들을 구성하는 데 피카소의 실험작품들을 참고하게 된다. 러시아로 돌아 온 그가 작업하기 시작한 것은 1914-1917년경 작품인[부조]에서 볼 있는 석 고, 판유리, 유리 조각으로 화면을 덮고 나무, 금속, 판자로 구성한 부조 시리즈였다. 이것은 구조물이든 주조물이든 간에 조각사상 첫 번째의 완전한 추상물로서 일컬어지고 있다. 마르크스의 유물론에 충실한 추종자였던 타틀린은 러시아 혁명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기계 와 건축에 대한 본래의 관심을 당 시대에 맞는 새로운 구축물로서 제작해 내고자 하였다. 이러한 그의 야심은 1920년경에 완성한 [제 3 인터내셔널 기념탑]의 모형에서 잘 드러난다. 이것은 그가 설계한 건축물의 축소모형으로서, 이 작품이 애초에 의도한 대로 지어졌다면 높이 396m에 이르는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가장 놓은 조각물이 되었을 것이다. 이 건축물은 원통과 입방체, 원추형 유리로 감싸 인 일정 각도로 기울어져 있는 나선형 금 속 구조물로 설계되었다. 수많은 유리로 겉면이 둘러싸인 부분들은 회합을 위한 장소를 제공함으로서, 일년에 한번, 한 달에 한번 그리고 하루에 한번씩 완전한 변화를 보이면서 회전하도록 구상되었다. 그는 이후 사회주의 정부의 대대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공리주의적 예술을 실현하는데 중심 적 역할을 하게 된다. 사실 타틀린과 로드첸고를 중심으로 하는 순수한 예술운동으로서 구성주의는 1920년에 그 막을 내리게 되지만 이후 다른 예술가들 과는 다르게 러시아에 남아 계속 작업을 하던 그들 은 무대 대자인 분야에서 많은 공헌을 하게 된다. 1914년작인 [글린카의 '이반 수사닌'의 무대 세트를 위한 스케치]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 가 고안한 무대장치는 러시아적 전통에 대한 재확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건축 구조적인 동 시에 조형적이며 회화적인 단일한 형태를 찾아내려 했던 그의 이상의 일면을 보여준다. 알렉산더 로드첸코(1891-1956)는 1916년에 타틀린과 같이 작업하기 시작하면서 공리주의적 구성주의에 충실한 태도를 보인 미술가이다. 그는 1920년경 타틀린 처럼 미술가가 공학이나, 건축, 선업 디자인에 예술을 실용적으로 적용하여 혁명에 이바지해야 한다는 공리주의 사상 에 접근하게 된다. 공리주의적 구성주의는 예술과 과학, 그리고 실제 생활이 서로 결합되어 예술과 과학이 실용적인 생활의 한 도구로 이용되기를 원하는 입장을 지니고 있었다. 이는 그 시대 사회이념에 대한 신뢰에서 출발하면서 거기에 적합한 구체적 모형을 제시하는 것이 자신들의 임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새로운 구성주의를 실제 건축술에 도입해서 이상세계 의 현실화를 실현하려고 했다. 1923년의 [맥주선전 포스터]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예술이 실용성 있는 대중 의 미술로서 역할 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러시아 아방가르드 기수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가 중 류보프 포포바(1889-1921]가 있다. 그녀는 구성주의의 여성작가 중 예술 여러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작가였다. 부유한 부 르조아 집안의 딸로 태어난 포포바는 어릴 적 유럽 여러곳을 여행 다니면서 국제적인 감각 을 키울 수가 있었다. 1912년 파리를 방문하여 큐비즘 화가였던 르 포코니에와 메칭거에게 입체파를 전수 받았다. 1915년경에 그린 [앉아 있는 인물]과 [식탁 위의 주전자]는 이러한 그녀의 화업을 잘 보여주 고 있다. 분석적 입체주의의 형식을 갖추고 있는 이들 작품은 그녀가 러시아로 돌아가 성숙 한 큐비즘적 미래주의 양식을 발전시키는데 일익을 하는 시기의 작업들이다. 또한 그녀는 러시아에서 활동을 시작하면서 새로운 작법을 발전시켰는데, 1914년작인 [이른 아침]과 같은 작품에서 보듯이 서구의 회화 기법과 그녀 자신의 개성적 어법이었던 동양적 색채, 러시아 문체와 같은 러시아 고유의 형태들을 혼합하여 원색이 두드러지는 작품을 만 들어 낸다. 그녀는 뒤이어 구성주의적 강령이 확인되는 작업들도 한다. 1923년에 제작한 [' 젬리아 디봄'의 무대 세트를 위한 디자인의 일부분]이란 작품에서도 볼 수 있듯이 무대 예 술에 기하학적 추상을 접목시키는 실험을 통해 2차원 평면 미술이 3차원의 공간미술에 적용 되는 예를 보여 주었다. 엘 리시츠키(1890-1956)는 독일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하고 러시아로 돌아와 로드첸코의 비 대상주의와 타틀린의 구성주의와 관련을 맺으며 활동한다. 그는 러시아 절대주의, 비대상주 의, 구성주의를 함께 모아 결합시키는 데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네덜란드의 데 스 틸, 독일의 바우하우스의 사상에도 영향을 끼쳤다. 1923년의 [프룬 12E]를 비롯한 프룬 시리 즈는 종합적 큐비즘 시기의 피카소와 후안 그리, 그리고 다른 입체파 화가들과 연결되는 기 하형태의 추상적 요소를 다루고 있다. 비공리적 구성주의를 주창했던 나움 가보(1890-1977)와 안톤 페브너스(1886-1962)형제는 보 통 구성주의자로 알려져 있지만 타틀린을 중심으로 하는 공리적 구성주의와는 그 진로를 다 르게 하고 있다. 그들은 조형이념에 있어서 말레비치와 일맥상통한 순수조형 예술을 추구하였다. 1915년에 제작된 [구성된 두상]에서 볼 수 있듯이 나움 가보는 입체물과 주변공간의 구성사이의 관계 에 크게 관심을 가지면서 기하학적 조각을 완성하고 있다. 그들이 기하학적 추상에 매료된 것은 20세기의 새로운 미술을 향한 투쟁이 비 재현적인 추 상에 의해서 완성될 수 있으리라고 믿었기 때문인데, 사실 두 형제가 러시아에서 활동한 이 시기 즉 1917년에서 1920사이에는 공리와 비공리의 분리가 확실시되지 않았던 시기로서 대 부분의 추상화가가 의욕을 가지고 혁명사상에 동조하면서 작업을 해 나가고 있었던 때었다. 그러나 1920년을 필두로 타틀린과 주변 작가들은 점점 예술이 혁명에 실제적인 역할을 하여 야 한다는 반강제적인 공리주의에 가담하게 된다. 가보아 페브스너 그리고 그의 추종자들은 이러한 입장에 반대하여, 어떤 결과에 이르게 되 든 화가로서의 그리고 순수예술가로서의 독자성과 자유, 권리를 주장했다. 이들은 1920년 8월에 [사실주의 선언]을 발표함으로서 자신들의 입장을 더욱 공고히 했다. 여기서 이들은 자연모방이 아닌 절대적 이념과 형태를 추구하는 것으로 추상미술의 기본이 념을 밝히고 있다. 구성주의 (Constructivism)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러시아에서 건축, 조각, 회화, 공예의 여러 분야에 걸쳐 일어난 전위적인 추상미술운동. 그 이름이 나타내고 있듯이, 외계의 대상에 대한 재현을 일체 거부 하고, 순수한 모습으로 환원된 조형 요소의 조합으로써 작품을 구성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이는 , 본질적인 조형 요소를 중요시하여 쓸데없는 장식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즉 그것은 건축에 있어서는 기능주의로, 조각촵회화에 있어서는 기하학적 추상주의로 이어진다. 특히 건축촵조각에 있어서는 금속, 우리, 그밖의 근대 공업이 나은 새 로운 소재를 구사하여, 참신한 공간 표현을 하였다. 특히 이 운동은 조형 활동에 의한 사회 건설의 참여를 주장하며, 정치성과도 적극적인 결합을 보인다. 1919년에 타틀린이 설계한 < 제 3인터내셔널 기념탑>계획안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그밖에 절대주의의 화가 말레비치나 리시츠키, 조각가인 나움 가보와 페브스너 형제, 로드첸코 등이 그 대표적 작가이다. 이 구 성주의 운동은, 1920년에 서유럽에 퍼졌고, 건축, 조각, 회화 뿐만 아니라 무대 예술, 상업디 자인 등에도 큰 영향을 주었으며, 바우하우스 운동을 통하여 세계 각국에 전해졌다.

구성주의(構成主義) Constructivism(영)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러시아에서 건축, 조각, 회화, 공예의 여러 분야에 걸쳐 일어난 전위적인 추상미술운동. 그 이름에 나타내고 있듯이, 외계의 대상에 대한 재현을 일체 거부 하고, 순수한 모습으로 환원된 조형 요소의 조합으로써 작품을 구성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이는 , 본질적인 조형 요소를 중요시하여 쓸데없는 장식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나아 가게 되었다. 즉 그것은, 건축에 있어서는 기능주의로, 조각. 회화에 있어서는 기하학적 추상 주의로 이어진다. 특히 건축. 조각에 있어서는 금속, 유리, 그 밖의 근대 공업이 낳은 새로운 소재를 구사하여, 참신한 공간 표현을 하였다. 특히 이 운동은 조형 활동에 의한 사회 건설 의 참여를 주장하며, 정치성과도 적극적인 결합을 보인다. 1919년에 타틀린이 설계한 <제3 인터내셔날 기념탑> 계획안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그밖에 절대주의의 화가 말레비치나 리시츠키, 조각가인 나움 가보와 페브스너 형제, 로드첸코 등이 그 대표적인 작가이다. 이 구성주의 운동은, 1920년대 서유럽에 퍼졌고 건축, 조각, 회화뿐만 아니라 무대 예술, 상업 디자인 등에도 큰 영향을 주었으며, 바우하우스 운동을 통하여 세계 각국에 전해졌다.

구조주의와 미술

구조주의와 미술 구조주의(Structualism)에 관한 논의에는 항상 두 가지의 문제가 포함되어 있다. 1960년대 후반 프랑스를 중심으로 이 논의가 한창 부각되었을 때는 구조주의는 무엇보다 근대 유럽 사상의 하나의 핵을 형성하고 있던 진화론적 역사주의에 대립하는 것으로 파악되었고, 대체 로 이데올로기적인 문제로서 취급되었다. 물론 이것도 중요한 것이지만 미학과 관련된 논이 놹가 이루어지는 경웅는 오히려 과학적인 방법으로서의 구조주의가 문제되고 있볾. 구조주 의 언어학에서 도출된 학문의 한 분야인 구조주의 인류학은 사회 행위, 신화, 기호체계 및 예술에 대한 경험적인 연구를 통해인간문화에 있어서의 보폰적인 원리, 질서 혹은 구조를 발견하려는 방법이다. 구조주의는 프랑스의 문화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가 제창했다. 레비 스 트로스는 인간사회를 모든 역사의 빛에 비추어 포착할 수 있고, 이것에 의해 사회적 이해관 계가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하였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행동은 생물할적이고 자연적인, 다른 한편으로는 문화적인 법칙성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이다. 레비 스트로스는 이 경우 인간의 노동활동에 있어서 도구의 이용이 그 기초에 놓이고 양자가 통 일되어 발전하고 있다고는 보지 않고, 이들 대립물의 근저에 있는 규칙이 인위적인 제약을 낳아 생물학적촵자연적인 법칙성 위에 문화적인 법칙성이 성립하는것이라고 한다. 그는 과 학적으로 사회를 연구하는 목적은 인간사회의 상호관계의 형식을 이루는 구조 즉 무의식적 본성에서 집단형성이 나타나는 구조를 발밝히는 것으로, 이러한 무의식적 본성은 어느 시대, 어떤 인간 집단의 구체적이고 다양한 현상에도 포함되어 있다고 본다. 전통이나 의식 등의 상징 형식이 가장 중요하다. 구조주의 연구 방법에는 수학적 수단을 적용하려는 면이 보이 는데, 이것에 의해 형식적 구조를 명백히 밝히려 하는 것이다. 미국의 미술사가 잭 번햄(Jack Burnham)은 최근 많은 현대 예술작품에 공통적이고 논리적 인 구조를 밝혀내려는 야심적인 시도를 하면서 레비 스트로스의 방법론을 원용하였다.

구체미술

내면적인 관념을 시각적으로 구체화한 미술. 논리적으로 말하자면 추상미술에 대립되는 말 이어야 하겠지만, 구체미술은 매우 한정된 범위에서이기는 하지만 추상미술을 대치하려는 의미로 쓰여왔다. 이 명칭을 제안한 사람은, 네덜란드의 반 되스버그로서, 그는 1930년 "한 가닥의 선, 한의 색채, 하나의 면 이상으로 구체적인 것이 있을까. 촵촵촵여자, 나무, 소 등 은 자연의 존재로서는 분명히 구체적이지만, 회화적 존재로서는 면이나 선보다 훨씬 추상적 이고 관념적인 막연한 환영인 것이다."라고 말하고, 추상미술, 추상회화 대신 구체미술, 구체 회화의 명칭을 제안하였다. 그후 아르프나 칸딘스키도 한때 같은 생각을 표명했지만, 일반적 인 명칭으로 보급되지는 못했다.

국제적 고딕양식 (International Githic Style)

1375년과 1425년 사이 서유럽 전역에 퍼진 미술양식을 나타내는 미술사 용어 1892년 루이 쿠라조드가 최초로 분류. 회화를 중심으로 모자이크, 타피스트리, 에나멜, 스테인드 글래스 등에서 곤통적인 특징을 볼 수 있다. 주된 특징은 양식화된 유연한 곡선 형식으로, 인위적이 고 목퇐가적인 분위기에 세속적인 상류사회에 대한 관심이 두드러지게 표현된 것이다. 13세 기 중반 프랑스에서 일어난 궁정양식에서 그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국제 고딕 양식의 첫 단계는 지오토와 두치오의 이탈리아 자연주의에 프랑스 시몬느 마르티니의 우아함을 혼합시 키고 후기 로마 회화의 고대 양식을 가미시킨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제앙 퓌셀이 아라베스 크선의 운동감과 우아함으로 프랑스 양식퀮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고 프랑스-플랑드르 예 술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1400년 네덜란드 예술가들은 플랑드르의 사실주의적 취향과 예리 한 관찰력이 새로운 이탈리아 자연주의와 교류를 이루게 하였다. 국제적 고딕은 프랑스의 귀족적인 궁정양식을 바탕으로 프랑스와 부르고뉴(프랑스의 동남부 지방, 본래는 영국) 벌간디의 세계적인 궁정 양식으로 성숙하였다. 그것은 남부 스페인과 제 노아, 나폴리, 베니스를 상업적으로 강력하게 연결하여, 프랑스에서 쇠퇴한지 오랜 후인 15 세기 초까지도 계속 번성하였다.

굽타왕조 미술 Gupta Art

굽타 왕조는 320년 인도의 동부 마가다 지방에서 일어났으며, 그후 영주가 계속하여 통치함 으로써 인도 북반부 대부분을 통일, 대제국을 건설했다. 수도는 파달리푸트라이며, 인도 고전문화 최성기의 문물을 이룩하엿으나, 5세기 후반에 야만 적인 외족의 침입을 받아 쇠퇴하였다. 6세기 초 굽타 왕조는 마가다 지방에 근거한 소왕조 로 세력이 약화되었으며, 6세기 중기에 멸망하였고 동시에 각지에는 군웅이 할거하게 되었 다. 7세기 초에 하르샤가 카나우디를 수도로 하여 재차 북인도를 통일하였으나 40년 간의 통치 가 끝나자 이것도 분열되어 다시 할거의 형세가 되었다. 인도 미술사상의 굽타 시대라 함은 대체로 이 두제국을 포함한 약 300년 간을 가리킨다. 이 시대 미술은 굽타 제국의 흥성과 고전문화의 전개. 확산을 배경으로, 5~6세기를 전후하여 새로운 예술 이념과 세련된 기법에 의한 최성기의 수준을 이룬다. 불교 미술은 마투라와 사 르나트가 불상 제작의 중심지로서 지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특히 불상에 있어서 원만하고 단엄(端嚴)한 인도적 고전양식을 완성시킨 외에, 굽타 문화권 의 지방에서 석굴사원이 제2의 전성기를 이루었고 더욱이, 아잔타 석굴에 귀중한 벽화를 남 겼다. 지금까지 조형미술에 관심이 희박했던 힌두교가 점차로 신상이나 석굴을 제작하기 시 작한 것도 이 시대부터이며, 그 유적은 우다이기리, 데오가루 등에 있다. 그리하여 이들은 다음의 중세 전기에 있을 성황기를 준비하였다.

권영우 (1926~) 함경남도 이원 에서 태어났다. 서울미대를 졸업. 동양화가이면서 전통양식의 틀을 벗어나 새로운 추상회화를 시도. '붓' 버리는 작업으로 일관, 독창적인 예술세계를 펼치고 있다. 78년에 프랑스에 건너가 10년 정도 체류하였다.

균형(均衡) balance(영)

균제(均齊). 조건과 성격이 다른 대조적인 것들 사이에 안정된 통일 감이 요구되는데, 그것 이 밸런스 즉 균형이다. 원래 저울의 일종인 천칭이란 뜻에서 나온 말로, 물체가 수직축(垂 直軸)을 둘러싼 시메트리 즉 좌우대칭으로 배치되어 생기는 중력적(重力的)인 균형을 말한 다. 넓은 뜻으로는 각종의 대조물, 직선과 곡선, 수직선과 수평선, 명부(明部)와 암부(暗部), 난색 과 한색, 혹은 같은 분량으로 대립하는 동질물(同質物) 따위가 서로 힘을 보충하여, 긴장된 안정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이다. 결국 조화와 역학적 안정이 포함된 물질적 여러 단위의 공간적 배치라 할 수 있다. 조화를 유지하는 아름다움은 정적(精的)이고 온화한 미적 효과를 지니지만, 그것만으로는 단조로워 서 변화가 결핍된다. 이것을 깨는 동적(動的)인 효과로서 콘스트라 즉 대조. 대비가 구해진다. 그 동적인 효과의 대조가 모순되지 않는 것이 또한 조화이다. 미학의 근본 과제인 '다양의 통일', '변화의 조 화' 는 끊임없이 예술에 요구되는 것이다

그라타주

마찰 또는 긁어지우기 등을 슃하는 말로, 먼저 색을 두껍게 칠한 다음, 그 면을 긁어서 캘리 그래피한 처리를 하는 기법. 색의 두께의 변화에 따라서 색촵빛촵그림자 등의 미묘한 시각 적 효과를 얻을 수 있다.

그래픽 디자인 graphic design(영)

다량의 인쇄. 복제를 수단으로 하는 디자인의 한 분야. 구미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일본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장식미술 또는 상업미술이라는 용어로 널리 사용되었다. 그래픽은 '쓰다'라는 의미의 그리스어 graphikos에서 유래했다. 석판, 동판, 실크 스크린 등의 예술적 표현을 그래픽 아트라고 부르며, 툴르즈 로트렉이 만 든 포스터가 20세기 초까지 주로 석판으로 인쇄되었던 것에서 전화(轉化)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래픽 디자인의 활동 내용은 다양하다. 기업과 결합한 시각적 PR활동을 상업 디 자인이라고 부르며 그래픽 디자인은 이것과 중복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지도. 도로 표지 등 생활에 유익한 공공 디자인도 중요한 과제이다. 그리고 1950년대 이후에는 인쇄 이외의 영화, 텔레비젼과 같은 매스 미디어와 관계하여 그 영역이 급속도로 확대됨과 동시에 시각 정보를 중심으로 한 '시각 디자인 visual design' 이라고 하는 보다 넓은 개념이 만들어졌다

그래픽 디자인(graphic design)

다량의 인쇄촵복제를 수단으로 하는 디자인의 한 분야. 구미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일본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장식미술 또는 상업미술이라는 용어로 널리 사용되었다. 그래픽은 '쓰다'라는 의미의 그리스어 'graphikos'에서 유래했다. 석판, 동판, 실크 스크린 등의 예술적 표현을 그래픽 아트라고 부르며, 툴르즈 로트렉이 만든 포스터가 20세기 초까 지 주로 석판으로 인쇄되었던 것에서 전화했다고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래픽 디자인의 활 동 내용은 다양하다. 기업과 결합한 시각적 PR활동을 상업 디자인이라고 부르며 그래픽 디 자인은 이것과 중복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지도촵도로 표지 등 생활에 유익한 공공 디 자인도 중요한 과제이다. 그리고 1950년대 이후에는 인쇄 이외의 영화, 텔레비젼과 같은 매 스 미디어와 관계하여 그 영역이 급속도로 확대됨과 동시에 시각 종보를 중심으로 한 '시각 디자인 (visual design)' 이라고 하는 보다 넓은 개념이 만들어졌다.

그랜드 매너(grand maner)

아카데미, 특히 레이놀즈(Reynolds)의 제3, 제4 담론에서 주장된 역사화의 숭고한 양식. 레 이놀즈는 "이탈리아의 구스토 그란데(Gusto Grande), 프랑스의 이상적인 미(beau ideal),영 국의 위대한 양식(great style), 천부적인 재능 및 취미는 단지 동일한 것에 대한 서로 다른 명칭일 뿐이다" 라고 주장했다. 또한 역사화에서도 조화도 "장엄한 것과 화려한 것 혹은 장 식적인 것의 두 가지 구별되는 특징이 있다."고 한다. 양식의 다른 범주들과 마찬가지로 이 러한 구분은 수사학의 고전적인 편람으로 거슬러 올라가, 숭고한 것, 우아한 것, 평범한 것, 힘찬 양식으로 구분된다. 그러한 범주들은 17세기 이탈리아에서 최초로 회화에 적용되었다. 회화에서 그랜드 매너는 특이성을 무시하고 일반성을 강조한다. 따라서 이를 위해 화가는 추상 속에서도 본질을 생각해야하고, 어떤 형상 속에서도 그 종의 특성을 표현해야만 한다. 또한 이 양식은 저속한 거소가 일상적인 것에 대해서도 관심을 표명하지 않고, 저속한 생활 이 배제된 영웅적이고 귀족적인 것에 대한 선호도 역시 거부한다. 네덜란드 정물화와 소박 한 장르에 대한 경시는 이러한 그랜드 매너 태도가 반영된 것이다.

그레코 (El Greco,1541?~1614)

에스파냐의 화가. 크레타 섬 칸디아에서 태어났다. 원래는 그리스 사람으로 본명은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폴로스인데, 그리스 사람이라는 뜻의 그레코로 불린다. 베네치아에서티치아노의 지도를 받고, 틴토레토와 미켈란젤로의 영향을 받았다. 정확한 자연 묘사와베네치아풍의 색채법을 사용하여 황금조가아닌 흑회색이 눈에 띈다. 깊은 명암과 색채,비정상적인 길쭉한 인체 묘사로 에스파냐의신비주의를 대표한다. 19세기 이후 진가가인정되어 세잔을 비롯한 많은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주요 작품으로는 〈오루가스백작의 매장〉 〈그리스도의 세례〉 등이 있다.

그로테스크(grotesque)

장식예술을 지칭하는 술어로 때로는 아라베스크라고 칭해지기도 하지만 그로테스크와 아라 베스크는 완전히 일치되는 술어는 아니다. 본래 이탈리아 어로 그로테스코는 보통의 미술에 는 어울리지 않는 장소를 장식하기 위한 색다른 의장을 가리키는 것으로써 오늘날 흔히 쓰 이고 있는 '괴이한 것, 극히 부자연스러운 것' 등을 형용하는 의미와는 무관계한 말이었다. 15세기 후반에 고대 로마의 폐허 특히 지하에 파묻힌 그로타(grotta: 동굴형 천정) 등에서 덩굴 식물의 아라베스크에 기이한 인물상, 공상적인 생물, 과일, 꽃, 촛대 등을 복잡하게 결 합시킨 장식문양이 발견된 이래 그 괴이함이 사람들의 흥미를 끌어 그로테스키(grotteschi) 라는 일종의 괴기취미의 커다란 유행을 낳았다. 회화에서는 라파엘로가 이러한 모티브를 최 초로 사용한 이래 핀투리키오의 바티칸의 장식 무늬나 루이16세 시대의 고대 취미 등이 이 이름으로 불려지면서 널리 예술 일반에도 쓰여오고 있다. 그 후 그로테스크란 말은 다른 예 술 분야에서 본래의 의미에서 전용되어 일반적으로 예술에 나타난 괴기한 아름다움, 이형성, 황당무계한 형상, 자연질서에 대립되는 것 등을 가리키는 용어가 되었다.

그로테스크 grotesque(영, 불)

장식예술을 지칭하는 술어로 때로는 아라베스크라고 칭해지기도 하지만 그로테스크와 아라 베스크는 완전히 일치되는 술어는 아니다. 본래 이탈리아 어로 그로테스코 grotesco는 보통의 미술에는 어울리지 않는 장소를 장식하 기 위한 색다른 의장(意匠)을 가리키는 것으로써 오늘날 흔히 쓰이고 있는 '괴이한 것, 극히 부자연스러운 것, 흉측하고 우스꽝스러운 것' 등을 형용하는 의미와는 무관한 말이었다. 15세기 후반에 고대 로마의 폐허 특히 지하에 파묻힌 그로타grotta(동굴형 천장) 등에서 덩 굴 식물의 아라베스크에 괴이한 인물상, 공상적인 생물, 과일, 꽃, 촛대 등을 복잡하게 결합 시킨 장식 문양이 발견된 이래 그 괴이함이 사람들의 흥미를 끌어 그로테스키라는 일종의 괴기 취미의 커다란 유행을 낳았다. 회화에서는 라파엘로가 이러한 모티브를 최초로 사용한 이래 핀투리오의 바티칸의 장식 무 늬나 루이 16세 대의 고대 취미 등이 이 이름으로 불려지면서 널리 예술 일반에도 쓰여오고 있다. 그 후 그로테스크란 말은다른 예술 분야에서 본래의 의미에서 전용되어 일반적으로 예술에 나타난 괴기한 아름다움, 이형성(異形性), 황당 무계한 형상, 자연질서에 대립되는 것 등을 가리키는 용어가 되었다.

그뢰즈 (Jean Baptiste Greuze,1725~1805)

프랑스의 화가. 부르고뉴 지방 투르뉴에서태어났다. 보통 사람들의 생활을 묘사하는데 힘썼으나 시대의 감미로운 풍조를 받아들인 결과 통속화 가 되고 말았다. 이를테면,〈젖을 짜는 처녀〉에서는 소박한 시골 처녀의 모습을 귀족풍의 옷에다가 로코코 풍으로,유려하고 호화롭게 그렸다. 그러나 의상을묘사하는 솜씨는 매우 뛰어나서, 실크나 레이스 등의 섬세한 질감을 교묘히 표현하였다. 이러한 표현은 당시의 궁정파 화가와 상대되는 대중적인 생활 화가로서의 위치를 굳히게 하 였다. 그 밖의 작품으로는 〈시골 색시〉 〈어린이들이 간호하는 중풍 환자〉〈부서진 주전자〉 등이 있다.

그뤼네발트 (Matthias Grunewald,1472~1528)

독일의 화가. 표현주의의 선구자. 뷔르츠부르크에서 태어났다. 1508년 이후 마인츠 대주교였던 알브레히트 폰 브란덴부르크의 궁정화가가 되었으나, 나중 에 농민 전쟁에 가담하였다가, 1528년 할레에서 죽었다. 남아 있는 작품 수는 적으나 종교적인 정열이 넘치는 대표작 〈이젠하임 제단화〉 하나만 가지고서도 충분히 그의 신비주의를 살펴볼 수가있다. 이 작품은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성당 벽화〉와 견줄 수 있는 작품이며, 또한엄격한 조형 이 비참함과 전율 속에서도 인간성을 잃지 않는 신앙 고백으로 묘사되어 있는 점 등은 게르 만적 정신의 표현이다.

그리(Juan Gris)-(1887~1927)

입체파의 다시점을 하나의 화면에 종합함으로써 사라진 형태를 다시 인지할 수 있는 형태로 바꾸어 표현하였다. 스페인의 마드리드 태생인 화가 호세 곤잘레스의 널리 알려진 예명이다. 그가 스페인 출신 의 선배 피카소를 흠모하여 파리로 간 것은 1906년의 일이었다. 그는 피카소와 브라크의 입체주의를 진지하게 연구하였고, 1912년과 14년 무렵 이후의 종합 적 입체주의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게 된 인물이다. 그리는 본래가 지극히 이지적인 정신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화면을 엄격하게 구성하는 입 체주의의 미학은 그의 본성에 잘 부합하게 된다. "세잔은 병을 원통으로 환원시켰다. 나는 원통에서 병을 만든다."라고 한 그의 말은 그의 작 품의 기하학적 성격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그는 방의 벽면이나 천장도, 의자나 테이블도, 그리고 그 밖의 어떠한 대상도 인간의 생활 과 어떠한 관계를 갖는 실용적인 존재로서가 아니라, 오로지 순수한 조형적 형태로서만 의 미를 부여하려고 하였다. 제목이 [의자 위의 정물](1917)로 되어 있는 이 작품에서도 우리는 직선과 곡선과 색면에 의 한 순수한 조형적 구성만을 보게 된다. 그리가 취했던 종합적인 태도는 그의 수학적 드로잉에 기초를 두었다. 자, 삼각자, 측정기와 같은 기하학 제도기 수에 의한 것이나 일관된 수학적, 원근법적 체계 에 따르지 않은 그의 드로잉은 큐비즘 회화의 절차를 체계화하려는 욕구에서 나오게 된다. 큐비즘의 원리들을 이 운동에 연류된 많은 예술가들에게 전도하는데 이상적인 인물로서 짧 은기간에 유럽 예술에 중요한 영향력을 미친 사람들 중의 한사람이다. 주요 작품 : 세면대, 세레의 풍경 등

그리드(grid) 1960년대 초 전반적으로 추상적이고 비관계적인 예술을 하는 화가와 조각가들이 선택하였던 어떤 중성적인 구조, 혹은 도구. 솔레 위트(Sol Le Witt)는 "그리드는 편리한 것이다. 그것은 모두를 균등하게 취급함으로써 크기를 안정시키고, 공간을 중성화한다."고 하였다. 그리드는 1960∼70년대에 미국과 영구 추상미술에서 가장 많이 이용되는 상투적인 표현이 되었다. 루 시 리파드는 "그리드는 전체를 형성하는 임의적인 구조물이고, 선택을 용이하게 하는 자기 구석적인 도구이며… 마음의 상태, 색채 사상을 표현하는 악보이다. 그것은 캔버스 자체의 전통적인 형태를 되풀이한다. 그것은 논리, 조화, 통일성을 의미한다"고 했다. 그리드 도안을 이용하였던 미국화가들에게는 재스퍼 존스 (Jasper Johns), 애드 라인하트(Ad Reinhardt), 솔레 위트(Sol Le Witt), 윌 인스레이(Will Insley), 에바 헤세(Eva Hesse), 래리 푼즈(Larry Poons), 아그네스 마틴(Agnes Martin) 등이 있다.

그리사이유

회색 및 회색및의 색채로만 이루어진 단색화. 때로는 단색 밑그림에도 사용된다. 특히 르네 상스 시대의 화가들이 모델링 효과를 나타내기 위해 많이 사용하였고 경우에 따라 조각을 모방하는 데 사용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파두아(Padua)의 아레나 성당(A-rena Chapel)에 있는 지오토(Giotto)의 연작 <덕과 악>은 회색 돌을 연상시키고, 반 아이크(Van Eyck)의 < 양의 찬미>에서 두 사람의 성 요한은 마치 조상같다. 만테냐(Mantegna)는 로마 인들의 엄 격한 기질을 표현하기 위해 그리사이유를 이용하였다. 한편 루벤스(Rubens)와 그의 화파들 도 때로 조각가들을 위한 구성 스케치에서 단색화의 기법을 이용하였다. 또한 그리사이유는 스테인드 글라스 화에서도 효과적으로 이용되었다. 에나멜 제품 그리사이유는 불투명한 희 바탕위에 단색으로 그림을 그림으로써, 빛과 그림자 등의 무늬를 나타낸다.

그리스 미술

그리스 미술은 아테네 지역을 중심으로 기원전 8세기경부터 로마의 지배 를 받기 전인 2세기경까지 번창한 지중해 중심 미술이다. 희랍 문명의 뿌리가 되는 고대 문명으로는 그리스 본토의 크레타 문명과 미케네 문명을 들 수가 있으며, 5000년의 찬란한 문화를 자랑하는 이집트를 꼽을 수있다. 이중 크레타와 미케네 문명을 고대 그리스 미술의 선조로 보는 이유는 이 두 지역의 문화가 그리스 미술의 시작인 기하학적 양식기의 특징을 선험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집트 미술은 그리스 건축, 조각, 회화 양식에 기틀을 잡아 주는 역할을 하였다.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철학과 수학의 발달을 중심으로 문학, 음악, 연극, 건축 등 문화 전 반에 걸쳐 서양 문명사에 눈부신 업적을 이룩하였다. 그리스인들은 균형, 비례, 조화의 세 요소를 예술의 기본 요소로 삼고 미술 양식에 엄격히 적용하였다. 그 결과 그리스 예술 작품은 '이상미'의 극치를 이루어 냈다. 그리스 미술은 크게 네 시기로 구분하는데, 기하학적 시기(The Geometric Art :기원 전 1100년-800년), 아르카익기(The Archaic Art :기원전800년=-500년), 고전기(The Classical Art :기원전 500년-338년), 헬레니즘기(The Hellenistic Art :기원전 337년-146 년)이다. 그리스 미술 역사의 시작인 기하학적 양식의 시기에는 아직 건축과 조각 분야가 제대로 형 성되지 못한 채 주변 고대 문명들의 영향하에서 기하학적 무늬로 장식한 제사용 도기들이 많이 제작되었다. 이들 도기화는 디필론 양식이라고도 불리는데, 제의 장면을 표현한 기하학적이고 단순화된 문양들이 항아리의 겉면에 가득 채워져 있다. 두 번째 시기인 아르카익기는 기하학 시기의 장식용 소품의 조각 공예 수준에서 벗어나 인 체 크기의 등신대 조각상이 제작되기 시작한다. 남자 누드입상인 코우로스(Kouros)와 여자 입상인 코레(Kore)라고 부르는 이 조각들은 이집 트, 앗시리아의 조각 양식을 답습하는데서 출발한다.즉 정면 성의 고수 남녀 인물상에서 나 타나는 장식 기법들이 고대 이집트 조각상 들에서 발견되는 것들과 흡사하다. 또한 이 시기부터 적색화, 흑색화의 도기화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아르카익기의 건축은 이 시대의 마지막 시기인 기원전 500년대에 신전 건축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세 번째 시기인 고전기는 그리스 미술의 절정기로 일컬어지고 있다. 이때는 또한 아테네의 민주주의가 절정기를 맞이하여 문화 전반의 눈부신 발전이 이루어진 시기이다. 클래식 시기는 대체로 전기와 후기로 나뉘며, 특히 조각에서 신체의 이상미를 완성하는 시 기이기도 하다. 또한 건축 분야에서는 말기에 신전 이외의 극장 건축이 확립되면서 아테네 시민사회의 발달 을 예증하기도 한다. 기원전 146년 로마의 그리스 장악 이전까지의 시대를 헬레니즘기로 구분한다. 기원전 336년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 원정에 따른 간다라 미술의 발생과 때를 같이하고 있는 헬레니즘기의 미술은 귀족화, 대중화되면서 고전기 때의 엄격한 캐논(규범)양식에서 벗어나 인간 감정의 표현에 충실한 양식이 나타난다. 그리스 회화는 주로 항아리와 병의 겉면에 장식된 것이 대부분인데, 당시에는 벽화도 많이 그려졌으나, 퇴색되거나 파괴되어 지금은 거의 발견할 수 없다. 이 결과 그리스 회화의 변천 은 항아리와 병의 겉면 부분에 그려진 도기화로 추정해 볼 수있다. 이집트인들의 인식적 시각 기법은 그리스 회화에 바탕을 제공해 주었다. 그러나 희랍 화가들은 여기에 단축법, 즉 관찰에 의한 사물 형태의 사실적 효과를 노린 축 소와 확대 기법을 통해 나름대로의 변화와 반전을 추구해 나갔다. 도기화에 그려진 그림들은 다양한 문양과 실제 사건의 기록, 신화 이야기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이들 정경들은 화면 안에서 자연스러운 공간감, 즉 삼차원의 세계를 표현해 내어 평면적이 면서 설명적인 이집트 회화 양식 에서 한 걸음 더 현실화된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그리스 미술' 이라고 하면 떠올리게 되는 것이 고전기 시대의 남, 녀 누 드 조각상일 만큼 희랍 미술의 가장 눈부신 업적은 조각에서 찾을 수있다. 그들이 추구한 미의 삼요소, 즉 비례, 균형, 조화를 완벽에 가깝게 이룩한 분야가 조각인데, 그리스 인들은 인체 표현에 있어서 해부학적 사실주의의 완성을 넘어선 인체의 이상적 형태 를 탄생시켰다. 희랍인들은 천상의 신에 가까운 이상화된 인간상을 꿈꾸었고, 이것은 신화 속의 여러 개성 있는 신들로 표현되어 인간 한계를 뛰어넘은 '이상성'의 정형 을 추구하였다. 이런 그들의 열망은 함께 발전한 과학과 철학에 힘입어 조각상에서 완성된다 아르카익기에는 이집트 조각의 정적이고 견고한 특징을 그대로 이어 받아 다소 딱딱한 자세 를 잡고 있으나 또한 이집트 조각에서는 볼 수 없었던 따스한 인간적 미소 (아르카익 스마 일)가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인체조각의 위대한 역사를 시작한다. 이어 조각술의 꾸준한 발전을 거쳐 고전기 시대에 제작된 조각들은 황금비율의 8등신의 모 습으로, 안정감 있고 생명감 넘치는 또 하나의 신으로 창조되면서 절제된 감정이입과 정확 한 인체 묘사로 돌 덩어리 안에 생명감을 불어넣었다. 이런 아카데믹한 정형은 헬레니즘 기에 가면서 감정의 자유로운 표출과 강렬한 움직임 등의 특징을 보여 일종의 매너리즘의 양태를 보인다. 그리스 건축은 조각과 마찬가지로 안정된 구도 속에 화려하고 장엄한 장식으로 균형 잡힌 우아함을 추구하였다. 신전 건축으로 시작되는 그리스 건축은 그 원형을 메가론 (Megaron) 양식이라 불리는 미케네 시대의 주거 양식에서 빌어 온 단순 형태에서 시작하 여 도리아 양 식(Doric order) , 이오니아 양식(Ionic order), 코린트 양식(Corinthian order) 등의 다양한 건축술로 발전하게 된다. 그리스 신전은 신상을 안치하고, 여기에 봉납된 보물 등을 저장하기 위한 장소로 지어졌으 며, 재료는 목재에서 점토, 벽돌에 이어 석조와 목조의 혼합 형식을 거친 후 아르카익 후기 에 와서 대리석의 순수한 석조 건물이 건립 된다. 이외 극장(theatre)건축 또한 주목할 만한데, 주신(酒神) 디오니소스에게 바치는 제의, 가무 를 군중이 모여 관람하고 제사를 지내기 위한 장소로서 이용되었다. 이 극장의 건축양식은 현재의 각종 행사장 건축양식에 그대로 쓰일 정도로 그 유용성이 뛰어나다.

그비르그비니

서 아시아, 중앙 아시아, 동 아시아에 분포되어 있으며, 특히 소련 그루지아의 전통적인 건 축에 보이는 방형 천정 형식. 둥근나무 또는 각재를 사각형 혹은 다각형으로 각 층마다 각 각 내각에 건너지르게 놓아, 위로갈수록 점차 작아지게끔 쌓아 올린 일종의 둥근 천정. 꼭대 기에는 채광과 연기를 뽑아 내기 위한 구멍이 있다. 이와 같은 천정이 있는 주거를 다르바 지(darbazi)라고 하며, 중국에는 한 대에 이미 격천정의 장식문양으로서 고구려 시대의 고분 벽화 및 돈황석굴에 많이 보이며, 청 대의 목구조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같은 모양의 주거 는 아르메니아 혹은 이란의 아제르바이잔의 산지에도 있으며 각각 글루하툰(glkhatun), 카라 담(Karadam)이라고 한다.

극사실주의(Hyperrealism)

1960년대 후반 미국에서 일어난 새로운 경향의 회화와 조각, 같은 시기에 독일을 비롯한 유 럽 각지에서 시도된 비슷한 경향의 미술을 포함시키기도 한다. 슈퍼리얼리즘, 포토 리얼리 즘, 래디컬 리얼리즘, 마이뉴트 리얼리즘, 스튜디오 리얼리즘, 샤프 포커스 리얼리즘 등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리기도 하며, 주로 일상적인 현실을 극히 생생하고 완벽하게 묘사하는 것 을 특징으로 한다. 주관을 적극 배격하고 어디까지나 중립적 입장에서 사진과 같이 극명한 화면을 구성하는데, 주로 의미없는 장소, 친구, 가족 등이 대상으로 취급된다. 경우에 따라서 는 캔버스에 감광제를 발라 사진을 직접 프린트한 작품도 있다. 사진기의 눈이 포착한 영상 은 사실인 것이 확실하지만 그것도 결국 실물로부터 떨어져서 자립한 일종의 허구일 따름이 다. 물론 이러한 허구에 의해 포위된 일상이 존재하며 이러한 허구는 새로운 현실일 수 있 다. 극사실주의는 본질적으로 미국적인 사실주의로, 특히 팝 아트의 강력한 영향 아래서 일 어난 것이다. 따라서 팝 아트처럼 평상의 생활 즉 우리의 눈앞에 늘 있는 지눕한 이미지의 세계를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팝 아트와는 달리 그것은 극히 억제된 것으로써 아무런 코멘 트도 없이 다만 그 세계를 현상 그대로 다룰 뿐이다. 그러나 감정을 배제한 채 기계적으로 확대한 화면의 효과는 매우 충격적이다. 우리가 육안으로는 식별할 수 없었던 추악함 - 모 발에 가려진 점이라든가 미세한 흉터까지도 그대로 클로즈업되어, 보통이라면 지나쳐 버릴 수도 있는 사실성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잔혹한 인상을 받게 만든다. 극사실주의는 미국 적 즉물주의의 발상, 또는 미니멀 아트의 몰개성주의와 서로 통한다고 볼 수 있지만, 한편으 로는 종래의 추상미술로부터의 완전한 이탈이라는 의미와 사진 그 자체와 양쪽에 대한 아이 러니의 표현이라고도 볼 수 있다. 작가들은 팝 아트의 작가들보다 대체로 한세대쯤 젊은데 작품 제작에 사진이나 슬라이드를 직접 간접으로 이용하는 척 클로즈, 하워드 캐노비츠, 맬 컴 몰리 등과 사진을 이용하지 않고, 직접 자연의 풍경이나 모델만을 대상으로 하는 필립 폴스타인, 시드니 틸림 등의 두 계열로 나뉘어 진다. 극사실주의가 조각에 적용될 때는 삼차 원이라고 하는 조각의 기본 요건에 따라 한층 실물에 가까워진다. 듀안 핸슨과 존 드 안드 레아의 작품은 한치의 헛갈림도 없는 충격적인 실물을 제시하는 것이 주목적이다. 극사실주의 (極寫實主義) Hyperrealism(영) -------------------------------------------------------------------------- ------ 1960년대 후반 미국에서 일어난 새로운 경향의 회화와 조각. 같은 시기에 독일을 비롯한 유 럽 각지에서 시도된 비슷한 경향의 미술을 포함시키기도 한다. 슈퍼리얼리즘, 포토리얼리즘, 래디컬 리얼리즘, 마이뉴트 리얼리즘 등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리기도 하며, 주로 일상적인 현실을 극히 생생하고 완벽하게 묘사하는 특징으로 한다. 주 관을 적극 배격하고 어디까지나 중립적인 입장에서 사진과 같이 극명한 화면을 구성하는데, 주로 의미없는 장소, 친구, 가족 등이 대상으로 취급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캔버스에 감광제(感光劑)를 발라 사진을 직접 프린트한 작품도 있다. 사진 기의 눈이 포착한 영상은 사실인 것이 확실하지만 그것도 결국 실물로부터 떨어져서 자립한 일종의 허구일 따름이다. 물론 이러한 허구에 의해 포위된 일상이 존재하며 이러한 허구는 새로운 현실일 수 있다. 극사실주의는 본질적으로 미국적인 사실주의로, 특히 팝 아트의 강력한 영향 아래서 일어난 것이다. 따라서 팝 아트처럼 평상의 생활 즉 우리의 눈앞에 늘 있는 진부한 이미지의 세계 를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팝 아트와는 달리 그것은 극히 억제된 것으로써 아무런 코멘트도 없이 다만 그 세계를 현상 그대로 다룰 뿐이다. 그러나 감정을 배제한 채 기계적으로 확대한 화면의 효과는 매우 충격적이다. 우리가 육안 으로는 식별할 수 없었던 추악함-모발에 가려진 점이라든가 미세한 흉터까지도 그대로 클 로즈업되어, 보통 이라면 지나쳐 버릴 수도 있는 사실성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잔혹한 인 상을 받게 만든다. 극사실주의는 미국적 즉물주의(卽物主義)의발상, 또는 미니멀 아트의 몰 개성주의와 서로 통한다고 볼 수 있다. 작가들은 팝 아트의 작가들 보다 대체로 한 세대쯤 젊은데 작품 제작에 사진이나 슬라이드 를 직접 간접으로 이용하는 척 클로즈, 하워드 캐비노츠, 맬컴 몰리 등과 사진을 이용하지 않고, 직접 자연의 풍경이나 모델만을 대상으로 하는 필립 펄스타인, 시드니 틸림 등의 두 계열로 나뉘어진다. 극사실주의가 조각에 적용될 때는 삼차원이라고 하는 조각의 기본 요건 에 따라 한층 실물에 가까워진다. 듀안 핸슨과 존 드 안드레아의 작품은 한 치의 헛갈림도 없는 충격적인 실물을 제시하는 것이 주목적이다.

근대미술(Modern Art)

미술사에서 근대는 근세와 구별되나, 이 구분에 대해서는 사람에 따라 그 견해가 다르다. 역 사적 의미에서 르네상스 이후를 가리키는 경우도 있으나, 보통은 인상주의로부터 비롯되어 20세기 전반에 나타나 여러 가지 분극적, 전문적 발전을 이룩한 미술 사조를 가리키고 있다. 자연을 모티브로 해서 사상의 전달방법이 근대성을 띠어가는 인상주의를 출발점으로 보는 사람도 있고, 또 세잔느의 조형사상의 혁명을 근대성의 창시점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이와 같이 그 구분에 대해서는 명료하지 않지만, 모던 아트의 모던은 역사적 시기로서의 근대라 기보다도 입체파를 거쳐 전개되는 조형 감각이 표출하는 '현대(contemporary)'를 의미하며 주로 아방가르드를 지칭하는 경우가 많다. 말하자면 사물의 단순한 재현을 배격하고 개성적 감각에 기초를 둔 독특한 조형적 형식을 지닌 작품 전반을 근대 미술이라고 볼 수 있는데, 통상 추상미술, 초현실주의, 농피규라티브 등이 포함된다. 시각적 세계에 대한 미술의 진로 는 금세기 추상미술로 향했던 것인데, 거기에는 두 갈래의 흐름이 있었다. 모두 인상주의를 원천으로 하고 있으나 한쪽은 세잔느의 이론에서 출발하여 입체파에 이르기까지 차례로 그 영역이 확대되었다.이 흐름은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해서 러시아, 독일, 네덜란드에서 기하 학적 및 구성적 운동을 전개하면서 세계 각지로 확대되었던 것이다. 이 계통은 그 엄격함에 있어서 이지적·구성적·건축적·기하학적이며 논리학에 가까운 것들이었다. 또 하나의 흐 름은 고갱과 그 주변의 예술 이론에 의해 시작된 것으로, 야수파를 통해 제1차 세계대전 전 의 칸딘스키의 추상표현주의로 발전되었고, 그 후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 초현실주의의 예술 속에 재현되었다. 전자에 비해 후자는 기하학적 형태보다는 유기적 형태를 취하고 이지적이 라기 보다는 직감적·감동적이고, 곡선적이라 할 수 있다. 상상적이라는 점에 있어서도 전자 가 고전적이었던 데 대해서 후자는 오히려 낭만적이었다. 물론 이 두 계통을 혼합해서 표현 한 것도 있으나, 기하학적인 방향은 몬드리안 및구성주의의 페브스너, 나움가보 그리고 비기 학적인 작업은 화가 미로 빛 조각가 아르프에 의해서 계속 추구되어 왔다. 이 사이에서 입 체파, 표현주의, 오르피슴, 신조형주의, 구성주의, 다다이즘, 미래주의, 초현실주의,추상표현주 의 등 모든 유파가 서로 영향을 끼치면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이들은 모두 일반적인 회화 관념이었던 대상의 사실적 묘사에서 떠나 실재를 초상화하는 태도에서 기인한 것으로 과거 의 미학에 의한 예술관, 즉 감정이입 미학으로서는 설명하기 어려운 또다른 미의 장르를 형 성하고 있다. 19세기에는 예술의 형성을 완성하는 방향으로 매진했던데 반해서 근대 미술은 근대적 시각을 형성하여 과거의 전통을 타파하고 전통적 예술 형성의 파기를 목표로 했다. 이는 근대 사회의 소산인 기계 문명의 영향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근대 미술은 조형적 구 성과 근대적 감각을 특징으로 하며 동시에 시적인 환상도 포함된다. 따라서 선·면·색은 그 자체가 중요한 구실을 하며, 단편적 환상이나 상념 또는 기억 등도 새로운 내용이 되고 있다. 여기에는 20세기의 잡다한 인간 감정이 드러나고 있으며, 사회적 배경이 반영된 정신 적 불안이나 회의 및 부정이 뒤섞인 표현들도 나타나 있다.

근본회화(fundamental painting)

1960년 경부터 구미 지역 작가들이 제작한 추상미술을 설명하기 위해 드 빌데((E. de Wilde)가 창안해 낸 용어. 제이크 베르토(Jake Berthot), 루이칸(Louis Cane), 알랜 사를통 (Alan Charlton), 로버트 맨골드(Robert Mangold), 브라이스 마든(Brice Marden), 아그네스 마틴(Agnes Martin), 에다 르누프(Eda Renouf), 제라르 리히터(Gerhard Richter), 로버트 라 이만(Robert Ryman) 등과 같은 유럽과 미국의 작가들이 여기에 포함된다. '근본회와'는 1975년 암스테르담 스테드리이크 미술관에서 있었던 전시회의 제목으로 사용됨으로써 대중 들의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근본회화는 드 빌데의 용어대로 '회화의 근원에 대한 반성'이기 때문에 자기 비판적 경향이 있다. 이러한 경향을 그린버그는 모더니즘의 본질이라고 밝혔지 만 그 과정과 재료의 문학적이고 물리적인 성격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근본회화는 삼차원적 오브제와 관련된 1960년대 전반의 미니멀 아트 이론에서 파생된 몇몇 개념들을 구체화한다. 그러나 회화의 본질적인 정의를 구한다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그것이 형식주의에서처럼 현 상의경험(색채,형태)에 있건, 근본주의에서처럼 회화의 물리적 조선(안료, 캔버스)에 있건 간 에, 회화의 '본질 구성 요소'는 없는 것이다. 이러한 '본질 구성 요소'들은 실제로 모두 회 화의 본질에 관한 이론들로, 이들은 회화의 가능성을 제한하고 있다는 점에서 구속적이다. 한편 근본회화에서 불건전한 점은 수단이 목적에 선행한다는 것이다. 세상을 향한 외면보다 는 내면쪽으로 시선이 향하기 때문에 회화의 가장 우선적인 조건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 간의 사회적인 관계에서의 중간적인 위치를 무시한 자기애적인 예술이 되기 쉽다. 근본회화 를 표현하기 위해 제안된 또다른 다양한 용어로는 자기 통찰적인 회화(introspective painting), 침묵 회화(silent painting), 새로운 회화(nouvelle peinture), 포스트 미니멀 회화, 후기 개념 회화, 순수 회화, 본질 회화(essential painting), 절대 회화 등이 있다.

글라스고우파(the glasgow School)

1850년대와 1860년댜에 영국의 글라스고우에서 결성된 화파. 당시 글라스고우는 유럽이나 미국과 많은 접촉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의 외광파 그림들이 널리 환영을 받고 있 었다. 이에 자극을 받은 화가들은 글라스고우 파라는 그룹을 결성하고 아카데믹한 재래의 인습에 반기를 들었다. 특히 그들 중에는 프랑스에서 수련을 쌓은 화가들이 많아, 정물화와 풍경화에 당시 가장 훌륭한 예술사조인 자연주의를 도입하여 활기를 띰으로써 그들의 명성 은 해외로까지 퍼졌다. 20명 이상의 이 협회 화가들 중 오늘날 가장 잘 알려진 사람은 카메 론, 조셉 크로홀, 호넬, 맥그리거, 윌튼 등이다. 이 그룹은 1900년 이전에 절정을 이루었고, 그들의 몇가지 특질들은 보다 젊은 화가들에게 전승돠었지만 1918년 이후 글라스고우의 몰 락과 함께 해체되었다.

글라시(graze)

본래의 뜻은, 도기에 유약을 칠하거나, 유리로 뒤덮는다는 따위의 뜻인데, 미술 용어로는 유 화물감의 투명한 효과를 살리기 위해 엷게 칠하는 묘법을 가리킨다. 밑그림이 마른 다음, 기 름으로 푼 투명 또는 반투명의 물감을 엷게 칠하고, 밑그림의 모델링이나 명암의 골격을 그 대로 , 또는 나아가 밑그림의 색조와 뒤섞어 화면에 풍부하고 깊이 있는 톤을 낳게하는 묘 법이다. 티치아노, 루벤스, 렘브란트 등의 화가가 즐겨 쓴 방법으로, 아마도 고전적 작품은 거의 다 이수법으로 그려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그 목적은, 화면에 윤기와 깊이 를 주고, 색조에 섬세한 변화를 주는데 있다. 투명한 유채에만 있는 독자적인 기법인 글라시 의 남용은 강하고 선명한 색채 효과를 노리는 근대 미술의 취향과는 거리가 멀지 모르지만, 또 동시에 글라시를 쓰지 않는 유화는 유채화에만 있는 귀중한 기법을 포기하고 있는 것 같 은 아쉬운 면이었다.

기계미술(machin art)

기계의 합리성, 기능성에서 생겨난 조향미를 중시하는 에술. 이 술어는 1934년 뉴욕 근대 미 술관에서 개최된 '기계미 전시회'를 계기로 보급되어 미술상의 한 장르를 이루게 되었다. 기 계는 본래 미적 표현을 의도하지 않고, 설계·제작된 것이지만, 그 독자적인 미를 지니고 있 다는 사실이 19세기 말경에 인정 되었으며, 여기에 디자이너나 건축가, 미술가들이 주목을 하면서부터 기계미는 근대 조형세계에 큰 자국을 주었다. 트떭 미래주의 , 구성주의, 순수주 의 등은 기계를 높이 찬양하고, 그 역동성, 질서, 합 목적성, 기능, 형태 등에 강한 관심을 보였었다. 20세기 초 "공학적 고찰의 세계에는 아무런 추한 것이 없다. 온갖 기계 기구는 건 축이나 공예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목적을 갖는 것이다. 참으로 그 진리에 바탕을 둔 감동적 인 형태는 새로운 미래의 아름다움을 감정적으로 기대하고 있던 사람들을 흥분케 하고 경탄 시켰다"고 말한 반 데 벨데를 비롯, 기계와 그 아름다움에 대해 많은 건축가들이 칭찬을 아 끼지 않았다. 또한 블라디미르 타틀린은 기술적 구조의 공간기능적인 여러 조건을 추상적인 모형으로 전개함으로써 기계미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해 주었다. 그 이후부터 기계 미술 은 미술에 실제적인 사회적 기능을 제공한다는 목적을 추구해 오고 있다. 이무튼 기계 미술 에 대한 초기의 견해는 그 형식미(formal beauty)에 있었는데, 차차 기능미(funtcional beauty)를 주목하기에 이르렀으며, 건축·공예상의 기능주의나 합리주의는 기계에 대하여 후자의 관점을 취하고 있다. 1968년 뉴욕 근대미술관에서는 회고적인 성격을 띤 전시회로 ' 기계-기계시대의 종말을 보여주는 전 (The Machine-as seen at the end of trhe mechanical)'이 다시 열렸었다. 기계미술(machin art) 기계의 합리성, 기능성에서 생겨난 조향미를 중시하는 에술. 이 술어는 1934년 뉴욕 근대 미 술관에서 개최된 '기계미 전시회'를 계기로 보급되어 미술상의 한 장르를 이루게 되었다. 기 계는 본래 미적 표현을 의도하지 않고, 설계·제작된 것이지만, 그 독자적인 미를 지니고 있 다는 사실이 19세기 말경에 인정 되었으며, 여기에 디자이너나 건축가, 미술가들이 주목을 하면서부터 기계미는 근대 조형세계에 큰 자국을 주었다. 트떭 미래주의 , 구성주의, 순수주 의 등은 기계를 높이 찬양하고, 그 역동성, 질서, 합 목적성, 기능, 형태 등에 강한 관심을 보였었다. 20세기 초 "공학적 고찰의 세계에는 아무런 추한 것이 없다. 온갖 기계 기구는 건 축이나 공예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목적을 갖는 것이다. 참으로 그 진리에 바탕을 둔 감동적 인 형태는 새로운 미래의 아름다움을 감정적으로 기대하고 있던 사람들을 흥분케 하고 경탄 시켰다"고 말한 반 데 벨데를 비롯, 기계와 그 아름다움에 대해 많은 건축가들이 칭찬을 아 끼지 않았다. 또한 블라디미르 타틀린은 기술적 구조의 공간기능적인 여러 조건을 추상적인 모형으로 전개함으로써 기계미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해 주었다. 그 이후부터 기계 미술 은 미술에 실제적인 사회적 기능을 제공한다는 목적을 추구해 오고 있다. 이무튼 기계 미술 에 대한 초기의 견해는 그 형식미(formal beauty)에 있었는데, 차차 기능미(funtcional beauty)를 주목하기에 이르렀으며, 건축·공예상의 기능주의나 합리주의는 기계에 대하여 후자의 관점을 취하고 있다. 1968년 뉴욕 근대미술관에서는 회고적인 성격을 띤 전시회로 ' 기계-기계시대의 종말을 보여주는 전 (The Machine-as seen at the end of trhe mechanical)'이 다시 열렸었다.

기교(技巧) technic(영), technique(불)

넓은 의미로는 인간이 일정한 필요, 목적 또는 관념을 위해 소재를 가공. 변형. 형성하는 활 동과 방법을 의미하며 기술과 거의 같은 뜻으로 쓰인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경작술(耕作術)이나 의술(醫術)과 마찬가지로 예술을 모방기술 (mimetikal techniai)이라고 하여 기술의 일종으로 보았다. 좁은 의미로는 예술 창작 및 재현 에 있어서 그 목적을 효과적으로 달성할 수 있도록 하는 소재와 도구에 대한 구체적 조작 (操作) 능력을 말한다. 예술적 형성에 있어서 기교는 뺄 수 없는 것이긴 하지만, 예술의 가치는 기교 그 자체로 만 으로는 달성되지 않는다. 기교만이 뛰어난 작품이나 기교만이 숙달된 작가가 경멸을 받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며 이런 작가들을 테크니시앙이라고 부른다.

기능주의(functionalism)

기능을 건축이나 디자인의 핵심 또는 지배적 요서로 하는 사고 방식을 가리킨다. 기능의 개 념은 19세기 후반에 진보적 건축가에 의해 도입되어, 근대 건축의 혁신적 발전에 큰 역할을 하였다. 기능 개념의 모태를 이루는 실용성 또는 합목적성의 개념은,19세기 초의 고전주의 건축가 싱켈 등의 사상에서 처음 대두되었고, 19세기 후반에 이르로 바그너, 메셀, 미국의 설리반 등에 의해 기능이 처음으로 적그적인 조형의 요소로서 다루어졌다. 이들에 이어지는 근대 건축가로서, 기능을 무시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제1차 세계대전 후의 표현주의 시대에 는 한샔 타우트, 멘델존을 비롯하요 신비적 낭만적인 색채를 띤 기능주의 건축을 시도한 사 람도 있었다. 핀스테롤린이 후자의 좋은 예를 보여주고 있는데, 그는 기능 개념의 본래의 출 처였던 생물학의 개념으로 돌아가, 유기적 자연형태를 건축에 끌어들였다. 헤링이나 새로운 등도 핀스테를린의 입장을 지지한 건축가였다. 모두 '표현이 아니라 기능을' 이란 신조를 디 자인의 원리로 삼아, 형태적으로는 곡선을 출발점으로 하여, 때로는 의의있는 작품을 완성했 다. 그러나 인체모방 또는 생물 기관의 모방에 빠져,(한정된 일시적 생명을 가지며, 존재하 는 장소에 관계없는, 생물과 같은) 유기적 곡선에의 편중, 극심한 개성화를 초래하였고, 또 이론적으로는 특정한 기능에 대해 유일적인 형태가 결정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을 강조했 었는데 이런 면에서 비판을 받았다.

기호

기호는 70년대 미술에서 주관적인 표시법으로서 특별힌 의미를 지니는데, 그것은 각 작가들 에게 매우 상이한 특성을 지닐 수 있다. 최근의 기초 미술에서는 관찰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신비적인 암호와 같은 형태를 사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를 테면 주변 공간과의 연관을 설정하고 미시공간과 거시공간 사이의 긴장관계 같은 것을 요구하는 팔레 르모의 색점은 설명하기는 어려우나 그 샔문에 더욱 강렬하게 체험할 수 있는 기호적 특성 을 지닌다. 펭크의 조형언어를 구축하고 있는 인간도 다른 종류의 기호를 나타낸다. 이른바 패턴 아트(Pattrern Art) 라는 기호들은 장식적인 문양이라는 또다른 특징을 지닌다. 이탈리 아에서는 70년대말 아르테치프라( Arte Cifra)라고 불리는 양식이 등장했다. 이 양식의 전체 적인 특징은 기호를 통한 주관적인 표현방법이다.

김관호 (1890~1959)

평양 부호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본 동경미술학교를 나왔고, 1916년 강변에서 머리를 감고 서 있는 누드 여인 두명을 그린 <夕暮>(석모)라는 작품으로 일본의 관전이었던 문전에서 특선을 하였다. 해방 이후 북한에서 활동하다 타계한 것으로 보인다.

김기창 (1914~)

1914년 서울에서 태어남 8세때 장티푸스로 인한 고열로 청신경이 마비가 되었다. 17세 때 이당 김은호의 문하에 입문하여 화가로서의 길에 들어서 12회 선전에 최초로 입선한 것을 시작으로 잇달은 입,특선을 차지하였다. 1946년엔 화가인 박래현과 결혼, 수차례에 걸쳐 부부전을 가짐. 54년 국전에 추천작가로 영입되는 한편 중견작가들 모임인 백양회 창립에 가담. 동양화의 새로운 현실 모색에 앞장섬. 63년 상파울루 비엔날레를 비롯 여러 국제전과 순회전에 출품, 77년엔 성북동 자택에 자신가 부인의 호를 딴 운향 미술관을 개설하고 79년엔 충북 청주 교외에 새로운 화실 겸 미술관을 건립함. 성화집 <예수의 생애>를 비롯 <화방여적>, <침묵화 함께 예술과 함께>, <나의 사랑과 예술>, <침묵의 세계>등 화문집과 수필집을 펴냄. 1993년 예술의 전당에서 '80 회고전'을 가졌다. 전복 (1934) 비단에 수묵채색 71.5*57.5cm 구멍가게 1952 종이에 수묵담채 55.5*69.5cm 소와 여인 1965 종이에 채색 220*169cm 붉은새 1977 종이에 수묵채색 61*69cm 바보산수 1982 49.5*60cm

김득신 - 金得臣 (1754~1822)

조선의 화가. 호 긍재. 화원으로 초도 첨절제사를 지냈다. 그는 풍속화가로 널리 알려졌으나, 풍속화 이외에 도교·불교의 인물을비롯하여 산수나 새·짐승 등도 잘 그렸다. 김홍도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특히 풍속화에서는 그 경향이 두드러진다. 주요 작품으로는 〈영모도〉 〈파적도〉 〈귀우도〉〈귀시도〉 〈오동폐월도〉 〈신선도〉 등이있다.

김은호 (1892~1979)

1917년 회화미술원 서과졸업 1921년 제1회 협전 출품 1949년 제 1회 국전추천작가 어렸을때부터 인물화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 1925년 동경으로 가서 일본화가 유끼 소메이에게 일본화를 사사받았다. 한국에 와 많은 제자를 키우고, 채색화 경향을 주도했다.

김인승(1910~)

동경미술하교 졸업 아카데믹한 사실주의적 기법으로 그림을 그렸다. 주제면에서 서구문물, 서구지향적인 것을 드러낸다. 나부 1936 캔버스에 유채 162*130 호암미술관 첼로 1942 캔버스에 유채 207*147 한국은행

김정희 - 金正喜 (1786~1856)

조선의 서화가·금석학자. 호 추사·완당. 충남 예산에서 태어났다. 1809년 생원이 되고,1819년 문과에 급제하여 암행어사·성균관대사성·이조참판 등을 지냈 다. 24세 때 중국의 연경(베이징)에 가서 그 곳 학자들과 가깝게 지냈다. 붕당으로 인하여 북천과 제주도로 두 차례 12년 동안 유배당하였다. 학문에서는 실사구시를 주장하였고, 서예에서는독특한 추사체(秋史體)를 대성시켰으며, 특히 예서·행서에 새 경지를 이룩하였다. 금석학에도 밝아 북한산에 있는 비가 무학 대사가세운 것이 아니라 진흥왕 순수비라는 것 과,‘진흥’이라는 칭호도 왕의 생전에 사용한것임을 밝혀 냈다. 또한, 종교에 대한 관심도많아, 400여 권의 불경과 불상 등을 중국에서 가져와 봉은사에 기 증하기도 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금석과안록》 《완당척독》등이 있고, 문집에 《완당집》, 작품에 〈묵죽 도〉 〈묵란도〉 등이 있다.

김창렬 (1929~) 1929년 평북 맹산에서 출생 서울대 미대에서 수학했음. 57년 현대미술가협회 조직,창립회원이 되면서서 현대미술운동에 앞장섬. 61년 파리 청년작가 비엔날레에 출팜한 것을 위시, 상파울루 비엔나레, 동경국제판화전, 카뉴 국제회화제등 국제전에 참여하였음. 이외 살롱 드 레알리테 누벨, 살로 드 메 등에도 초대됨. 70년 이후 파리에 정착, 파리와 서울 오가면서 왕성한 활동을 펼쳐 보임. 70년대 초부터 물방울 시리즈로 일관 93년 서울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회고전이 열림. 물방울 (1973) 캔버스에 유채 100*100cm 물방울 (1974) 캔버스,모래 위에 유채 73*60 기억 (1975) 신문지에 수채 60*60cm 해체 (1987) 캔버스에 유채 195*259.5cm

김홍도 - 金弘道 (1745~?)

조선의 화가. 호 단원. 산수화·인물화·신선화·불화·풍속화에 모두 능하였다. 특히, 산수화와 풍속화에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산수화는 사실 묘사와 조국애가 어울려서 조국 강산의 아름다움을 예술로 승화시킨 것으로, 당시의 신윤복·이인문 같은 화가들에게큰 영향을 주었다. 또, 풍속화는 서민 사회의생활 정서와 그들의 생활 모습을 익살스럽고구수한 필치로 그린, 일종의 사회 풍자를 곁들인 작품들이다. 기법도 서양에서 들어온새로운 사조를 받아들여 과감히 시도하였다. 주요 작품으로는 〈소림명월도〉 〈신선도병풍〉 〈쌍치도〉 〈풍속화첩〉 〈마상청앵도〉 등이 있다.

김환기

1913년 전남 신안에서 출생 호는 수화, 일본대학 예술학부를 다녔다. 이과전을 거쳐 자유미술가협회 창립에 회우로 참여. 56년 도불, 59년 귀국까지 약 3년간 파리에 체류하면서 여러 차례 개인전을 가짐. 이후 74년 작고하기까지 약 10년간 뉴욕에 체류하면서 작가 활동을 펼침. 87년 파리 국립 조형예술센터에서의 <김환기 뉴욕 10주년>을 위시해서 서울 국립현대미술관,동경화랑 등에서 유직 및 회고전이 잇달아 열림. 론도 (1938) 캔버스에 유채 61*72.5 국립현대미술관 뱃놀이 1951년경 캔버스에 유채 38*45 항아리와 매화 1954 캔버스에 유채 45*52cm 영원의 노래 1957 캔버스에 유채 161.7*129.5cm 작품 1965 캔버스에 유채 178*127cm 01-05-66 면천에 유채 177.5*120 01-12-71 1972년 면천에 유채 114*381 김환기 - 金煥基 (1913~1974) 서양화가. 호 수화. 전남 신안에서 태어났다. 1936년 니혼 대학 미술과를 졸업하고, 1940년 서울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아방가르드연구소를 조직하는 한편, 이과회와 자유전등에 출품하여 신미술 운동에 참여하였 다. 8·15 광복 후에는 신사실파를 조직하여 모더니즘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65년 이후에는 미국에 정착하여 작품 활동을 하였다. 한국 근대 회화의 추상적 방향을 여는 데 선구자 역할을 하였다. 주요 작품으로는 〈어디에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론도〉〈해와 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