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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주의

'사실주의(Realism)'란 개념은 이지적, 현실적, 객관적인 경향을 띠면서, 사물을 있는 그대로 충실히 묘사하는 사조를 말한다. 사실주의는 19세기 중반기에 문학과 미술을 중심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문예 흐름이다. 미술에서의 사실주의 경향은 프랑스 화가 꾸르베를 시발로 하여, 도미에, 밀레 등의 대표적 화가들로 대변될 수 있다. 19세기 중반에 들어서 서유럽 사회는 정치적으로는 시민계급의 권리를 옹호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경제적으로는 산업 혁명의 숨가쁜 발전 속에서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새로운 기계의 발명 덕분에 대량생산되는 값싼 상품들은 당시 사람들을 새로운 세계에 대한 기대와 함께 좀더 나은 생활을 꿈꾸게 했다. 그러나 이러한 대량생산 체제는 다른 한편으로 인간을 궁지에 몰아 넣게 된다. 장인의 계급으로서 사회적 지위와 안정을 누릴 수 있었던 직공들은 이제 그 자리를 새로운 기계에 넘겨주어야 했고, 기계의 한 부속품처럼 단순한 기 술자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농촌 인구의 도시 유입과 더불어 도시에는 값싼 임금의 노동자 들의 빈민촌이 형성된다. 결국 산업 혁명은 나라경제의 부와 함께 노동계급의 빈곤을 초래하게 된 것이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인간다운 권익과 생계보장를 강력히 요구하기 시작했고, 산업과 사회 계급구조의 붕괴를 두려워한 정부 당국은 이들을 이끄는 조직을 탄압하기 시작한다. 혼란한 사회 배경 아래서 꿈과 이상만을 쫓는 낭만주의 사조가 외면 당하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귀족적인 분위기를 바탕으로 개성과 감정의 자유로운 표출을 목표로 허구 의 세계를 그려대는 비현실적인 그림들이 내일 생활의 위태로움을 느끼는 군중들에게는 더 이상 의미 있는 예술로 비치지 않게 되었다. 그대신 사회문제 의식을 가진 일군의 예술가들 이 새로운 사조를 들고 나오게 된다. 이것이 바로 사실주의이다. 이들은 현실 도피적인 낭만주의와 왕권옹호적인 신고전주의를 배격하고, 사회의 진실한 주 인을 시민, 노동자로 단정지었다. 이들의 주제는 크게 인간이었다. 기만적인 지배층을 고발 하는 풍자화, 도시 노동자와 농촌 농민들의 일상생활 모습을 꾸밈없어 서술하는 풍경화 등 이 그들의 예술이었다. 때로는 사회평등의 이념을 가지고 사회의 어두운 단면들을 고발하듯 이 표현하는가 하면, 아직 자본주의 경제의 침입이 이루어지지 않은 농촌의 안정되고 여유 있는 모습을 따뜻한 애정을 담아 그리기도 했다. 이들의 사실주의적인 풍경화는 19세기 후 반 풍경화 양식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 자연의 때묻지 않은 풍경과 노동의 신성함, 도시민의 소박한 일상성을 화폭 위에서 주장하 는 이들의 그림은 이후의 인상주의 미술이 그 소재와 주제를 결정짓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사실주의(Realism) 합리적 질서 위에서 대상을 명확히 표현하기 위해서 극단적인 형식화나 데포르마숑을 행하 지 않는 예술사조. 대상의 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그러나 미술사 적으로 볼 때, 사실주의는 그 의미가 다양하여, 명확하고 일관된 정의를 내리기가 어렵다. 19세기의 사실주의가 흔히 낭만주의 및 이상주의와 대립된 개념이었던데 비해, 20세기의 그 것은 추상적이란 말과 대립된 개념으로 쓰이기도 한다. 이를테면 세잔느의 사과는 샤르댕의 그것보다 추상적이기 때문에 보다 덜 '리얼리스틱'하다고 말할 수 있으며, 달리의 회화는 추 상과 배치된다는 의미에서 '리얼리스틱'한 회화라고 일컫는다. 역사적으로 볼샔, 사실주의는 자연의 존중과 관찰이 그 주요한 과제였으므로, 이런 점에서는 자연주의와 엄밀하게 구분되 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리 주관을 피하고 대상의 엄격한 객관화를 추구한다 하더라도 거기 에는 작가의 개성이 반영되는 경우가 흔하기 샔문에 리얼리스틱한 표현이라 해서 자연이라 는 패턴의 단순한 반복만이라고는 볼 수 없다. 사실주의는 각 시대, 각 작가에 따라서 독자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를테면 구석기 시대의 동굴의 벽화, 헬레니즘의 조각, 반 아이크 형제, 뒤러, 벨라스케스, 고야 등의 작품에 서 사실주의의 여러 면모를 살펴볼 수 있다. 역사적 유파로서의 사실주의는 19세기 중반부 터 후반에 걸쳐 낭만주의 및 이상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프랑스를 중심으로 전 유럽에 확대 되었는데, 그 발생에는 부르죄의 대두, 과학의 발전, 기독교의 권위 추락 등과 밀접한 관계 가 있다. 도미에의 시니컬한 사실주의는 쿠르베의 이상화 및 공상화를 배제함으로써 사실주 의의 정점을 이루었다. 또 독일에서는 라이플, 벨기에에서는 뫼니에 등의 작품에서 리얼리스 틱한 생활묘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사실주의는 변질되어 이념과 기법이라는 양극으로 분열된다. 19세기 후반에 발명된 사진이란 새로운 기술의 급속한 보급으로, 사실주의가 추구해 온 대상의 객 관적이고 엄밀한 재현은 더 이상 예술가들에게 매력을 주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계속 되는 전쟁과 혁명의 와중에서 화가는 늘 사회와 인간에게 눈을 돌리고, 진부한 외관만의 묘 사를 초월하여 새로운 현실상을 그림으로써 이념과 기법으로 분극된 사실주의는 서로 교차 하면서 유파를 초월한 미술의 저류를 형성해 왔다. 현실의총체에 육박하는 이념으로서의 사실주의의 일단은 입체파를 거쳐 추상미술로 흘러들 어갔다. 입체파 화가의 한 사람이었던 후안 그리스가 입체파의 형태 분석 끝에 '상상력으로 추상적인 것을 구상화' 하고 병을 원통형으로 환원시킨 세잔느와는 반대로 '원통형에서 병 을 만들어 내는' 사실주의를 제창한 것은 흥미있는 일이다. 또 몬드리안은 기하학적 추상을 '새로운 사실주의'라고 했고, 칸딘스키는 추상 예술을 구체미술이라고 불렀다. 한편 눈에 보이는 세계를 그리는 기법으로서의 사실주의는 독일, 멕시코, 미국, 소련 등지에 서 각각 독자적인 전개를 보이고 있다. 독일의 표현주의 좌파에서 출발하여 마술적 사실주 의라고 불렀던 신즉물주의로 발전한 독일의 사실주의는 오토 딕스, 게오르게 그로츠, 막스 베크만, 케테 콜비츠 등으로 대표된다. 다다이즘의 세계를 받기도 했던 이들은 현실 참여적 이고 사회 고발적인 그림을 많이 그려, 특히 군벌, 시민계급, 나치에 대해 날카롭게 풍자했 다. 한편 멕시코에서는 1912년의 혁명에 뒤이어 일어난 내전에 참가했던 시케이로스, 리베 라, 오로츠코 등의 화가들이 식민지 시대의 아카데미즘에 반기를 들고, 콜럼버스 이전의 주 술적 전통을 중요시하면서 멕시코적 사실주의인 이른바 '멕시코 르네상스'를 확립했다. 또한 10월 혁명 이후의 소련에서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예술의 기본 방향으로 정식화되었다. 또 미국에서는 1930년대 뉴딜 정책하에 실업 구제를 위해, 민중 생활 묘사나 벽화 제작에 미술 가들이 동원되어, 미국 풍경화파란 일련의 사실주의 경향이 일어났다. 이러한 사실주의는 전 통에의 회귀라는 경향과 연결되면서,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저항 운동으로 연결되었다. 이러한 경향과는 달리 1950년대 말과 1960년대 초부터 뉴 리얼리즘이란 표현이 쓰이기 시작 했다. 이것은 주로 추상표현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팝 아트를 가리키는 것으로 사실 주의에 대한 새로운 접근으로 볼 수 있다. 여기에서는 사실주의는 반추상적이란 개념은 물 론, 전통적인 것, 기존의 예술 사조에 대한 가치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한 말로 쓰이고 있다.

 

사운드 스컬프처(sound sculpture)

시각 예술의영역에서 소리란 말의 사용은 루이기 루솔로(Luigi Russolo)가 미래주의자 선언 에서 '소음 예술'이라고 한데서 비롯되었다. 존 케이지의 작업은 음악, 시각예술 그리고 무 대 예술 사이의 구별을 희미하게 하는 현대 예술의 전형적인 경향을 보여주는 한 예이다. 몇몇 시각 예술가들은 보통의 무언의 미술작품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소리를 사용 해왔다. 예를 들어 라우센버그는 라디오를 그의 합동 그림<브로드 케스트>에 도입했다. 모 리스는 1961년에 <소리 상자>를 만들었는데, 상자 안에 3시간 분량의 녹음 테이프를 넣어 미술 작품을 생산하는 과정의 소리를 녹음했다.

 

사이키델릭 아트(Psychedelic Art)

사이키델릭이란, 사이코(psycho)와 딜리셔스(delicious)를 합성한, 일종의 심적 황홀 상태를 가리키는 신조어로서, 이 상태를 연출하는 것이 사이키델릭 아트이다. 이것은 일명 LSD아트 라고도 불리며 1963년 샌프란시스코에서 USCO 그룹이 실험적인 작품 활동을 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LSD는 원래 정신병의 치료에 쓰이는 환각제 이름으로, USCO는 이것을 복용하 지 않고 복용한 것과 같은 환각 증세를, 강렬한 빛, 음향, 색채, 진동의 동시 자극 등에 의해 연축하여 인간 의식의 확대를 시도하였다. 이 특수한 인공황경 속에서, 사람은 통상적 이성 의 작용을 초월하여, 해방된 오감의 세계로 향한 여행 즉 내부 여행(inner trip)이 가능해 진 다. 사이키델릭 디자인(또는 포스터)은, 이 심적 상황을 이차원적인 표현으로 바꾼 것이다. 사이키델릭 인바이런먼트는 이것이 엔터테인먼트와 결합하여 고고 뮤직홀의 환경구성으로까 지 발전한 것이다.

 

사진 예술(photographic art)

작가의 내적 이미지를 사진을 통하여 표현하는 예술 분야. 당초부터 회화 예술과의 대비 위 에서 성립되었기 때문에 초기의 그것은 회화주의적이었으나, 알프리드 스티글리츠를 비롯한 자연주의적 사진, 모홀리 나기로 대표되는 추상주의 사진으로 그 표헌 가능성이 확대되었다. 사진의 예술성이 그 나름의 기반을 갖게 된 것은 카메라의 메커니즘만이 지닐 수 있는 기록 성과 재현성 때문으로, 카르티에 브레송의 대상에의 예리한 육박은 사진예술의 세계를 심오 하게 하는데 커다란 공헌을 했다. 카메라의 자동화가 극도로 진보된 현재, 사진 예술가의 진 정한 자격은 그 이미지의 독자성과 표현의 참신함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사회주의 리얼리즘(Social Realism)

혁명후의 소련 예술학은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결합한 예술창조의 원리를 변증법적 사적 유 물론에 입각하여 발전시켰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비에트 이데올로기의 영향하에 있는 모든 국가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예술생산의 토대로 삼았다. 레닌의 반영론은 예술을 통한 사회주의적 전유의 토대가 되었다. 반영론은 예술생산이 사 회·경제적 발전에 의존한다는 사실에 의해 예술작품을 규정한다. 레닌은 마르크스 이론을 기초로하여 예술의 기원을 원시사회에서의 실천적인 인간능력과 관련시켜 파악하고 있다. 정?거인 인식과정의 필연성은 노동과정 자체에서 나타나는데 여기서 최초의 인식형태 중의 하나는 예술적인 형상을 통해 나타난 세계의 반영이다. 예술은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에서 미 래지향적, 집단적, 당파적 기능을 수항하는 근본적이고 유용한 목적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상부구조의 일부인 예술은 집단적 의식이라는 이데올로기교육을 위한 수단인 동시에 자본주 의에 대한 사회주의 체계의 계급투쟁의 무기가 된다. 조형예술은 문학처럼 인간을 정치적· 도덕적 그리고 미적으로 교육시킬 과제 즉 사회주의적이면서 집단적으로 지향된 의식을 배 양시키고 공산주의 사회질서로 끌어들일 괴제를 안고 있다. 1920년대 루나차르스키의 자유 주의 문화정책 하에서 사회주의 예술은 진보적 방향의 양식을 형성시킨 반면 1934년 소비에 트 문필가 협회의 제1차 연합회의에서 강령으로 확정되었다. 안드레이 샤드노프(Andorej Shadnow)는 삶을 단순히 객관적인 현실로만 묘사하지 말고, 혁명적인 삶의 전개에서 현실 을 포착해야한다고 주장하면서 바람직한 공산주의 미래를 예견할 수 있게 하는 예술적 경향 에 대한 확고한 인식을 공식화 했다. 스탈린 시대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당의 엄격한 문화정책에 의한 개인숭배로 특징지워진 다. 스탈린과 레닌이라는 지도자의 인간성이 지나치리만큼 미화된 형태로 인민들 앞에 회화 나 조각으로 제시된 것이다. 자본주의와 파시즘 같은 일체의 현상에 대한 투쟁의 사회정책 적 주체, 그리고 집단주의의 천명과 개인적 이기주의의 배제 등이 너무 이상화되어 고유한 시대 문제 등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오직 혁명의 미래상이나 집단의식으로 이뤄진 공동체만 이 부각된 정도이다. 사회주의의 영웅은 개인주의적 성향을 지니고있지 않다. 그는 당에 복 종하고 사회주의 노동에 열성을 보임으로써 탈개인주의화된 회신인 전형적인 인물이다. 이 와같이 이상화되고 이데올로기적 전형화로 인해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현실적인 모든 문제를 성실하고 솔직하게 묘사하려는 서구 예술학의 비판을 받게 되었다. 현실적인 갈 등을 주제 로 삼아 고찰하려는 입장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곳곳에서 생겨났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문 학에서 두드러졌다. 특히 조형예술 분야에서는 60년대에 이르기까지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변화를 본질적으로 저해하려는 움직임이 다른 세계의 예술사 전개와 동떨어진 곳에서 이뤄 졌다. 최근의 새로운 발전적 시각은 무엇보다도 헝가리, 폴란드, 그리고 동독에서 이뤄졌다. 폴란 드와 헝가리에서는 이미50년대 초 일련의 예술가들이 서구 양식과의 연결을 시도했는데 그 때문에 국외자로 취급받았다. 그와 달리, 동독에서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70년대 이후 관료 적 문화정책에 의해 공식적으로 기꺼이 실험을 할 수 있다는 방향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그 샔문에 이데올로기적인 테마를 유지하는 한에서 현실주의적인 회화 기법의 폭을 넓히고 다 양화시키려 했다. 시민예술의 아양한 품목들로부터 도상들이 결합된 작품들은 마티스와 피 카소의 영향을 심화시켰고, 신즉물주의의 거장들을 새롭게 조명하게 했으며, 어떠한 양식에 도 구애받지 않는 구투소처럼 모범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그와 함꼐 서구의 신사실주 의자들의 콜라주 기법을 모방하게 되었고, 사회주의적인 인간상으로 새롭게 조명된 영웅적 인 인간의 표현속에는 르네상스적인 파토스의 특성이 나타났다. 이처럼 사회주의 리얼리즘 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해온 대표자들로는 무엇보다도 베른하르트 하이지, 볼프강 마트 호이어, 빌지테, 그리고 베르너 튀브케를 들 수 있다. 오늘날 동독 회화는 완전한 추상에까 지 이르는 모든 서구적인 양식의 형성에 열의를 쏟고 있다. 그러나 주제의 영역에서 예술가 들은 노동이나 집단적 그림의 주된 장르에서, 그리고 이른바 70년대의 투쟁적인 도상에서 나타난 사회주의적인 근본태도를 여전히 견지하고 있다. 이전의 전형적인 도상에 반하는 투쟁적 도상의 새로움은, 마치 현실적인 문제들이 집단적 욕구와 개인적 욕구의 대립으로부터 비롯될 수 있듯이, 현실적인 문제들을 묘사하는 가운데 구체화되었다. 그러나 소련과 동북아시아 제국들에서는 낡은 교의 속에 양식이 정체되는 현 상들이 나타났으며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숭고하게 이상화시키는 방향으로 주제가 고정되 는 현상도 나타났다. 쿠바나 사회주의 인민공화국의 개별적인 화가들에게서는 오직 향토색 이 짙은 국민에술에 전념하는 길만이 독자적으로 양식적인 면에서 관료적인 테마 설정을 극 복할 수 있는 길이다.

 

산수화 [山水畵]

자연경관을 그리는 풍경화. 신선이나 영수가 살고 있는 곳으로서의 표현은 진,한 때부터 이미 성행하였으나 자연 경관 을 대상으로 하는 순수한 산수화는 육조시대에 이르러서야 독립된 주제로 그려지기 시작 함. 동시에 북방적인'산천'외에 남방적인 '산수'란 말이 흔히 통용되게 되었다. 그러나 그 당시만 해도 언덕,나무 특히 공간 표혀은 여전히 고졸한 형태로 있다가 당대의 리 쓰쉰,리사오따오 등에 의해 청록 산수화로서의 초기 자연주의가 완성되었다. 그 후 구어 시에 의해 종합되고 이론이정립되었으며 삼원 법이 시도되었다

 

산업 디자인(industrial design)

공업 디자인. 좁은 의미로 공업 제품의 형태, 색채, 표면처리 등의 미적·조형적인 면과 감 촉, 내구성, 안전성 등의 면에서 공업제품과 인간과의 보다 좋은 관계를 만드는 일. 그 사상 적 원류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초에 걸쳐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에 의해 영국의 아스안트크라후스 운동(1859∼90년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공업화 사회에 있어서 인간성의 부활을 주장한 이 운동은 독일 공작연맹(1907∼33)으로 계승되었고, 바우하우스 운동을 거쳐 오늘날에도 세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또하나의 커다란 흐름은 미국의 공업 디자인 으로 1930년 역사적 대공황 이후의 경제부흥 과정을 통해 사회에 정착되었던 것으로 대량판 매 정책의 일환으로 공업 디자인의 사상은 사회 전반에 대단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상업 미술(commercial art)

상업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조형적인 표현을 말하나 그 범위는 넓다. 즉 상품 및 그 포 장지의 디자인, 판매를 원조하기 위한 디자인이나 직접 상업적인 목적을 갖지 않는 P.R을 위한 디자인까지 여기에 포함된다. 이들은 모두 전문적인 상업 디자이너에 의해서 이루어지 게 되는데, 이렇게 전문 미술가가 필요하게 된 이유는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서의 상품경쟁 의 격화 때문이다. 상업 디자이너의 임무는 포스터, 신문·잡지광고, 텔리비전 광고와 같은 현대 매스 커뮤니케이션을 무대로 하며, 피광고자가 직접 입수할 수 있는 팜풀렛, 카탈로그, 전단의 디자인에 있어서는 상품 및 그 포장의 디자인, 디스플레이 등과 같이 인더스트리얼 디자이너가 맡을 수도 있다. 상업 미술은 오늘날 명확히 독립된 미술의 한 분야를 이루고 있으나, 그 역사를 보면 여러 경향의 순수 미술로부터 영향을 받아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후 새로운 기술(주로 인쇄술과 사진술)의 진보와 새로운 재료의 출현에 의해 새로운 표 현을 흡수하기에 이르렀다.

 

상징주의

프랑스 시단에서 일어난 상징주의 운도오가 밀접한 관련을 맺고 1885년부터 나타난 화가· 조각가들의 태도, 혹은 다소 느슨하게 조직된 운동의 한 경향. 상징주의는 인상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났으며 쿠르베에 의해 공식화된 '사실주의의 원리'에 반발하였다. 쿠르베가 세운 원칙은 그의 말-"회화는 본질적으로 구체적인 예술이다, 그것은 실재하는 사물의 재현 에 의해서만 구성된다 추상적 대상은 회화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에 잘 나타나 있는데 이러한 회화 이념에 대한 반발로 시인 장 모레아스는 <피가로>지 1886년 9월 18일자에 '상 징주의 선언문'을 발표했다. 그는 예술의 본질적 원리는 '사상에 감각적 형태를 씌우는 것' 이라고 선언했다. 상징주의의 목적은 물질세계와 정신세계 사이의 갈등을 해소하는 것이었 다. 상징주의 시인들은 시적 언어를 내면 생활의 상징적 표현으로 여겼으므로 화가들에게도 신비와 마술 등을 시각적으로 표현해 줄 것을 요구했다. 상징주의의 이론적 기반은 고갱 후 원자 모임의 열광적인 회원이었던 평론가 알베르 오리에에 의해 1891년 3월 <메르퀴르 드 프랑스>지에 발표된 논문 <회화에 있어서 상징주의>에 의해 기초되었다. 그는 이 논문에서 예술 작품은 ① 사상이 있어야 한다. ②예술은 사상을 형식으로 표현하는 것이므로 상징적 이어야한다. ③ 예술은 일반적인 이해를 위한 양식으로 여러 형태와 기호를 제시하므로 종 합적이어야 한다. ④ 예술이 묘사하는 대상은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주관에 의해 인지된 사 상의 표지이므로 주관적이어야한다. ⑤ 그러므로 예술은 결과적으로 장식적이어야 한다. 왜 냐하면 장식적인 그림이란 동시에 주관적, 종합적, 상징적 사상적인 표현에 다름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썼다. '종합적'이란 말은 종종 회화의 상징주의 운동과 시의 상징주의 운동을 구별하기 위해 사용 된다. 그리고 적어도 어느 부분은 상징주의 운동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는 나비파 화가들 의 작품에도 사용되는 단어이다. 나비파는 <상징주의자로서의 세잔느>(1907)를 쓴 이론가 모리스 드니에 의해 상징주의자들로 간주되었었다. 그는 상징주의에 대해 "본래 신비적이거 나 이상주의적인 운동은 아니다. 이것은 풍경화가와 정물화가들에 의해 시작된 것이지 영혼 을 그리고자 하는 화가들에 의해 시작된 것 역시 아니다. 표현된 주체가 우리의 정신상태를 일깨우는 것이 아니라 작품 그 자체가 최초의 감각을 전달하고 감정을 영속시킨다. 모든 예 술작품은 어떤 경험된 감각의 혹은 더 빈번하게는 심리적 사실의 전위, 열정적인 등가물, 희 화이다"라고 말했다. 상징주의와 상징주의자들의 예수에 대한 개관은 여러 간행물을 통해 출판도었다. <데카탕 >,<보그>,<상징주의자>가 1886년 ,<메루퀴르 드 프랑스>가 1891년에 출판되었다. 상징주 의적 태도를 명백하게 드러냈던 화가로는 다음과 같은 사람을 들 수 있다. 샤반느는 '명료 한 사상 각각에는 그것을 번역하게 하는 시각적 사고가 각각 따른다'고 믿었다. 르동은 모 리스 드니에 의해 '회화의 말라르메'라고 뷸리었었는데 자신의 목적을 '인간의 감성을 아라 베스크한 것으로 변형시키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화가 모로는 마티스, 루오, 다른 야수파 작가들의 스승이었다. 카리에르는 몽환적·문학적 내용을 무채색조로 그린 화가였다. 상징주의자들은 새로운 회화 양식을 창조하지는 못했다. 그들은 예술적 형식보다는 시적 사 상의 표헌, 마술(신비), 혹은 종교 애호주의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 절충주의 혹은 개인주 의자들이었다

 

색(color)

빛의 스펙트럼의 파장에 의해서 식별할 수 있는 시감각의 특성으로 시각의 기본적 요소들의 하나이다. 색채 연구는 심리학, 물리학, 그리고 생리학 분야에서 행해진다. 심리학적 연구에서의 색채는 시각 체험의 한 요소이며,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색채 개념은 시·공간적 형상들을 떼내어 버릴 때에 남는 시각 체험상의 형상(aspect)으로 정의된다. 일 상생홀 속에서 우리는 색채를 주변 세계 내에서 존재하는 물체들의 속성으로 간주하여 사물 인식에 도움을 주는 단서로 삼는다. 그러나 일상적으로 우리는 색채를 특별한 고려 대상으 로 삼지도 않고 그냥 보이는 대로 대할뿐이다. 색채의 본상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고도의 세련된 태도로서 미술 분야에서도 그리 오래되지 않은 태도이다. 그림의 역사를 두 고 본다면 색채는 형체의 본질적인 도형에 덧붙여진 장식 이상의 것으로 간주되지 못하였 다. 18세기 말에 칸트도 <판단력 비판>에서 본질적인 것은 도형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미 술이나 의류직물 그리고 실내장식 따위에서 색채의 미묘하며 세부적인 사항들에 대해 오늘 날 관심이 기울어지고 있다는 것은 색채에 대한 전반적인 태도가 변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특히 현대 회화에서는 색채를 형식을 윤색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형식의 실체인 동시 에 구조로서 파악한다. 시각 체험에서 색채는 세 가지 양상으로 출현하는 데 그것은 프리즘을 통하여 시각에 정면 으로 보여지는 감광막 색채(film color)와 한 잔의 술이나 연기더미처럼 투명하거나 부피가 있는 유색 물체를 통해 보여지는 체적 색체(volume color), 그리고 사물의 실제 특질로서 표 면 질감으로 보여지는 표면 색체(surface color)가 그것이다. 특히, 미술가들은 주로 표면 색 채를 갖고 작업한다. 화가들이 구사하는 기술의 일부는 실제로는 감광막 색채 등 표면 색채 를 제외한 색채의 제반 양상을 갖지 않은 안료를 수단으로 그러한 양상들을 산출해 내는 것 이다. 표면 색채를 수단으로 색채의 다른 양상을 재현해냄으로써 보는 이가 평평한 화면을 인식하는 동시에 그림 공간 속에서 묘사된 물체들을 포착하는 미적 체험을 즐길 수 있게 한 다. 현대의 추상 조각에서는 투명한 재료를 통해 체적 색채가 활용되곤 한다. 모든 색채는 독자적인 세 가지 차원 혹은 양상을 지니는데, 색상, 채도, 명도라는 일반적인 성질이 이에 해당한다.

 

색가

주로 회화이 색채에 관하여 마랗는 발뢰르의 역어, 광가라고 번역하는 경우도 있다. 둘 이상 색채 대비에 의하여 화면에 나타나는 공간 표현을 말한다. 이말의 뜻은 회화 양식의 추이에 따라 다소 변화되고 있다. 인상주의까지의 회화에 있어서는 색채 상호 간의 밝기를 대비하 여, 밝은 색은 화면 앞으로 떠오르고 어두운 색은 뒤에 가라앉는 것이 시각의 원칙이므로, 그 관계에 따라 색채를 처리하면 먼 것과 가까운 것이 서로 자연의 실제 공간처럼 보이도록 표현할 수가 있었다. 이 경우 실제의 자연광 속의 가장 밝은 색과 가장 어두운 색 사이의 폭은, 물감에 의하여 표현할 수 있는 폭보다 훨씬 넓고, 또 무수한 단계가 있으므로 자연 그 대로의 색가에 의해 표현할 수가 없다. 물감으로는 서로 인접한 색채들의 관계에 따라, 폭이 좁은 명암의 범위에서, 그나마도 요약된 명도로 그것을 표현한다. 여기에 화가의 중요한 기 량이 있다. 인상주의 이후의 근대 회화에 있어서는 꼭 색채 상호간의 밝기에 의한 원근 표 현 뿐 아니라 색의 명도, 순도, 채도의 상호 대비, 색의 배치 관계에 따라 화면에 구성되는 입체감의 골조, 공간의 넓이, 화면의 동감 등이 표현되며 이것은 고전 회화의 자연 법칙에 따른 원근법에 의한 색가의 뜻보다도 넓은 의미를 갖게 되었다.

 

 

색면파(Colorfield Painting)

1940년대 후반부터 1950년대에 걸쳐 일어난 미국 회화의 한 경향. 그러나 색면파 회화의 기 원은 프랑스의 인상주의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즉 인상주의자들(특히 <수련>을 그린 모 네의 작품에서)은 최초로 전면 균질적인 화법에 근거를 둔 작품을 시도했다. 그들의 작품은 중심적인 초점이 결여되었을 뿐만 아니라, 가장 급진적인 작품 증에는 전통적인 구성의 기 초가 되는, 부분과 부분의 연관성을 강조하지 않은 것도 있었다. 그대신 그들은 한결같이 정 연한 색깔의 '화면(field)'에 집착했다. 1920년엣 1950년 사이에 초현실주의 화가들은 창조적 표현을 방임하기 위한 수단으로 자동기술법을 실험했다. 그러한 수법은 전체의 화면에 이미 지를 분산시키는데까지 이르게 되었다. 1940년대 초기에 마크 토비는 이 범주에 속하는 그 림을 실험하고 그것을 '화이트 라이팅(whie writing)' 이라고 스스로 명명했는데 이것은 동 양의 서예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었다. 1947년에는 잭슨 폴록이 그의 드립 페인팅에서 새롭 고 광대한 규모 위에 '전면 균질적' 구성을 창조해냈다. 1950년에 이르러서는 바넷 뉴먼, 마 크 로드코와 같은 작가들이 폴록의 화면의 개념에다 색채에 대한 관심을 결합시킨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형태를 소수의 단순한 모양으로 감축시키고, 캔버스를 거대한 규 모로 확대시킴으로써, 때때로 순수한 색깔의 화면에서 발생하는 효과를 거둘수 있었다. 뉴먼 과 로드코는 궁극적으로 순수한 시각에 근거를 둔 미술에 도달하게 되었으며, 색깔간의 수 평적이고 수직적인 분할에 있어서 극히 협소한 표면을 명료하게 함으로써 색면을 연속시키 는데 중점을 두었다. 그들의 단순화된 구성과, 과감한 규모, 그리고 번쩍거리고, 상황적이며, 잘 침투된 색깔은 케네드 놀런드,모리스 루이스,줄즈 올리츠키와 같은 미술가들에 의해 인계 되었다. '색면'은 또한 진 데이비스와 래리 푼즈의 보다 시각적인 그림에서 출발점이 되었으 며, 한편 그 급진적인 단순화와 내부의 형태를 캔버스의 장방형 구성에 연관시킨 경향은 미 니멀 아트의 기초를 마련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색상

색상(hue)은 색환에서 광파에 따라 순차적으로 배열된 색채의 등급 을 일컫는데, 붉은색 계통의 광파가 가장 길고 초록과 보라로 갈수록 광파는 짧아진다. 색환 에서 구별될 수 있는 색채의 수는 대략 150가지가 된다. 채도(saturation)는 노출된 색채의 총량이라는 의미에서 색채의 순수성을 말한다. 명도(brightness)는 색채의 밝은 정도를 의미 한다. 색상, 명도, 채도에 의해 경험상의 모든 양상은 설명될 수 있다. 이 외에도 색채 경험 상의 속성을 나타내는 용어로는 광도(brilliance), 순도(chroma), 색조(tone), 농담(shade), 틴 트(tint ; 연한 색조), 조도(intensity)가 있다. 색상은 자연적인 순환질서를 갖는다. 보색은 이 색상의 질서 내에서 가장 먼 거리를 두고 서로 마주 보는 관계의 색채를 일컫는데, 보색 관계의 두 색깔이 나란히 병치될 경우 동시에 대조를 이룸으로써 상대방 색깔을 최고로 돋 보이게 만드는 효과를 낳는다. 그리고 어느 색깔의 이미지가 잔상으로 남을 경우 이 잔상도 그 본래 색깔의 보색에 해당한다. 심리학에서는 색채가 갖는 따스하거나 차거운 느낌, 무게와 크기 그리고 색채에 대해 인간 이 갖는 정서적 반응과 같이 색채의 부차적인 성질도 연구 과제가 된다. 19세기 중반 테오 도르 페히너 이래 실험 미학에서 이와같은 문제를 연구하고 있다. 황색 계통이 따스한 느낌 을, 청색 계통이 차가운 느낌을 준다는 것은 일반적인 상식이며, 실험 결과 색채의 따스한 측면은 명도나 채도보다는 색상과 관련된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따스한 느낌의 색깔이 전 향적이고 차가운 느낌의 색깔이 후퇴적이라는 것도 미술가들에게 있어서는 오래된 상식인 데, 1940년대의 실험 결과 이러한 느낌은 색상보다는 명도에서 기인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리고 짙은 색깔이 옅은 색깔보다 무거운 느낌을 주고 옅은 색깔의 물체가 짙은 색깔의 물 체보다 더 커보이는 경향이 있음도 밝혀졌다. 물리학적 견지에서 색채는 조명과 더불어 인간에게 색채 경험을 산출하는 자극제로서의 역 할을 수행한다. 물리학적 접근을 통한 색채 연구는 광선을 매개로 해서 색채의 혼합에 따른 현상들을 연구한다. 색채에 대한 정신 물리학적 연구는 색채가 자극을 주는 상황에 대한 물리적 연구와 시각적 체험 내에서 인간이 보이는 주관적 반응에 대한 심리학적 연구를 결합하여 진행되었는데, 이는 미술의 색채를 이해하는 데 있어 본질적인 연구 방법이다. 시각의 현장에서 한 색채가 다른 색채와 관련해서 어떻게 위치하느냐에 따라 색상·채도·명도가 영향을 받는데, 형태 심리학에서 이런 측면의 연구가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그리고 공간적인 인자도 색채의 명 도·채도에 영향을 주며, 한편 우리가 익숙한 사물의 색채는 조명에 의해 좌우되지 않고 비 교적 독자적인 일관성을 유지하면서 시각에 의해 포착된다는 사실도 알려졌다.

 

색상(hue)

명도, 채도와 더불어 색의 세 가지 속성중의 하나. 색의 질감의 차이를 표시하는 정도를 가 리킨다. 스펙트럼에 의하면 물체의 색은 적색, 황색, 청색의 기본적인 세 가지 색상과 녹색, 주황색, 보라색의 부수적인 세 가지 색상으로 나뉘어진다.

 

색의 병치(juxtaposition of color)

작은 여러 가지의 색깔을 나란히 늘어놓은 것. 모자이크 미술(색유리, 색타일, 계란뛱질, 색 나무 조각 등)또는 그와 닮은 색종이 조각을 붙여 만든 그림이나, 색실 자수, 인상주의 회화 의 점묘법 등 이들은 모두 색의 병치에 의한 효과를 기도한 것이다. 색은 병치함으로써 서 로 작용하며, 명도를 감하거나 서로 끌어당기는 등 시각 혼합의 이론에 따라 총합적으로 중 간 혼합의 결과를 나타낸다.

 

색채 감정(colorfeeling)

개개의 색 또는 색의 조화가 갖는 심리적 효과인데, 그것이 의미와 결합되면 백색-순결, 남 색-용감, 녹색-친절, 청색-겸양 등의 이념을 나타내게 된다(칸트). 그러나 미술 특히 회화에 있어서는 개개의 색보다도 각 색깔의 관계에 의하여 생기는 춥고 따뜻한 것, 무겁고 가벼운 것, 흥분과 침착, 화려한 것과 차분한 것, 진출과 후퇴 등의 느낌을 말한다. 다만 이는 개별 적, 주관적인 것이므로 그것을 가늠하거나 공식화할 수는 없다

 

색채 상징(color symbol)

사람은 색채를 보았을 샔, 사상, 성격, 환경, 경험에 의하여 어느 정도의 공통된 연상을 갖는 다. 이 연상에 떠올라 오는 것은 당초의 색채에 대한 상징이다. 예를 들면 청색은 바다, 강, 호수 등을 상징하고 또 서늘한 것을 상징한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상징 성도 결코 일정하지만은 않아 민족성이나, 기후, 풍토, 시대 등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불가 피하다.

 

프란시스(Sam Francis)-(1923~)

물감이 흘러내리고, 튀기기도 한 것처럼 선명한 색채를 유동적으로 사용하였다. 미국의 화가. 버클리 대학에서 의학과 식물학을 전공한후, 1943-45년에는 전투기 조종사로 군에 복무했다. 부상으로 퇴역해 회복기간중 처음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초기의 그의 작품은 회색과 흰색에 이어 검정색을 주로 사용하는 모느크롬 계열의 작품으 로 강한 대비효과를 통해 색을 부가시킨다는 점에서 모네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그러나 곧 마티스 식의 색채법에 매료되어 완벽한 색채구사를 하는 추상작품을 연마한다. 공간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갖고 있었다. 샘 프란시스에서 있어서 공간을 동시에 회화적이 며 내면적이기도 하고 우주적이기도 하다. 그는 색채를 불붙은 빛이라고 여겨 빛의 활동영역인 공간에 새로운 차원을 부여하며 이를 표현하기 위해 드리핑 기법이나 스폰지에 물감을 적셔 사용하는 기법 등을 사용해 대기와도 같고 물 속과도 같은 새로운 공간을 창조해 낸다. 잘 격렬하면서도 미묘하게 어울리는 색으로 큰 얼룩을 만들어 화면의 가장자리에만 물감을 칠하고 가운 데는 그대로 남겨두기도 한다. 이 모든 경우에 바탕의 횐색이 함께 어우러져 색채가 갖는 에너지가 발휘된다. 이로써 인간정신과 우주사이에 연맥이 성립되며 참선의 상태와도 같이 자아와 타인의 합치 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 작가의 철학이다.

 

샤갈 Marc Chagall (1887-985/러시아)

1887년에 출생한 러시아의 화가. 비테프스크 출신. 유태인의 핏줄을 받았다. 1908년부터 산크트 페테르스부르크의 미술학교에 서 배웠다. 1910년 파리로 나와 다음해부터 앵데팡당전에 출품하였으며 1914년에는 발덴의 도움으로 최초의 개인전을 베를린에서 개최하여 성공하였는데, 유태인이라는 민족적 감정과 슬라브적인 공상이 한데 얽혀 형성된 특이한 환상 예술에 의해 점차 유럽 세계에 이름을 떨 치기 시작하였다. 퀴비즘 운동에 지도적인 역할을 한 시인 아폴리네르와도 접촉함에 따라 이 무렵의 그의 작품에서는 퀴비즘의 영향을 간과할 수가 없다. 예컨대 "나는 조형 속에 심 리적인, 말하자면 제4차원을 넣는다."라고 그 자신이 설명한 것처럼 1917년에 제작한 '술잔 을 든 두사람의 초상'은 퀴비즘 기법으로 꿈과 추억과 현실을 미묘하게 융합한 세계를 그린 것이다. 제1차 대전 중에는 러시아로 돌아가 고향 지방의 미술학교 교장으로 근무하다가 1922년에 재차 파리로 이주하였고 제2차 대전 중에는 미국으로 망명하여 체류하였다. 1947년 파리로 돌아와 1948년에는 베네치아에서 열린 제24회 비에날레전에 출품하여 판화상을 받았다. 1949년 남프랑스의 조용한 지방에 거처를 마련하여 한 때는 제도술에도 열의를 보여 주었 다. 그의 자유로운 공상 때문에 시적 풍취가 풍부한 독자적 화경을 개척하였다. 특히 1911년 에 제작한 '나의 마을'은 원형, 삼각형이 교차하는 포름이 두드러지기 때문에 입체파의 동화 라고도 할 수 있는 작품이지만 러시아의 민담이라든가 슬라브 민족의 환상, 유태인의 속담 과 신비적인 전설, 러시아의 전원 풍경, 어린 시절의 꿈과 같은 갖가지의 추억 등이 불타는 듯한 환상으로 짜여져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은 하나의 노스탤지아인 것이다. 1920년대에는 판화로서 그의 걸작으로 꼽히는 고글리의 소설 '죽은 혼'이나 라 퐁테느의 시 집 '우화'의 삽화도 그렸다. 초기의 회화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칙칙한 색체가 만년에는 온화 한 색조로 바뀌었다. 1985년 사망하였다.

 

샤갈(Marc Chagall)-(1887~1985)

중력을 벗어난 영원한 사랑을 그림의 주제로 택하여 고향 러시아의 풍경이 화면에 무중력 상태로 나타난다. 천정화와 스테인드글라스도 제작하였다. 러시아의 화가이며 유태인의 핏줄을 받았다. 1908년부터 산크트 페테르스 부르크의 미술학 교를 다녔다. 1911년에 입체주의의 기법을 이용하여 러시아에 대한 추억과 자신의 상상력을 유합한 '나 와 마을' 을 발표한다. '나의 마을' 은 원형과 삼각형의 교차하는 흐름으로 입체파의 동화라고도 할 수 있는 작품 이다. 러시아의 민담, 슬라브민족의 환상, 유태인의 속담, 신비적인 전설, 러시아의 전원풍경, 어린 시절의 꿈과 같은 갖가지의 추억등이 환상적으로 짜여져 있다. 1914년 발덴의 도움으로 최초의 개인전을 베를린에서 개최하여 성공하였다. 유태인이라는 민족적인 감정과 슬라브적인 공상이 얽혀 형성된 특이한 환상예술에 의해 점차 유럽 세계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샤갈은 이때에 아폴리네르와와 접촉함에 따라 그의 작품에서도 큐비즘의 영향적인 면을 볼 수 있다. 1917년에 제작한 '술잔을 든 두사람의 초상' 은 큐비즘 기법으로 꿈과 추억과 현실을 미묘 하게 융합한 세계를 그린 것이다. 1920년대에는 판화로서 그의 걸작으로 꼽히는 고글리의 소설 '죽은혼' 이나 라퐁테느의 시 집' 우화' 의 삽화도 그렸다. 1922년에 파리로 이주하였고 제2차 대전 중에는 미국으로 망명하여 체류하였다. 1923년 프랑스로 돌아온 그는 일러스트레이션을 그린다. 특히 구약을 그림으로 옮긴 그의 종교화는 팔레스타인, 시리아, 이집트 여행에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 1948년까지 뉴욕에서 작업을 하다가 파리로 돌아와 세라믹,조각,스테인드 글라스등 새로운 매체를 통한 작업을 시작한다. 1948년 샤갈만이 소유하고 있는 신비로운 비합리성으로 인해 그는 다른 어떤 미술경향으로 부터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 색깔로써 전체구성을 만들어 내고 상상과 현실이 섞여 어린 시 절 고향의 전설에 대한 기억을 재창조해낸다. 1949년 남프랑스의 지방에서 제도술에 열의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그의 자유로운 공상때문 에 시적풍취가 풍부한 독자적인 화경을 개척하였다. 1950년부터 남불에 정착하여 활동했으며 여러곳에서 작품제작을 요청받게 된다. 대부분이 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와 세라믹 작품을 제작한다. 1985년에 사망한다. 주요 작품 : 수닭. 성서의 메시지, 자화상 등)

 

샤르댕 (Jean-Baptiste-Simeon Chardin,1699~1779)

프랑스의 화가. 주로 정물화나 풍속화를 그린 18세기 프랑스의 대표적인 화가. 파리에서 태어났다. 1728년 6월의 성체 축일에 거리에서 열린 청년 화가 전람회에 〈가오리〉〈식기 선반〉을 출품하여 강렬한 색과 잘짜여진 구도가 돋보이는 작품이라는 호평을받고, 다시 이 작품들을 아카데미에 제출하여 회원으로 추천받았다. 그는 정물 중에서도 가장 단순한 것, 예를 들면 부엌 용구·채소·과일·바구니·생선·담 배 기구·그림상자 등을 주로 다루었고, 서민 가정의 일상생활이나 어린이들의 정경을 따뜻 하고 평화롭게 그렸다. 두껍게 칠하는 기법과 견고한색채는 안정되고 심오함을 느끼게 하는 그만의 특징이다. 주요 작품으로는 〈팽이를 들고 있는 아이〉 〈시장에서의 귀로〉 〈요리하는 여인〉 등이 있다.

 

샤세리오 (Theodore Chasseriau,1819~1856)

프랑스의 화가. 서인도 제도 아이티 섬의 사마나에서 태어났다. 2세 때 가족과 함께 파리로 왔다. 고전파의 대가 앵그르에게 배워서 독자적인 예리한 감수성을 갖게 되었다. 1840년 이탈리아를 여행한 다음 〈바위에 결박당한 안드로메다〉를 살롱에 출품하여 유명해 졌다. 1846년 알제리를 여행하던 중, 그곳 토지와 풍속의 산뜻한 색채에 매료되었으며, 스승 앵그 르가 지니는 선의 아름다움과낭만파인 들라크루아의 색채를 융합하는 데전념하였다. 고전파에서 출발하였지만 색채에 많은 관심을 갖고 낭만주의로 기울어, 독자적이고 풍부한 관능미를 표현하였다. 그밖의 작품으로는 〈자매〉 〈수잔〉 〈에스더의 화장〉 등이 있다.

 

서세옥 (1929~)

1929년 대구에서 출생. 1950년 서울대 미술대를 졸업. 재학중이었던 49년 1회 국전에서 국무총리상을 수상. 60년 묵림회전 창립에 참가 이후 묵립회의 실질적인 리더로서 동양화의 혁신운동에 앞장섬. 63년 상파울루 비엔날레를 위시해서 한국현대미술 프랑스 순회전, 칸느 국제회화제,한국현대미술 유럽 순회전, 한중 미술교류전 등 각종 순회전과 순회전에 출품. 전통회화에 있어서 비구상적 경향을 주도했다. 정오 1958 석과 1973 춤추는 사람들 1995 종이에 수묵 163*129cm 사람들 (1985) 종이에 수묵 164*260cm 사람들 (1996) 종이에 수묵 104.5*128cm

 

서정적 추상

1947년과 1950년대 말 사시에 나타난 새롭고 무의식적인 미술 형태. 보통 '서정적 추상'이라 는 말로 지칭된 이 미술 운동은 액션 페인팅, 앵포르멜 미술, 타시슴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추상 예술의 다양한 경향을 일반적으로 두 개의 양극으로 구분해 서정적 추상과 기하학적 추상이라고 명명한다. 이 두 개의 원형은 칸딘스키와 몬드리안의 방법에 그 기원이 있다. 즉 칸딘스키와 같이 색채와 형태의 구성을 작가의 내면적인 감정의 표출에 전적으로 맡기는 일 종의 표현적, 정감적 방법을 '서정적 추상(뜨거운 추상)'이라 부르고, 몬드리안과 같이 색채 와 형태의 엄격한 논리적 질서에 의해 화면을 구축해 가는 일종의 지적, 합리적 방법을 '기 하학적 추상(차가운 추상)'이라고 부른다. 1947년 카미유 브리앙과 조르주 마티외에 의해 ' 상상의 세계'라는 명칭으로 개최된 공동전시회는 원래 '서정적 추상 시대'라고 부르기로 되 어 있었지만 최종 단계에서 명칭이 변경되었다. 서정적 추상이란 개념은 애초에 기하학적 추상파의 작가들과 싸우기 위한 논쟁의 도구로서 고안된 것인데, 이 새로운 운동에 참여한 화가들의 일부는 '심리적 추상'이라는 명칭이 그들의 대상을 표현하는데 더 정확하다고 느 꼈다. 어쨌든 서정적 추상은 논쟁에서 승리를 거두어 대상물이 지닌 요소와 내포된 의미에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는 회화의 형태를 대표하게 되었다. 이들의 그림에서 대상물은 다이나 믹하고, 리드미컬한 자화상의 형태로 대치됨으로써, 기존의 추상 미술의 형태는 화가다운 제 스처가 지배하는 완전히 무의식적인 구성에 자리를 양보하게 되었다.

 

서화일치론 書畵一致論

그림과 글씨는 본질적으로 동일하다고 하는주장.성당기(盛唐期)에 비약적으로 발전한 회화 예술이 육조(육조)이래 이미 예술적가치를 확립한 글씨에 필적하려고 하는 사상에 입각하고 있다. 당나라 즈앙 이앤위엔 의 <역대명화기>에는 문자와 그림이 그 원초가 동일하다는 설과, 내 면 표출을 가능하게 하는 용필법이 공통된다는 설 등이 기술되어 있다 .그리고 북송에서는 작자의 인품 반영이라고 하는 공통점이 첨가됨으로써 후대 문인화의 이 론적 근거의 하나가 되었다

 

석채(石彩)

진채(眞彩) 또는 농채(濃彩)와 같은 뜻으로, 진하고 강하게 쓰는 채색을 말하며 그렇게 그 려진 그림을 석채화 .진채화 .농채화 한다. 한국에서는 중국에서 개발된 그 특수한 광물질 채색 원료를 흔히 '당채(唐彩)' 라고 한다.

 

선 인그레이빙(line engraving)

동판화기법의 하나. 금속 요판, 또는 조각 동판이라고 한다. 그레이버라는 도구를 사용해 도 안대로 금속판의표현을 파낸 후 파낸 선 안으로 잉크를 문질러 넣어 힘을 가해 눌러 찍어내 는 음각 기볍의 판화. 금속판으로는 철·아연·은판을 쓰기도 하나 흔히 사용되는 것은 동 판이다. 에칭처럼 바늘 끝으로 단순히 표면을 긁고 약액에 의한 화학 작용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도구를 사용해 금속판을 어느 정도의 깊이까지 파서 새겨진 선이 그대로 인쇄돼 화 면에 나타나게 하는 것이 특징이다. 선을 샛길 샔는 도구를 쥔 손에 힘을 가감하여 깊이를 조정하여 깊게 팔수록 굵은 선이 나타난다. 선 인그레이빙은 여러 가지 크기의 점이나 평행 선, 그물눈 모양의 선 등을 이용해 명암과 농담의 효과를 낼 수도 있으나, 이 매체의 본질적 인 특징은 직선적인 것으로 금속성의 강함과 명쾌함, 정확성 등이다. 선 인그레이빙의 역사는 15세기 중기 독일과 이탈리아의 금세공인들에 의해서 독자적으로 발생한 것 같다. 르네상스 시대인 16세기 초에 완숙기에 이른 이 기법의 유명한 제작자들에 게는 알브레히트 뒤러, 라이몬디 마칸토니오 등이 있다. 17세기에는 프랑스에 유명한 인그레 이빙 초상화 학교가 생겨 몇 가지 기법상의 발전을 본다. 이때부터 에칭과 결합, 제작자들은 노고를 줄이고자 도안은 에칭으로 하고 정치한 표현을 요하는 곳과 마무리만을 인그레이빙 방법으로 처리하는 식으로 작품을 만들었다. 19세기 후반 사진의 발달과 함께 선 인그레이 빙은 실용성을 상실하였고, 본래 이 기법이 갖고 있는 예술적 특성을 추구하는 작가에 의해 서만 제작되고 있을 뿐이다.

 

선(line)

미술에 있어서 선이란, 보통 색, 면과 함께 형태를 표현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특히 채화와 구별되는 묘화에서는 선 자체가 하나의 분야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선은 본래 면 주변에 또는 면 상호 간의 한계로서 이념적으로만 존재할 뿐 시각적인 현실 세계에는 전혀 존재하 지 않는다. 그러므로 재현적인 예술에 있어서까지 선은 항상 현실성의 단순한 상징적 표현 에 불과하다. 대상인 형태의 '표현'을 목적으로 하는 선에는, 대상을 외면으로부터 규정하는 패쇄적인 윤곽선과, 이를 내면에서 한정하여 부분적인 양성을 상징하는 선이 있는데, 이 모 두가 대상의 공간적 규정을 상징하는 재현적인 선의 기능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선의 기 능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선에는 내부 촉각, 특히 운동에 관한 재생감각을 매개로하여 감정이나 의욕이나 정취가 쉽사리 결합된다. 즉 방향, 속도, 힘, 장단, 굵고 가는 것, 소밀, 굴신 등의 기교에 의해 무한한 정신 표출이 가능하다. (이것이 선 예술이라고도 불리는 동 양화 필법론의 주가 되는 내용이었다.)이 의미의 선은 대상의 의미나 표상과 협동하거나, 또 는 그것과 완전히 독립하여 선을 유정화하거나 생명화한다. 따라서 이러한 선의 기능은 묘 화뿐만 아니라 채화에서도 가끔 나타난다. 특히 근대의 순 추상적인 회화에서는 이런 종류 의 선의 기능이 매우 적극적으로 이용되고 있다. 또 더욱 중요시되어야하는 선의 기능으로 는 선의 체감적인 단축에 의한 원근법의 효과나, 선의 농담, 단소그 굵고 가늘기 등의 수법 에 의한 색채 및 명암의 효과, 표현 등을 들 수 있다. 또 화면에 실제로 선이 존재하지 않는 다고 해도 그 면의 각 부위 사이에 자연히 일정한 시선 방향이 고정되고, 그것이 구도의 중 요한 구성요인이 되는 일은 매우 많다.

 

설치(installation)

'인스텔레이션'은 주로 미국의 미슐 잡지들이 전시된 작품의 구성을 보여주는 사진을 설명 하는 글에서 흔히 쓰던 말이다. 그런 말을 사용한다는 것은, 최근의 예술이 화랑의 특정한 공간이나 배치에 의존하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인스텔레이션 전시는 본래 일회적인 사 건일 뿐이므로, 작품 하나를 사진으로 보여준다고해서 작품과 주위 공간과의 본질적인 관계 가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인스텔레이션이란 말은 또한 작가가 주문하는 설계도에 따라 공 장에서 제조되는 미니멀 조각과 연관되는 산업적, 기계적인 의미도 지니고 있다.

 

세뤼지에 (Louis-Paul-Henri Serusier,1863?~1927)

프랑스의 화가. 파리에서 태어났다. 아카데미쥘리앙에서 공부한 뒤, 1888년 부르고뉴에서고갱을 만나 깊은 영향을 받고, 이듬해 드니·보나르·뷔야르 등과 함께 파리에서‘나비파’를 결성하고, 그 중심 인물이 되었다. 그의 회화에 대한 생각은 작품에서보다도 이론이 더욱 명확하므로, 오히려 이론가로서의 사 적 의의가 더 크다. 인상주의를반대하고 고갱의 사상을 이어받아 상징과 통합을 중시하였으며, 현대 회화로 이 어지는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하였다. 주요 저서로는《회화의 첫걸음》이 있다.

 

세베리니(Gino Severini)-(1883~1966)

세베리니는 춤추는 사람의 모습을 소재로 하여 형태를 역동적으로 분해함으로써 움직임을 표현하는 분할주의적 요소가 담긴 미래주의 탐구를 계속한다. 파리에서 오랫동안 거주했던 세베리니는 다른 미래주의자들 보다 더욱 밀접하게 큐비즘과 연관이 되어 있다. 초기에는 발라에게 배운 분활주의의 경향을 띤 작품성을 띤다. 제1차 세계대전 종전후 '질 서로의 복귀'라고 불리는 구상화 복구 움직임에서 주요 역할를 담당한 세베리니는 '전통적' 정신을 바탕으로 전통적 기법을 사용하는 사실주의 그림을 그린다. 겉으로 보기에 이해가 쉽고 단순해 보이는 그의 작품은 사실은 전통미술, 상징주의 미술, 프 리미티비즘, 순수파 미술등 다양한 경향을 섭렴하는 연구과정을 거친 후 수학적,기하학적 기 본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즐겁고 화려한 파리의 밤 풍경을 다룬 [발 타바린의 동적인 상형 문자] 에서 우리는 그의 예술관을 볼 수 있다. 이 그림의 구성은 크게 회전하고 잇는 곡선 안에 빠른 움직임을 부여 하는 큐비즘적 분할에 기초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밝은 색 옷을 입은 합창단원, 쉰 목 소리의 여가수, 높은 모자를 쓰고 외눈안경을 걸친 신사, 웨이터, 음식, 포도주, 깃발, 카니발 의 분위기 등은 우리에게 당시 화려한 도시의 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은 입체파의 격자 형태 속에 포함되어 있는 색채의 형태뿐만 아니라, 튀어나오는 볼 륨의 효과를 내는 조각적인 살붙임의 효과들, 큐비즘 회화와 콜라주의 모든 수법을 동원한 복잡한 화면을 구축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 저기 써넣어진 'Vaise' 'Polka' 'Bowling'등의 글자들과 소녀가 입은 옷에 달린 장식용 금속조각이 콜라주로 덧붙어져 있다. 색채는 인상 주의적인 신선함을 지니고 있는 색을 임의적으로 배분함으로서 야수파적인 대담함을 보이고 있다.

 

세베리니 (Gino Severini,1883~1966)

이탈리아의 화가. 코르토나에서 태어났다. 1909년 밀라노에서 보치오니 등의 미래파 운동에 참여하여 밀라노에서 ‘미래주의 선언’에 가담하고, 〈여행의 회상〉 〈물랭루주의 곰춤〉 등 미래파 작품을 발표하여 미래파의 발전 에 공헌하였다. 그러나 1910년경부터는 피카소의 입체파의 영향으로 미래파적 경향에서 벗어나 신고전주의 적 작풍으로바뀌었으며, 1914년에 들어서는 다시 추상적구성을 시도하였다. 그 뒤 파라초 몬테그포니(피렌체 근처)에서 프레스코화를 제작하면서부터 모자이크에도 흥 미를 가졌고, 작풍도마티스의 영향을 받아 장식적 경향이 강화되었다.

 

세븐 엔드 파이브(7+5) 추상 그룹 [7 and 5 abstract group]

1920년에 창설된 영국의 미술 단체. 단순히 7&5라고도 한다.7명의 화가와 5명의 조각가로 구성된 이 단체는 처음에는 seven and five society 라는 명칭으로 출발했으며,작품의 구상적이고 정적인 경향을 띠었다. 이 단체는 매년12명 회원 전원을 다시 선출하였으며 이것이 변화의 계기가 되어 1930년초부 터 추상적인 작업을 해 나갔다.그때부터 7 and 5 abstract group 으로 바꿔졌다. 1934년 가장 의욕적인 회원들로 구성되었으며 1935년에 최초로 영국 추상미술협회전을 개최 했다. 당시 벤 니콜슨,존 파이퍼,이본 히친지,헨리 무어,바바라 헤프워드 등 쟁쟁한 작가들로 구성되었다. 세잔 (Paul Cezanne,1839~1906) 프랑스의 화가. 엑상프로방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권유로 법과 대학에 입학하였으나그만두고 친구인 졸라의 권유로 파리의 아카데미 스위스로 학교를 옮겼다. 한때, 미술 학교 시험에 실패하여 실의에 빠지기도 하였으나, 1972년 피사로와 만나 다시 그 림에 전념하였고, 인상파 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초기의 작품은 인상파 작가로 접근해 가는듯한 느낌을 주었으나, 차차 인상파를 벗어나 독 자적인 화풍을 개척해 나가기 시작하였으며, 이 때의 작풍이 더욱 발전하여 후에야수파와 입체파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근대 회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동기가 되었다. 그는 20세기 회화의 참다운 발견자로 불리고있으며, 피카소를 중심으로 하는 입체파는그의 예술을 직접적으로 펼친 것이라 볼 수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목맨 사람의 집〉〈에스타크〉 〈카드놀이하는 사람들〉 〈목욕하는 여 인들〉 〈생트빅투아르 산〉 등이있다.

 

소묘(drawing)

밑그림이라고도 한다. 프랑스 어로는 건축의 도면, 도안 등의 뜻도 포함한다. 표현이나 형태 를 준비하기 위한 목적으로 주로 선을 사용해서 이미지를 그려내는 기술. 건축·조각·회 화·공예 등 모든 예술의 기초를 형성한다. 고대 이집트 공예가들은 질그릇 조각 위에 붓으 로 독자적인 스케치를 했다. 그러나 고대와 중세에는 스케치를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생각 하였고 또 이 당시에 널리 퍼져 있던 엄격한 관습이 예비 창조의 범위를 제한하였기 때문에 거의 그려지지 않았다. 중세에 소묘의 기능은 주로 공방용의 패턴 북(pattern book)으로 제 한되었다. 지오토 이후 자연주의의 발생은 좀더 복잡한 기술을 요구하였고, 14세기 이후 출 현한 최초의 독립적인 소묘는 흰색으로 강조점을 둔 해칭으로, 섬세한 모델링을 위해 바탕 칠이 된 종이위에서 행해졌다. 그 당시 사용되었던 다양한 소묘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그 것을 회화에 입문하는 '개선문'이라고 불렀다. 소묘가 예술 표현 수단으로서 최초로 독자적 인 위치를 확립한 것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예술에서였다. 그의 수많은 소묘들은 광범위 하고 풍부한 예술적·과학적 창조를 보여준다. 예비 스케치를 실험 분야로 본 그의 새로운 개념은 라파엘로에게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소묘의 발전은 18세기에 들어와 거장들의 위조 품 소묘가 나돌 정도로 수장가들의 수집 대상이 되기에 이르렀다. 19세기에 앵그르는 소묘 의 기능과 중요성을 강조한 화가였으며, 색채를 강조한 낭만주의자들과 인상주의자들은 소 묘를 좀더 부수적인 것으로 이용하였다. 선의 표현적인 특질에 관심이 있는 반 고호는 커다 란 갈대펜을 이용한 소묘로 새로운 기념비를 세웠다. 반면에 로댕은 20세기 소묘의 개념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 매우 대담한 소묘에서부터 모델의 움직임을 포착하기 위한 자유로운 기 법을 보여주었다. 이때부터 데스피오, 마이욜 등과 같은 많은 조각가들도 훌륭한 소묘를 제 작하였다. 20세기 거장들 가운데 마티스와 피카소는 독창적인 소묘를 남겼고 또한 클레는 독자적인 예술로서 도안에 새로운 차원을 부쳐하였다. 20세기의 소묘는 미국에서 나타나고 있는 추상화의 경향에 따라서 점점 주관적·내면적인 성격을 강조하고 있다.

 

소프트 아트(soft art)

현대 조각의 한 방향을 가리키는 양식적 개념으로, 연성조각(soft sculpture)이라고도 함. 조 각이 그 영원성을 보증하기 위해 나무, 대리석, 브론즈 등의 딱딱한 재료로 되어있는 종래의 고정적이며 보수적인 형식에 대해 연성재료를 사용함으로써(즉 영원성에 대한 무시를 드러 냄)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경향. 이 흐름의 출발은 1963년 클레스 올덴버스(Claes Oldenburg)의 <부드러운 타자기(soft typewriter)>로 연유되며 그는 이후에 비닐, 캔버스, 솜을 소재로 많은 작품을 만들었다. 올덴버그의 개혁은 살바도르 달리의 초현실주의 회화에 서 묘사된 연성 오브제(soft object)에 의해 이미 예시된 것이었다. 그의 동료인 존 체임벌린 은 폴리 우레탄 스치로폴로 작업을 했으며, 이후 비닐, 고무, 섬유유리, 라텍스, 깃털, 펠트, 플라스틱, 머리카락, 모래 등 부드러운 재료의 가능성에 도전하는 작가의 수가 늘어나면서 조각의 영역도 그만큼 확대되어 왔다. 몇몇 비평가들은 소프트 아트의 출현을 정통 조각에 서 보여지는 영속성의 허식과 소비재로써의 내구성에 대한 조롱적인 공격으로 해석하였다.

 

소호(SoHo)

뉴욕의 하우스톤 가와 커널 가 사이의 화랑 밀집 지대. 소호하는 명칭은 하우스톤 가의 남 쪽 (South of Houston)의 약어로, 원래는 공장 지대였다. 전후의 맨하탄이 국제 무역도시로 성장하자 무역상·일반 사무실·호텔 등의 수효는 급증했으나 공장들은 점점 필요없게 되어 문을 닫거나, 아니면 시설을 줄여 한두 층을 비우게 되어 뉴욕에서 집세가 가장 싼 지역이 되었다. 자연히 1950년부터 이 지역으로 가난한 화가들이 모여들었고, 60년대 초부터는 추상 표현주의가 팽창하면서 화랑들이 대형 작품들을 수용, 보관할 장소로서 소호의 창고가 적절 하다고 판단하여 하나씩 둘씩 모이기 시작, 급기야는 화랑과 예술인촌으로 변모했다. 이곳에서 재스퍼 존스·라우센버그·존 체임벌린·짐 다인·올덴버그·스텔라·로젠 퀴스 트·리히텐스타인·톰 웨셀만이 활동했고, 옵아트, 극사실주의, 개념미술, 미니멀 아트, 후기 모더니즘, 신인상주의, 신환상주의 등 미국적 뉴아방가르드라는 말로 묶을 수 있는 각종 현 대 미술의 조류들이 탄생했다.

 

솔거 - 率居 (?~?)

신라 진흥왕 때의 화가. 어려서부터 그림을잘 그렸으며 황룡사 벽에 그린 〈노송도〉에는 새들이 앉으려다가 부딪쳐 떨어졌으며,그 뒤 오랜 세월이 지나 다른 사람이 단청을하였더니 날아드는 새가 없었다는 일화가 있다. 그 밖에도 분황사의 〈관음보살상〉, 진주 단속사의 〈유마거사상〉 등이 있어 신이그린 그 림이라고 했다 하나 전하지는 않는다. 작자 미상의 《동사유고》에 의하면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그림에 열중하였으 나, 시골이라 스승이 없어 신령에게가르침을 청하여 꿈 속에서 단군으로부터 신령스러운 붓 을 받아 꿈 속에서 본 단군 화상을 1000여 폭이나 그렸다고 한다. 쇠라 George Seurat (1859 - 1891 / 프랑스) 1859년 프랑스 파리에서 출생한 화가. 19세 때인 1878년에 아망-장과 함께 국이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하여 앵그르의 제자인 앙 리 레망의 교실에서 배웠다. 그러나 이듬해에 자퇴하여 1년간 지원병으로서 브레스트 해안 에서 병역에 복무하였다. 그는 화학자 셰브뢸의 색채에 관한 저서를 일찍부터 읽었고 또 1881년경에는 들라크르와의 작품에 대해 색채 대비의 원리나 보색 관계를 연구하였다. 1883년 점묘화법에 의한 최초의 대작 '수욕'을 그렸다. 이 그림은 1884년의 관설 살롱에 출품하였으나 낙선되어 그해의 앵데 팡당전에 출품 전시됨에 따라 여러 가지 반응을 일으켰다. 이 무렵부터 그는 특히 시냑과 친교를 맺고 색채 이론의 실현에 몰두하였다. 1885년에 그린 '그랑드-자트의 일요일'은 그의 대표작이다. 이것은 완전한 분할 묘법에 의 한 것으로서 새로운 기법의 선언이었다. 이듬해인 1886년에는 피사로의 주장으로 시냑과 함 께 제8회 인상파전에 풍경 6점, 소묘 3점 및 '그랑드-자트 일요일'을 출품하였으나 후자와 같은 우수작도 당시는 흔히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신인상파 혹은 분할파의 대표자로서 그 후에도 '포즈를 취하는 여자들', '르샤유', '곡 마'등의 명작품을 남기고 1891년 31세로 요절하였다. 그러나 그의 노력의 결실은 후에 미래 파와 추상파 회화기법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쇠라 (Georges Pierre Seurat,1859~1891)

프랑스의 화가. 신인상주의 미술의 대표자. 파리에서 태어났다. 1878년 파리의 관립 미술 학교에 입학하여 레만의 지도를 받다가,다음해 군에 입대하여 브 레스트의 해안에서병역을 마쳤다. 1881년경 들라크루아의 작품의 색채 대비와 보색 관계를 밝힌 글을 발표하여 사람들의 관심 을 모았다. 그의 작품은인상파의 색채 원리를 과학적으로 체계화하고 인상파가 무시한 화면의 조형 질 서를 다시 세운 점에서 매우 의의가 있으며, 세잔과더불어 20세기 회화의 새로운 장을 열었 다. 전염성 후두염으로 32세의 나이로 파리에서죽었다. 주요 작품으로는 〈그랑자트 섬의일요일 오후〉 〈포즈를 취한 여인들〉 〈기묘한 춤〉 〈화장하는 여인〉 등이 있다.

 

쇠라 George Seurat (1859 - 1891 / 프랑스)

1859년 프랑스 파리에서 출생한 화가. 19세 때인 1878년에 아망-장과 함께 국이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하여 앵그르의 제자인 앙 리 레망의 교실에서 배웠다. 그러나 이듬해에 자퇴하여 1년간 지원병으로서 브레스트 해안 에서 병역에 복무하였다. 그는 화학자 셰브뢸의 색채에 관한 저서를 일찍부터 읽었고 또 1881년경에는 들라크르와의 작품에 대해 색채 대비의 원리나 보색 관계를 연구하였다. 1883년 점묘화법에 의한 최초의 대작 '수욕'을 그렸다. 이 그림은 1884년의 관설 살롱에 출품하였으나 낙선되어 그해의 앵데 팡당전에 출품 전시됨에 따라 여러 가지 반응을 일으켰다. 이 무렵부터 그는 특히 시냑과 친교를 맺고 색채 이론의 실현에 몰두하였다. 1885년에 그린 '그랑드-자트의 일요일'은 그의 대표작이다. 이것은 완전한 분할 묘법에 의 한 것으로서 새로운 기법의 선언이었다. 이듬해인 1886년에는 피사로의 주장으로 시냑과 함 께 제8회 인상파전에 풍경 6점, 소묘 3점 및 '그랑드-자트 일요일'을 출품하였으나 후자와 같은 우수작도 당시는 흔히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신인상파 혹은 분할파의 대표자로서 그 후에도 '포즈를 취하는 여자들', '르샤유', '곡 마'등의 명작품을 남기고 1891년 31세로 요절하였다. 그러나 그의 노력의 결실은 후에 미래 파와 추상파 회화기법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수채화(water-color painting)

물에 용해되는 매재(일반적으로는 아라비아풀)와 혼합된 안료로 그린 회화를 가리키는 용어. 서양 회화의 여러 양식 중에서 유화와 대응되는 용어다. 수채화의 용도는 광법위하며 시대 를 거듭함에 따라 폭이 넓어졌다. 고대 이집트의 파피루스 두루마리 그림, 동양의 수묵화나 담채화 그리고 중세 유럽의 도판 필사본에 그려진 장식화도 수채화의 범주에 속한다. 보다 특정한 의미에서의 수채화는 과슈, 템페라, 미니아튀르처럼 다른 재료와 물을 함꼐 쓴 그림 들과는 다르다. 갈색 미스터 물감이나 오징어 먹으로 된 엷은 색조의 세피아 등의 단색조 도료가 유럽 미술 가들에 의해 17세기의 펜 소묘화에서 인물 묘사나 풍경 묘사를 위해 쓰여졌으며, 클로드 로 렌느와 렘브란트는 이 방법으로 탁월한 효과를 거두었다. 또한 네덜란드 소수 풍경화가들은 공간의 느낌, 원거리와 대기의 인상을 놀라울 만큼 성공적으로 표현했으며, 이런 효과는 모 든 색깔을 구사하기보다 단색조를 통해 훨씬 쉽게 달성되었다. 뒤러와 반 다이크 등의 화가 들에 의해서 시도된 예가 있지만, 대체로 18세기 말 이전의 수채화에서 다양한 색채를 구사 하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수채화의 획기적인 발전은 18세기와 19세기 초의 영국에서 일어 났다. 단색조의 바탕에 일정 범위의 수채화는 네덜란드의 전통으로부터 광선과 대기의 자연 스러운 효과를 잘 이어받았다. 이러한 양상은 18세기 중기 이래 폴샌드비이 작업에서 절정 에 도달했다. 토포그래피(지역의 풍토에 맞는 기법)는 계속해서 토머스 허언, 마이클 안젤로 루커, 토머스 맬튼과 같은 영국 수채화가들의 주된 관심이 되었다. 1802년 요절한 거틴은 단 색조와 결별하고 색채가 가미된 매체를 자유분방하면서도 직접적으로 아무런 밑그림 없이 사용하고, 광선 효과를 위해 화폭의 흰 표면을 여백으로 남기거나 아주 엷은 색조로 처리하 였다. 터너는 50년 동안 이 기법을 바탕으로 작업하였다. 수채화의 새로운 기법은 콘스터블 에 의해 개척되었다. 낭만주의 정신과 밀접하였던 그의 참신한 접근 방법은 수채화의 전반 적인 성격을 변화시킬 수 있었다. 여러 가지 물감을 사용함으로써 미술가들은 색채 범위를 넓힐 수 있었고, 초상화를 제외한 모든 영역의 영국 회화에 수채화를 활용하게 된 것은 1804년 '올드 워터 컬러 소사이어티(Old Water-Color Society)’가 창립됨으로써 활발해졌 다. 낭만주의 운동에 가담하였던 몇몇 외국 미술가들, 특히 카를푀르는 수채화가 공감을 주 는 매체이며 수채화의 쉽게 마르는 성질이 야외 스케치에 적합함을 발견하였다. 20세기 초의 수년 동안 영국에서는 수채화는 많이 활용되었고(윌슨 스티어, 존 내쉬, 폴 내 쉬), 20세기 후반에도 계속해서 쓰이고 있다.(그레이엄 서덜랜드, 존 파이퍼). 신인상주의 시 대 이후엔 수채호가 부차적인 기법으로 밀려났지만, 유럽 대륙에서는 보다 대중적으로 세잔 느, 시냑, 뒤피 등에 의해 활용되기도 했다.

 

수틴(Chain Soutine)-(1893~1943)

리투아니아출신의 프랑스 화가. 격정적인 형태와 긴장된 터치로 불안감을 표현했다. 빌나의 미술학교에서 잠시 공부를 한 후, 18세의 나이로 파리- 몽파르나스에 정착한다. 그 곳에서 샤갈, 립시츠, 모딜리아니와 친분을 맺게 된다. 미술학교를 다니면서 그는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특히 렘브란트와 샤르뎅, 세잔느 에 매료된다. 수틴의 최초의 정물화는 자연주의 경향을 띠고 있다. 1917-18년부터 그가 특징적으로 사용 하는 빨강, 청록, 흰색을 작품에 도입하기 시작한다. 1920년경에 수틴은 전격적으로 처절할 정도의 강력한 표현주의로 기울게 되는데. 절친했던 모딜리아니가 1920년경 세사을 떠나자 이 경향은 더욱 두드려져 남불의 도시 세레에서 나무 와 집이 뒤엉켜진 혼란하고 분절된 리듬을 보이는 격한 풍경화를 그린다. 1923년에는 미국인 미술품 수집가 앨버트 반즈가 폴 기욤의 소개로 수틴의 작품을 구입한 다. 이로써 수틴은 유명해지게 되고 가난에서도 벗어나게 된다. 1925년 경에 발표한 '가죽을 벗긴 소' 나 '털뽑은 닭' 연작은 샤르뎅과 렘브란트에게서 받 은 영향을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미술애호가인 카스탱부부를 만나게 된 수틴은 샤르트르 근처 레브레에 있는 이들의 성에서 지내면서 작품을 하기로 하는데 특정한 주제와 특정한 색채가 관련되는 작품들이 이때 나온 다. 의지할 곳 없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을 갖고 있던 그는 감동적인 어린이들의 모습을 그리기 도 한다. 1930년대에 들어 과거의 거장들 (크르베,렘브란트, 코로 등) 의 작품을 자기나름대로 재해 석한 그림을 그리는 작업을 한다. 그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함과 함께 다시 1920년경에는 세레에서 그렸던 것과 같이 고통으 로 가득한 작품을 그려 불안정한 세상에 처한 그가 느끼는 고뇌를 다시 표현하게 된다. 주요 작품 : 가죽이 벗겨진 소, 오스카 미챠니노프 등

 

순수미

미학상의 용어. 대체로 미적인 것을 넓은 의미의 미라고 할 때, 미적 범주의 하나로서의 좁 은 의미의 미를 가리킨다. 근대 예술이 특정 표현을 추구하게 되면서 미의 개념만으로는 부 족해 미와 숭고를 대립시키기 위해 순수미를 제창하게 되었다. 순수미는 미적인 것의 특성 이 가장 강하게 나타나는 것으로 그것을 이상미와 동일시하는 입장이 있으나 순수란 결코 가치 개념이 아니며, 순수미를 이상으로 하는 것은 하나의 입장에 지나지 않는다.

 

순수영화

독일의 절대영화와 같은 시대에 프랑스에서 크게 부흥했던 전위영화운동으로 레제, 달리를 위시하여 많은 화가들이 협력했다. 그것은 무성영화 중기에 주창되었던 소련의 몽타주 이론 이 프랑스에서는 레옹 무시나크, 제르멩 뒤라크 등에 의해 주로 시각적 리듬을 중심으로한 포토제니론이 되었고, 순수영화는 이것에 입각하여 감각적인 미와 형이상학적인 관념을 표 현하려고 한다. 절대영화에서 보이는 추상적 형태나 빛의 효과에 화면을 한정시키는 것에 그치지 않고, 다소의 재현적 요소를 가진다. 무엇보다 설명적인 기법, 문학적인 제재를 부정 하고, 순수하게 시각적 표현만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이 특징이다. 레제의 <기계적 무용>, 앙 리 쇼메트의 <반사와 속도의 유희> 등이 대표적인 것이다. 순수영화는 당시 발흥하던 초현 실주의 운동에서 큰 영향을 받았으며, 만 레이, 달리 등의 협력에 의해 전위영화의 주류가 되었다

 

순수주의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시기에 한때 강한 영향력을 지닌 미학운동. 그 출발점이 된 것은 1918년 아메데 오장팡과 에두아르 잔느레(르 코르뷔지에)의 공저인 <입체파 이후>였고, 1919년 창간된 잡지<에스프리 누보>(1925 폐간)는 그 이론의 주요 발표 무대였다. 이들은 입체파가 세운 미학을 이어받고, 이것을 더욱 순화하여 쓸데없는 장식성이나 과장을 일체 거부한 간결·명확한 조형 표헌을 주장하였다. 즉 그것은 기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는 것을 목표로하여 쓸데없는 장식을 모두 배제한 기능주의의 미학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론은 회화뿐만 아니라, 건축·조각·공예·음악·연극의 분야에도 깊은 영향을 주었다. 르 코르뷔지에의 근대 건축사상은 여기서부터 전개된 것이다.

 

쉬포르 쉬르파스

쉬포르 쉬르파스 1970년대에 프랑스에서 결성된 전위적인 미술 단체.쉬포르 쉬르파스란 '버팀 표면'이란 뜻 으로 캔버스에 대한 상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즉 '쉬포르'는 회화에서의 지지재를 뜻 하고 '쉬르파스'는 화면을 가리킨다. 따라서 그들은 회화를 제작하는 방법에 의해서 구조에 의 새로운 탐구, 누보 레알리슴과 같은 반예술적인 전위주의의 추방, 미술의 파리로의 집중 화 분쇄 등을 구체적인 목표로 내세워 회화로써 실천하고 있다. 그러므로 회화를 인식의 대 상으로 대하기 이전에 회화를 둘러싸고 있는 상업적 또는 회화적 불순 요소를 제거시키고자 노력한다. "회화를 혁명하고 혁명을 그리는 것"이라는 마르크 드바드의 표현에서도 드러나 듯이, 그들은 마르크시즘과 모택동의 유물변증법까지 원용하여 회화에서 정치·경제적 시스 템을 혁신해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캔버스의 나무틀을 떼어버림으로써, 종래의 화포에 대한 고정 관념을 바꾸었다. 그리고는 이렇게 틀이없는 물질로서의 화포를 장대로 받쳐걸거 나, 상 위에 펼쳐 놓거나, 직물처럼 접어서 개어놓음으로써 회화와 직물 도안과의 구별을 애 매하게 만들었다. 또 회화를 신화화하는 서명·제작일자·타이틀 등도 일체 포기해 화포의 중성적 성격을, 오브제화하고 있다. 이 그룹의 주요 작가로는 마르크 드바, 로이 칸, 뱅상 비 울레, 다니엘 드죄즈, 패트릭 세투르, 앙드레 발랑시, 클로드 비알레 등이며, 비평가 마르술 랭 플레네가 이론적인 뒷받침을 하고 있다. 쉬포르 쉬르파스가 미술 오브제(회화)를 되돌려 놓은 것은 개념미술에 대한 반동이라 할 수 있으며, 정치적으로 편향된 작가들이 미술 작품 제작 대신에 데먼스트레이션으로 치우치는 경향에 대한 반발이다. 놀라운 것은 이 그룹이 전혀 정치적인 주제를 다루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의 이론이 얼키고 설킨데 비해 작품은 단순하고 온화하며 장식적인 추상이 대부분이다. J. L.페리어는 쉬포를 쉬르파스 화가들을 비난했는데 그 이유는 이들의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한 이해가 표면적이며 또 이들이 계 급투쟁의 직접적인 가치가 될 예술작품을 제작하기보다는 무계층 미술이라는 부르좌 이념아 래 작품을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스테인 페인팅(stain painting)

1952년 잭슨 폴록의 드립 페인팅에서 자극을 받은 미국 미술가 헬렌 프랑켄탈러가 표면처리 가 되지 않은, 캔버스 위의 가벼운 얼룩이나 반점을 이용하여 그린 회화 기법. 2년 후 모리 스 루이스는 프랑켄탈러의 화실을 방문했다가 깊은 인상을 받고서 자신의 양식을 변화시켜 얼룩저 기법을 차용하였다. 1950년대 말과 1960년대 초의 루이스를 비롯한 케네드놀런드, 쥴 올리츠키, 폴 젠킨스 같은 미술가들의 스테인 페인팅 기법은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스테인 페인팅 화가들은 표면 처리가 되지 않고 주름이 펴지지도 않은 면 즈크 캔버스에 희 석된 아크릴 도료를 사용하였다. 표면 처리되지 않은캔버스는 다양한 구성을 창출해낼 정도 로 겹치거나 주름이 잡히곤 하였다. 완성 단계에 이르러 캔버스의 주름은 펴지게 되는데, 이 것은 스테인 페인팅 화가들에게 위치 안배의 문제, 즉 화면 이미지와 액자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연관시키느냐 하는 문제를 제기하는 과정과 다름없게 된다. 희석된 도료는 천 속으 로 스며들고 이에 따라 스테인 페인팅은 전통적인 유화보다는 염색된 천과 비슷해 보인다. 얼룩진 안료는 캔버스 표면위의 외피가 아니라 착색된 과일 표피처럼 물체의 일부와 다름없 다. 따라서 스테인 페인팅은 자체의 색채가 겉으로 보기에 실체가 없는 것처럼 드러나게 함 으로써 도료 질감이나 자연 광택의 느낌을 전혀 갖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표면의 반사 현 상이 전혀 존재하지 않게 되고 그림은 넓은 시각에서 보여질 수 있게 된다. 자신의 몇몇 작 품에서 루이스는 그림의 도형과 배경의 융합 상태를 달성하는 반투명 장막의 형태의 색채를 산출하는 연속적인 파동의 도료를 응용하였다. 여기서 그림의 전경과 후경은 더 이상 각기 별도로 격리된 실체들로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스테인 페인팅은 상당히 '자동기술적인' 제작 양상을 띤다. 미국의 비평가들이 지적한 스테 인 페인팅의 강점은 다음과 같다. 손이나 팔의 움직임이 전혀 구사되지 않으므로 화가는 전 통적으로 붓을 갖고 그림을 그리는 행위와 그림의 선이 함축하는 속성으로부터 해방된다. 도료의 얼룩진 부위는 순수한 색채로 존재하고 색조의 변화를 기하는 문제는 초월된다. 스 테인 페인팅은 그 제작 과정이 적나라하게 기록되는 회화이며, 따라서 회화의 구조와 제작 과정이 결합되어 있다. 그러나 비록 얼룩진 화면이 시각적으로 매력적일지라도(이런 점에서 스테인 페인팅은 '새로운 유미주의'에 매료당한 것은 아니다. 몇몇 비평가는 스테인 페인팅 의 미를 '결함을 감추는 화장과도 같은 것'으로 파악하였고, 해롤드 로젠버그는 스테인 페인 팅의 색채 흡수의 특성을 비판하며 거기에서 청결함과 편안함이라는 중산층의 가치가 확인 된다고 주장하였다

 

스푸마토

'연기'라는 뜻의 이탈리아어에서 유래된 용어. 회화에서 "공중에서 사라지는 연기같이" 색깔 사이의 경계선을 명확히 구분지을 수 없도록 부드럽게 옮아가게 하는 수법. 바자리에 의하 면 15세기 초 대가들의 특징인 '지나치게 뚜렷하고 거친 윤곽을 부드럽고 아름답게 하는 능 력'을 지닌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죠르지오네에 의해 처음으로 도입되었다.

 

시각 언어(language of vision, Visual language)

지외르지 케페시의 <시각의 언어>(1944)에서 나온 용어이다. 이 책은 새로운 조형 원리를 주장하고 있는데 여기서 시각 언어란 시가겡 호소해 의지를 소통시키는 언어라는 뜻이다. 이 사고 방식은 근대적인 조형 예술의 일반 개념으로, 이전부터 존재해 왔지만 비로소 그에 의해 명확한 규정이 내려지게 되었다. 시각 언어의 종류는 조형 예술·영화·사진·텔리비 전 등 인간의 시각에 의한 생활이나 경험을 재현한 것으로, 이것들을 구성하는 각각의 요소 가 시각어이며, 이 조형요소인 시각어에서 시각 언어가 성립된다고 주장했다. 상업 디자인에 서도 이런 사고 방식이 중요시되고 있다. 시각 예술 탐구그룹 1960년 르 파르크의 제창으로 결성된, 파리에 머물고 있던 케네틱 아트 작가 그룹. 회원은 가르시아 로시, 프란시스코 소브리노, 조엘 스타인, 프랑스아 모를레, 이바랄을 포함한 여섯 명이다. 객 회원의 자유로운 연구를 모아서 보다 고차원적의 그룹 활동에 활용하고 종래의 관람자와 분리된 작품이라는 고정 관념을 극복할 것을 목표로 출발해, 1961년 파리 비엔날 레에서 관객의 참가를 전제로 하는 <미로>를 공동제작 발표하였다. 이들은 주로 반사경, 알 루미늄, 비닐, 아크릴, 플라스틱 등의 공업재를 재료로 모빌이나 회전하는 작품 등을 구성하 여 거기에다 다시 빛을 주어서 난반사의 효과를 내게 했다. 이와 같이 키네틱한 것과 옵틱 한 것을 결합시킴으로써 이 그룹이 추구하는 바는 관람자를 새롭고 직접적인 상황 속에 이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1968년 4월 마그 미술뮨화재단에서 열린 '살아 있는 예술전'에서는 빛 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관객을 금속에 의한 정글로 이끌어들였다.

 

시각 커뮤니케이션(visual communication)

전통적인 미술 교육 과목인 소묘, 유화, 수채화, 레터링 등과는 별도로 광고, 텔리비전, 사진, 영화, 만화, 일러스트레이션, 인쇄 등에 관련된 과목이 시각 커뮤니케이션에 관련된다. <영 역없는 미술>의 편집자들이 지적한 바와 같이, 이 용어는 때때로 그래픽 디자인이라는 용어 의 대용어로써 사용된다. 독일에서는 한스 M. 엔첸스베르거가 처음 사용하였고 <미학 커뮤 니케이션>(프랑스 크푸르트에 있는 실험 예술 및 미학 연구소(Institute for Experimental Art Aesthetics)에서 발간)등과 같은 잡지에서 1970년 이후 사용하고 있는 'VIsuelle Kommunication'이란 용어는 정치적 사항들에 대한 대중의 인지 수준을 높이는 것과 관련된 학문을 연구하는 분야를 지칭한다

 

시각 혼합(optical mixtures)

인상주의의 화가들이 개발했던 회화 기법의 하나. 신인상주의의 색채이론에 따르면, 녹색과 같이 밝은 2차색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두 개의 원색, 즉 청색과 황색의 작은 점들을 병치하 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청색과 황색의 작은 점들은 아주 밀접하게 뒤섞인 것이지 실제 혼색이 된 것은 아니다. 이렇게 해서 결합된 2개의 원색은 회화에서 적당한 거리감을 두고 감상할 경우, 감상자의 눈 속에서 혼합되어 팔레트에서 실제로 물감을 혼합해서 그리 는 것보다 훨씬 명확하고 밝은 녹색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신인상주의 화가 들은 회화를 모두 색의 작은 반점으로, 그것도 스펙트럼의 7색이나 또는 이에 백색만을 혼 합해서 그렸다. 또 그림의 크기나 감상되는 거리에 따라서 반점의 크기를 여러 가지로 변화 시키기도 했다. 그것은 감상자의 눈 속에서 혼색 현상이 행해지는 데는 항상 거리가 문제이 기 때문이다. 신 인상주의자들은 점묘주의란 말을 꺼려서 자신들의 기법을 분할주의라고 불 렀다. 그들은 한 가지 색 이상의 다른 음영이나 색조를 병치해서 그리는 등, 기존의 여러 가 지 기교를 써서 색의 밝기나 반짝이는 미광의 효과를 강조했던 것이다. 그들은 시각상의 회 색도 고안해냈는데, 그것은 흑색 물감과 혼색을 해서 얻는 회색보다도 뛰어나다고 주장했다. 이런 여러 가지 회색은 인상주의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것으로, 그들은 이론상으로 자 연에 있어서의 흑색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시냑 Paul Signac (1863 - 1935/프랑스)

1863년 파리에서 출생한 프랑스 화가. 양친은 그가 건축가로 되기를 희망했으나 그는 1880년 모네의 개인전을 관람하면서 깊은 감 명을 받고부터 그것이 주된 동기가 되어 화가로서의 길을 지망하였다. 모내와 서신 교환을 하면서 주로 인상파적 기법에 관해 조언을 받았고 또 기요맹의 격려도 받았다. 1884년 제1 회 앵데팡당전에 출품하여 거기서 크로스롸 쇠라를 만나 친교를 맺었다. 그리고 인상파의 팔레트를 버리는 반면 쇠라의 과학적 점묘주의를 채용하여 스펙트럼의 일곱 색체만으로 그 릴 의향을 굳혔다. 이리하여 그는 쇠라와 함께 신인상주의의 지도자 및 대표자가 되었다. 강 이나 바다 경치 특히 프랑스의 항구 풍경을 즐겨 그렸다. 1892년경부터 기법에 변화가 생겼다. 즉 점묘를 그만 두고 방형의 모자이크식의 작은 필치 를 보여 주면서 격렬한 색체 조화를 지향하였던 것이다. 1900년 이후에는 수채화도 많이 제 작하여 남겼다. 재능은 쇠라 뒤지 지만 1898년 이후 앵데팡당의 회장에 피선되었고 또한 인 상파의 기법을 더욱 과학적으로 다듬어 가면서 쇠라와 함께 신인상파의 전개에 이론가, 실 천가로서의 눈부신 활동으로 신회화 운동의 지도에 임하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느 엄격한 구 성과 명암의 효과 등 전통적인 회하 기법을 재차 회복하려고도 했다. 저서 [외젠 들라크르와에서 신인상주의까지/1891]는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이론적 해명서 이다. 이밖에 [용킨드 연구], [회화에 있어서의 주제]등의 연구서도 저술하여 남겼다.

 

시네티즘(Cinetisme)

미래주의에서 시작된 역동성의 미학과 움직임이라는 새로운 조형 요소를 가지고 제작된 과학과 예술을 접목시킨 종합적 성격의 테크놀로지 미술. 일반적으로 키네틱 미술이라고 하 나 시네티즘은 동력이나 중력에 의해 실제 움직이는 작품에 국한된 키네틱아트와 평면의 잠 재적 움직임을 보여주는 시각 현상탐구의 옵아트까지 포함된 포괄적 의미의 미술사조이다. 네온이나 전기의 빛 등 새로운 기술과 재료를 도입한 시네티즘의 입체적 추상화 작품에서 추상미술의 또 다른 가능성을 읽는다.

 

시뇨렐리 (Luca Signorelli,1450?~1523)

이탈리아의 화가. 코르토나에서 태어났다. 프란체스카의 지도를 받아 공간 투시도법, 인체 단축법, 명암 손질 등을 익혔다. 또한, 피렌체파 화가들의 영향을 받았는데, 특히 폴라이우올로에게서 인체의 동적 표현을 배 우고 그것을 더욱 발전시켜 인체에 의한 정신의 표현으로까지 나아갔다. 밀라노의 브레라미술관에 있는 〈그리스도의 채찍질〉과〈마돈나 델 라테〉의 두 작품은 스 승들의이질적인 예술 세계를 조화시킨 것이지만,바티칸 궁 시스티나 예배당의 벽화 〈모세 의십계〉에서는 폴라이우올로적인 조형성이 한층 더 뚜렷하게 나타났다. 그 밖의 작품으로는 〈세계의 종말〉 〈최후의 심판〉 등이있다.

 

시스테믹 페인팅(systemic painting)

조직회화 또는 체계 미술로 번역되며 로렌스 알로웨이가 1966년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조직 한 전시회에 붙인 명칭에서 유래한 말. 알로웨이는 "이미지의 전개는 예술가 자신이 세운 규범으로써 하나의 체계를 구상하며, 관객은 그것을 작품 속에서 충분히 보아 경험저으로 배우게 된다. 그래서 체계는 예술 작품에 접근하게 되는 수단이다"고 주장하고 특히 후기 회화적 추상 경향에 있어 형태의 반복이 곧 체계를 구성하며 이미지를 산출하는 직접적인 요인임을 지적하였다. '시스티 매틱'과는 달리 '시스매틱'이란 보통 '전신적'이라는 의미로 쓰이는데, 여기서는 '하나의 시스템, 플랜에 따라 배열 또는 제작되다'라는 뜻이다. 폭발적인 자기 표현을 억제하고 엄격한 규칙을 스스로에게 부과해 그리는 경향을 갈쏛리킨다. 미니멀 아트에 가깝지만 포함되는 작가의 폭은 좀더 넓다.

 

시카고 파(Chicago School)

1880년경부터 1900년경까지 시카고를 중심으로 상업적인 고층 건축의 발전을 위해 활동했던 건축가들의 집단. 이미 이들은 순수예술의 형식주의의 속박에서 해방되었으며, 건축 자재로 는 최초로 철을 사용했고 새로운 재료와 공법을 이용해 건축에 새로운 미학적 형태를 발전 시켰다. 1868년 구조기술자 제니(William Le Baron genny)는 <건축의 이론과 실제>를 출 간, 철골조로 된 고층 빌딩의 가능성을 설명한 바 있었다. 1789년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1세의 제1제정을 거쳐, 1852년 제2공화정까지 프랑스 미술 을 주도했던 대표적인 사조로서 신고전주의, 낭만주의, 사실주의를 꼽는다. 이 세 양식은 유럽 다른 나라에 있어서도 시민 사회의 성립과 발전에 보조를 맞추어 비슷한 양상을 보이며 전개되었다. 이에 따라 유럽을 중심으로 한 19세기 미술을 대개 이 세 가지 의 사조로서 설명한다.

 

신고전주의

산업 혁명과 대혁명이라는 커다란 두 가지 역사적 사건 속에서 유럽의 19세기는 새로운 시대로 탈바꿈하게 된다. 구세대의 전통과 인습을 사수하려는 보수, 기득권 세력과, 압제와 비인간적인 착취에 항거하려는 진보적 세력과의 대결은 프랑스 대혁명을 그 시발로 끊임없이 지속되며 가열되었다. 19세기초의 프랑스 지식인 계급과 예술가들은 이탈리아 폼페이의 발굴에서 자극되어 고대 그리스 로마 고전 연구에 열중하였으며, 또 독일의 미학자 빈켈만의 저서 '고대 미술사'가 때마침 출간되어 널리 읽혀지고 있어, 이러한 고전 열풍은 르네상스 이후 다시 한번 되살아 나게 되었다. 시민계급 또한 고대 예술에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그들의 관심은 궁정의 그것 과는 다른 것이었다. 이 시대의 민중은 그들 자신이 이상(理想)으로 여기는 공화정치가 고대 그리스, 로마에서 행해졌다는 사실에 깊은 공감을 느끼고, 여기서 그 들이 목적하는 정치적 이상을 발견하려고 했다. 그리고 당시의 예술적 이상까지 도 그들이 본보기로 삼고자 한 그리스, 로 마와 르네상스 시대에서 찾고자 했다. 이와 같은 고대 지향의 밑바탕에는 로코코 미술의 방종하고 향락주의적인 내용이나 감각적 양식에 대한 비판과 반성이 있었다. 반 로코코 정신에 기반을 둔 신고전주의 양식은 프랑스 혁명 미술의 양식으로 공식 채용되 었다. 이와 같은 시민사회의 요구에서 등장하게 된 신고전주의는 혁명적 시민 사상과 감정을 표출 하는 예술 방식으로서 조형예술의 전반에 걸쳐 유럽 대륙과 영국 등지로 파급되었다. 신고전주의 미술은 나폴레옹 집정 시대에 이르러 제정 양식 으로 변하게 된다. 이 시기의 건축과 실내 장식은 초기의 고대 풍의 간결한 장식성을 잃고, 제국의 영광을 과 시하는위압적인 분위기로 탈바꿈한다. 이는 나폴레옹이 고대 로마의 황제를 동경, 모방하고 있었기 때문인데, 그리스에 대한 고고학적인 관심은 줄어 들고 대신에 로마제국의 황실 양 식이 크게 유행하게 된다. 이 사조의 최고의 화려한 결정체가 다비드의 회화이다. 다비드는 공화당 당원이자 나폴레옹 시대에는 궁정 화가로서, 혁명 사상에 충실한 혁명가이면서 당시를 대표하는 대가였다. 이와 같은 그의 신고전주의 예술은 제자 앵그르, 프르동, 제롬 등의 화가에서 전통적 경향을 그대로 완성시켜 나간다. 신고전주의 로코코와 후기 바로크에 반발하고 고전 고대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함꼐 18세기 말부터 19 세기 초에 걸쳐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 전역에 나타난 예술운동. 역사적으로는 18세기 중 반에 이루어진 폼페이와 헤라크레눔의 발굴이나 동방 여행에 의한 그리스 문화의 재발견 등 이 계기가 되었다. 프랑스 대혁명 전후 이러한 고대에 대한 동경이 사회 전반을 풍미하고 있었다. 고대의 유물과 예술품들을 소개하는 학자들이 쏟아져 나왔으며, 카일루스의 <고대 이집트, 에트루리아. 그리스, 로마, 갈리아 지방의 유럽 목록집>(1752∼67)이나 피라네시의 <로마의 위대성>(1751),<로마의 유적>(1756) 등은 그중 대표적인 것들이다. 이 운동의 미학적 근거를 이룬 사람은 독일의 예술사학자 빈켈만이며, 대표적 예술가로는 화가 멩스를 들 수 있다. 그는 이 운동의 본부격이라고 할 만한 로마에서 자신의 스튜디오 를 만들어 이 새로운 이념을 전파하는 국제적인 사교장으로 사용하였다. 중도적인 입장의 화가임에도 불구하고, 멩스는 자신의 명성은 라파엘로, 코렛지오, 티티안 등 대가들의 수법 을 사용하고 조용한 단순성과 고귀한 위풍이 적절히 표현된 고대의 모범들 - 아폴로 벨베 데레, 라오콘 등 - 의 제반 요소들에 기초해 이른바 그랜드 매너를 추구한 덕분이라고 말했 다. 그러나 실제 조각에서는 멩스 자신의 작품 <파르나수스>(로마,1761)라든지 그의 절친한 친구들 - 가뱅 해밀튼, 요셉-마리 비엥 등 - 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무미건조하 고 인공적인 양식들이 등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들은 빈켈만 - <그리스 회화와 조각에 있어서의 모방에 관한 연구>(1755),<고대 미술사>(1964) 등의 주용 저작이 있음 - 의 사상 과 이론에 영향을 받은 바가 컸다. 멩스와 마찬가지로 빈켈만도 현대 예술은 모름지기 고대 의 조각이 이상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바와 자연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동시에 고 대 예술에서 발견되는 도덕적 품성, 즉 명성을 구하는 모든 예술가들에게 기본적으로 필요 한 도덕적 품성을 특히 강조했다. 프랑스에서의 신고전주의 운동은 로코코 양식의 번잡스러움에 대한 일종의 반발, 루이 14세 시기의 그랜드 매너에 대한 향수, 푸생의 고전주의에 대한 회귀 등이 복합적으로 나타났다. 그러면서 강한 도덕적 합의도 함꼐 이루어졌다. 또 사회의 제반 혁명적 변화나 시민 사회의 삶속에 '고대 로마적' 덕성들을 세워보고자 하는 욕구 등이 이 운동과 관련되어 있다. 대표 적인 화가로는 대혁명 당시 철저한 공화주의자로 나중에 나폴레옹의 총애를 받았던 자크 루 이 다비드가 있으며, 그의 작품<호라티의 맹세>,<소크라테스의 죽음>,<브루투스와 그의 죽 은 아들>등은 신고전주의 정신을 잘 드러내보이고 있다. 신고전주의는 건축에서도 충분히 발현되었는데 영국의 아담 형제, 독일의 랑한스, 프랑스의 장-프랑스와 샐그랭, 알렉산드르 테오도르 브로냐르, 클로드 니콜라스 르두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조각가로는 이탈리아의 카노바와 토발트센 등이 활발하게 활동했다. 신고전주의 운동은 미국으로도 건너가 조각가 히램 파워스, 호레이쇼 그리너프, 화가 존 반델린 등이 등 장했다. 신고전주의는 고대의 모범들을 신중하고도 의식적으로 모방한다는 점에서 그전에 간헐적으 로 일어났던 고전 부흥 운동과는 사뭇 다르다. 그것은 19세기에 일어난 '신그리스 (Neo-Greek)’운동과도 다른데 와냐하면 그리스 정신을 얘기하는 여타의 저작들이 사실은 거의 모두 후기 헬리니즘과 로마의 복제품들로부터 기인되고 있기 때문이다

 

신사실주의

1960년대 초에 프랑스를 중심으로하여 등장한 유럽에 있어서의 새로운 경향의 전위 미술 운 동. 당시 유럽과 미국의 지배적인 회화 조류이던 앵포르멜 미술, 추상표현주의, 타시즘 등 일련의 추상 미술에 대응해서 일어났다. 신사실주의는 공업 제품의 단편이나 일상적인 오브 제를 거의 그대로 전시함으로써, '현실의 직접적인 제시' 라는 새롭고 적극적인 방법을 추구 했던 예술이라는 점에 특색이 있다. 이 방법은 신사실주의의 가장 주요한 이념으로, 이브 클 랭의 비물질화 사상에서 발전한 것이었다. 즉 공업화된 사회를 현대의 자연으로 보아, 그 속 에서 생산되는 물체를 무매개적으로 제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사실주의의 중심이 된 사람은 프랑스의 비평가 피에르 레스타니로서 그는 1960년 4월 밀 라노의 아폴리네르 화랑에서 제1회 선언을 발표하고, '누보 레알리스트전'을 개최했다. 이 전시회에서 처음으로 누보 레알리스트란 호칭이 쓰여졌으나, 정식으로 그룹이 결성된 것은 그해 11월이었다. 이어 60년 말 파리에서 열린 제2회 전위 미술제에서 최초로 작품을 발표 했고, 이듬해 5월 파리의 제이 화랑에서 '다다를 넘는 40도'라는 전시회가 조직되어 신사실 주의의 존재가 세상에 인정되게 되었다. 이 전시회에서 아르망은 그림물감의 튜브나, 진공관 과 같은 대량 생산의 공업 제품을 집적한 작품을 출품하여 '현실의 직접적인 제시'라는 방 법을 구체화시켰다. 한편 다니엘 스포에리는 <타블로 피에지(함정의 회화)>라는 작품을 출 품했는데, 음식물이 남아 있는 식기류를 쟁반 위에 그대로 고착시킨 것이었다. 이것은 음식 물이 남아 있는 상태를 현상대로 제시한 것으로 팅겔리의 폐품 이용의 작품과 상통하는 것 이었다. 또 60년의 살롱 드 메에 출품했던 세자르의 폐물 자동차를 입방체 상태로 고정시킨 '압축 조각'은 소재의 특이성과 메티에의 방기라는 점에서 신사실주의의 미학을 잘 나타내 주는 작품이다. 신사실주의의 그룹의 최초의 참가자는 레스타니, 아르망, 뒤프렌, 앵스, 이브 클랭, 마르시안 레이스, 다니엘 스포에리, 팅겔리, 빌레글레 등 열명이었으나 뒤에 세자르, 로텔라, 니키 드 생 팔, 크리스토 등이 참가했다. 신사실주의의 세 개의 선언을 발표하여 이념적으로는 통일 을 보였으나, 구체적인 개개 작품의 신사실주의로서의 공통성은 결코 명확하지 않다. 공통적 이라면 '현대의 자연에 대한 공통적인 감각과 집단적 행위의 일시적인 필요성의 자각'이라 는 점뿐이었다. 레스타니에 의하면, 기계화되고 공업화되어 광고로 가득찬 것이 현대의 자연 이므로, 신사실주의 화가는 그 자연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제시'해야 하고, 그러 기 위해서는 전략적 필요성에 따라 그룹을 결성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신인상주의 쇠라(seurat), 시냑(Signac) 등을 중심으로 행해진 점묘주의 등의 이론과 수법 및 그 운동을 말한다. 인상주의가 사용한 기법을 과학적으로 더욱 발전시키면서도 동시에 인상주의의 경 험주의적 사실주의에 대한 반발, 고전주의적 정신의 부활을 꾀한다는 기치하에 쇠라가 1884 년 5월 앵데팡당전에 출품한 <목욕한는 사람들>을 보고 비평가 펠릭스 페네옹이 신인상주 의 이렇게 이름붙였다. 당시 25세이던 쇠라는 거기서 나중에 이 운동의 이론적 대변자 역할 을 한 시냑을 만나 함께 '앵데팡당 미술가 협회'라는 새로운 그룹을 만들었다. 당시 22세이 던 젊은 비평가 페네옹은 같은 해, 이 운동을 돕기 위해 <앵뎅팡당>를 창간했다. 1885년에 는 시냑이 피사로를 이 운동에 참여시켰으며, 앙리-에드몽 크로스(1856∼1910), 막시밀리앙 콕스(1858∼1941), 앨버트 뒤브와-필레(1846∼1890)등이 이 운동을 뒤따랐다. 반 고호, 툴르 즈 로트렉, 고갱 등도 한샔 여기서 영향을 받았다. 점묘주의 혹은 분할주의는 신인상주의가 사용하는 독창적인 테크닉의 기반을 이루는 것으로 써, 캔버스에 색칠을 해나갈 때 순색만을 사용하되 이를 일체 뒤섞지 않으면서 작은 점으로 찍어나가는 방법을 말한다. 이 겨우 색조의 순도는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보는 이의 망막 위 에서 중간색이 형성되는 효과를 낳게 된다. 이 방법은 와토, 들라크루아, 터너 등이 이미 사 용하였으며, 인상주의자 중에서는 르노아르가 최초로 사용했고, 헬름홀츠와 셰브레이유의 색 이론에 익숙해 있던 모네느 상당히 체계적으로 사용하였다. 점묘주의라는 말이 처음 사용된 것도 르노아르, 모네가 관련되는 한에서였으머, 쇠라 등의 신인상주의 화가들은 이러한 기법 을 보다 과학적으로 발전시킨 자신들의 기법에 '점묘주의' 대신 '분할주의'라는 용어를 더 어울리는 것으로 생각했다. 1886년 이후 쇠라와 그의 동료들은 젊은 과학자이자 미학자인 샤를르 앙리의 견해 - 그는 1885년 '과학적 미학 입문'이라는 표제로 <현대>에 대단히 세련된 예술 이론을 선보였다. -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으며, 1887년부터 1891년 사이 쇠라는 과학적 이론들을 표현적이고 정서적인 선과 색조로 환원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탐색해 나가면서 전통적인 아카데미 이론 과의 접목을 시도하기도 한다. 회화적인 여러 요소의 과학적 배치가 정서나 정조를 이끌어 낼 수 있다는 믿음은 푸생에 의해 일찍이 표명된 바 있으며, 후일 아카데미의 기본 학설로 받아들여지면서 샤를르르브룅, 앙드레 펠리비아에 의해 유행되었다. 색채 분할 등 인상주의의 기법을 더욱 체계화 시키는 동시에, 신인상주의자들은 인상주의자 들의 경험주의적 사실주의에 정면으로 대비되는 정신, 즉 그림이란 신중하게 고려되고 계획 될 수 있으며 과학적으로 계산된 효과가 예견·지향될 수 있다는 사고를 도입시켰다. 세잔 느와 더불어 쇠라가 현대 회화의 혁신적 인물로 취급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신사임당 - 申師任堂 (1504~1551) 조선의 여류 서화가. 호 사임당.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났다. 율곡 이이의 어머니이다. 효성이 지극하고 지조가 높았으며, 어려서부터경문을 익혔고 시문과 그림에 뛰어나 여러편 의 한시 작품이 전해진다. 또한, 안견의 영향을 받은 화풍은 여성 특유의 섬세 정묘함을 더하여 한국 제일의 여류 화 가라는 평을듣는다. 산수·포도·풀·벌레 등을 잘 그렸다. 자녀 교육에도 남다른 노력을 기울여 현모양처의 귀감이 되었다. 주요 작품으로는시 〈유대관령망친정〉 〈사친〉, 그림 〈자리도〉 〈산수도〉 〈초충도〉 〈노안도〉〈연로도〉 등이 있다. 신소재(new materials) 새로운 재로나 재질을 의미하는 말. 어떤 물지이든 미술에 적용될 수 있다는 기본 원칙이 20세기 전반에 확립되었다. 즉 버려진 쓰레기나 사업 재료, 그리고 동식물까지 미술에 이용 될 수 있다는 발상인데, 이러한 발상은 기교와 양식에 있어서 상당한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조각과 건축의 경우, 새로운 재료를 도입해 이용함으로써 커다란 변화를 이룩했다. 쓰레기나 다른 물질에서 취해진 재료들의 이용은 입체파의 콜라주에서 시작되어, 정크 아트와 같은 온갖 종류의 앗상블라주에사 큰 발전을 보게 되었고, 이러한 개념의 변화는 회화와 조각 간 의 전통적인 차이를 불분명하게 만들었다. 가장 중요한 신소재로서는 산업 제품 중에도 금 속과 프라스틱 같은 합성제품, 전기 기구 등이 있다. 이러한 재료드의 이용은 주조하거나 깎 아낸 형태의 전통적인 조각과 대조를 이루는데, 용접한 금속 조각 따위는 새로은 가능성을 제시해 주었다. 그리하여 다색채의 투명하거나 유연한 플라스틱 조각, 키네틱 아트의 필수 요소인 라이트 아트 등으로 발전했다. 한편 회화에서의 괄목할 만한 새로운 재료로는 아크 릴과 플라스틱 페인트로써, 1950년대 말부터 이용되기 시작해 스테인드 캔버스 페인팅 (stained-canvas painting)이란 유화처럼 색깔이 표면에 칠해지는 것이 아니라, 캔버스에 직 접 침투되는 것을 말한다. 20세기 중반의 미술이 점차 구상적, 또는 전통적 추상미술에서 벗 어나 환경미술과 시스템 아트(system art)를 지향하게 되자 흙이나 동식물 같은 자연적인 수단과의 결합이 이루지게 되었고, 물질, 시간, 공간과 같은 확고한 한계가 존재하지 않는 작품들이 점차 나타나게 되었다 신윤복 - 申潤福 (1758~?) 조선의 풍속화가. 호 혜원. 김홍도·김득신과더불어 조선 3대 풍속화가로 일컬어진다. 풍속화뿐 아니라 남종화풍의 산수화 등에도 뛰어났다. 대표작으로는 국보 제135호로 지정된 《혜원전신첩》이 전한다. 모두 30여 점으로 이루어진 이 화첩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 전시를 통하여 외국에도 잘 알려 진 그림이다. 김홍도의 풍속화와 달리 도회지의 한량과 기녀 등 남녀 사이의 은은한 정을 잘나타낸 그림 들로, 당시의 애정과 풍류에 대하여 전하는 바가 크다. 이 외에도 국립 중앙 박물관에 소장된 〈탄금〉 등 6점으로 된화첩 또한 명품이다. 특히, 〈미인도〉는 조선 여인의 아름다움을 잘 드러낸 걸작으로손꼽힌다. 그 밖의 작품으로는 〈주막도〉〈사죽유락도〉 〈인물도〉 등이 있다. 조르쥬 피에르 쇠라(1859-1891)는 햇빛에 반사된 색채를 분할하여 작은 색점으로 화면을 구 성하는 새로운 기법을 창출하여 신인상주의 운동의 선구적 역할을 한 화가이다. 그의 생애는 비록 32년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10여년 남짓한 화업의 기간동안 그는 몇 점의 중요한 대작을 완성했고, 그 작품들은 노력하는 천재인 쇠라의 눈부신 업적을 고스란 히 증명하고 있다. 그는 시냑과 함께 1880년대 이후의 '후기인상파' 계열에서 신인상주의로 분류되는 화파에 선구자 역할을 하였다. 그의 이러한 분할 점묘주의는 이후 근 현대 서양 화단에 깊은 영향 을 끼치게 된다. 1884년에 완성한 [미역감는 사람들]은 파리 교외의 아르니에 강변에서 일광욕과 수영을 즐 기는 도시민의 모습을 주제로 한 작품이다. 쇠라는 등장 인물과 전체의 구도를 정하기 위해 수많은 스케치를 남기고 있다. 이러한 그의 주도면밀함은 다른 작품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쇠라의 초기작품들은 대부분 크레용을 이용 한 스케치나 유화 소품이라고 하는데, 그의 이러한 과학적 분할주의가 기법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때는 1883년과 84년 사이이다. 쇠라는 인상파 화가들과 마찬가지고 광선에 의한 색의 효과에 근본적으로 관심을 가지면서, 인상주의자들의 자유롭고 불규칙한 터치에 일종의 질서를 가미하였다. 이같은 특징은 이 그 림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19세기말 당시 파리 근교의 아스니에르나 클리쉬, 라 그랑 자트와 같은 외곽지역에는 현대 적인 산업발전을 주도하는 아파트, 빌딩, 공장들이 속속들이 들어서기 시작한다. 또한 여기 서 집와 직장을 갖게 된 노동자 계층인 시민들의 도시가 형성되었다. 주말에 일을 쉬는 사람들이 근처 강가로 나와 한가한 일요일을 즐기는 모습은 소시민에 관 심이 많았던 쇠라에게 좋은 소재가 되었다. 주제의 한가로움과는 대조적으로 구성면에서 보면, 왼쪽 위에서 오른쪽 아래로 사선이 구획 하는 선과 화면 3분의 1에 해당하는 위치의 지평선이 화면을 기본적으로 꽉 짜여진 구도로 구성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일견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흩어져 놀거나 누워 있는 인 물들에서, 인상주의에서는 대기 속으로 희미하게 사라졌던 형태가 오히려 기하학적 원통형 의 명확한 윤곽선이 살아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대상의 개인적인 묘사가 생략된 채, 통일성 있는 모습들에서 분명 자유롭게 여가를 즐기는 사람들의 순간성보다는 영원하게 고정되어 있는 것 같은 견고함을 느낄 수 있다. 밝은 원색점과 평면화된 화면, 정적인 인물표현에서, 우리는 쇠라가 비록 인상주의의 화가로 서 출발했지만, 분명 그들과는 다른 새로운 예술을 지향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1884년에 착수해 2년에 걸친 제작 기간을 소요한 대작 [그랑 자트섬의 일요일 오후]는 쇠라 의 대표적 걸작이다. 이 작품은 도시 사람들이 한가로운 일요일 오후를 강변의 공원에서 보내고 있는 모습을 그 린 것이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 쇠라는 매일 아침 자트섬에 나가 현장에서 여러 인물상을 스케치하였고, 오후에는 아틀리에에서 그들 인물상을 신인상 기법으로 새롭게 조형화시키면 서, 화면 내의 배치해 대해 고심했다고 한다. 약 2년에 걸친, 적어도 20여 점의 드로잉과 40여 점의 색채 스케치 끝에 완성된 이 작품은 1886년 마지막 인상파 전시회에 출품되었고, 이후 [앙데팡당]전에도 전시되어 세간의 이목을 받게 되었다. 인물들은 정면, 측면, 그리고 뒷모습의 배면까지 다양한 시선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그들의 자세가 고대 이집트벽화 속의 인물들처럼 고정되어 있어 엄숙함과 함께 침묵을 느끼게 한 다. 화면 위에 고루 펼처진 생생한 원색의 점들은 전경에 있는 대상이나, 원근법에 의해 작게 그려진 대상 모두 세밀하게 표현하고 있으며, 직선과 곡선의 대조, 기하학적 형태의 패턴들 이 화면 전체를 매우 장식적인 효과를 갖게 한다. 그의 화면에서는 인상파의 여러 순색의 무질서한 중복에 의해 야기되는 어두운 회색빛이 극 복되어 원색의 순순함이 살아있다. 도시민의 휴일 나들이라는 주제는 인상주의의 전통적인 것이어서, 쇠라가 주제면에서 선배 들의 사상을 계승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림을 자세하게 보면 여기 자트섬에 모 인 인물들의 신분이 매우 다양함을 알 수 있다. 앞쪽 왼펀의 인물들을 예로 들어보자. 파이프를 물고 비스듬히 누워 있는 남자는 셔츠 차 림의 노동자이다. 그리고 그 옆에 모자를 쓰고 뜨개질을 하고 여인과 중절모에 지팡이를 든 상류계급의 남자 가 다 같이, 그러나 아무런 관련없이 한 그룹으로 묶여 있다. 또한 군인 복장을 한 두 사람이 트럼펫을 불고 남자 뒤편에서부터 걸어오고 있다. 오른쪽 앞쪽의 측면으로 서 있는 두 남녀는 더욱 흥미롭다. 시가를 손에 쥔 상류층 남자와 그 옆에 원숭이를 데리고 있는 여자. 원숭이는 이 여인이 창녀임을 나타내는 상징물로서 두 명의 관계를 미심쩍게 하고 있다. 이렇듯 다양한 직종과 계층이 뒤섞여 있는 장면속에서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이끌어 낼 수 있으며, 이러한 그림의 매력이 관객을 그 앞으로 모이게 한다 쇠라가 독감에 걸려 갑자기 세상을 등지게 된 1891년 마지막 시기에 제작된 작품으로 [서커 스]가 있다. 여기서 보이는 쇠라의 점묘법은 [그랑 자트섬의 일요일 오후]에서 보다 더욱 선 명해지고 세분화된 화풍을 보여주고 있다. 푸른색, 노란 색, 붉은 색을 주조로 하여 백마 위 에서 줄넘기를 하고 있는 곡예사의 역동적인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다. 또한 눈에 띄는 특징으로 전경에 나타나는 인물들의 얼굴 표정을 들 수 있다. 약간 위로 치 켜 올라간 눈매와 꼭 다문 입술이 이들 서커스를 구경하는 관객과 쇼를 벌이고 있는 단원들 이라기 보다는 장난감병정과 같은 비 인간적인 획일성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정 형화는 쇠라가 대상인물들의 개성보다는 표현하고자 하는 형태의 특징을 우선한 것임을 나 타내고 있다. 쇠라가 32세의 짧은 나이에 점묘파로 분리될 수 있는 새로운 인상주의 기법을 완성시키고 있음을 이 작품을 통해서 엿볼 수 있다. 쇠라가 독감에 걸려 갑자기 세상을 등지게 된 1891년 마지막 시기에 제작된 작품으로 [서커 스]가 있다. 여기서 보이는 쇠라의 점묘법은 [그랑 자트섬의 일요일 오후]에서 보다 더욱 선 명해지고 세분화된 화풍을 보여주고 있다. 푸른색, 노란 색, 붉은 색을 주조로 하여 백마 위 에서 줄넘기를 하고 있는 곡예사의 역동적인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다. 쇠라와 함께 신인상주의 주요 작가로 거론되는 화가로 폴 시냑(1863-1935)이 있다 시냑은 1884년 제 1 차 [앙데팡당]전에서 쇠라를 만나 그와 함께 광선과 색채의 과학적 탐구의 길 을 걷게 된다. 시냑의 작품에는 바다나 항구가 자주 등장하는데, 그는 사실 화가인 동시에 뛰어난 선원이 기도 했다. 그는 날씨 좋은 날을 택해 배를 타고 나가 풍부한 햇살 속에서의 색을 관찰했다. 그리고 겨울철에는 그 동안 얻은 스케치들을 가지고 화실에서 작품을 완성해 나갔다. 쇠라가 일찍 타계한 후에도 시냑은 철저한 신인상주의자로 남아 신인상주의를 널리 전화하 는데 적극적이었다. 그는 이른바 신인상주의의 이론서인(들라크와에서 신인상주의 까 지)(1899)라는 책을 펴내 과학자 쇠브렐의 색채 이론을 미술과 접목시키는 작업을 체계화시 켰다. 그러면서도 시냑은 쇠라와 구별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는데, 시냑이 쇠라보다 자유롭 고 따뜻한 구성과 색채를 구사한 점이다. 1911년에 그린 [마르세유 항구 입구]라는 작품이 이러한 그의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야 수파의 선구적인 화풍을 예시하는 듯한 이 작품은 시냑의 색채의 역동성을 느끼게 한다. 그 는 쇠라의 생명감이 억제된 엄숙함보다는 세속적인 활기를 나타내기를 원했다. 마르세유 항 구의 밝은 이미지를 살려내고 있는 그의 특색은 보는 이로 하여금 삶의 생동감을 느끼게 한 다 신조형주의 네덜란드 화가 피에트 몬드리안(Piet Mondeian)이 입체파의 이론을 더욱 철저히 정리해 끌 어낸 기하학적 추상주의의 이론. 몬드리안은 회화를 구성하는 조형 요소를 가장 기본적인 형태로 환원해 그 기본적 요소의 짜맞춤으로 화면을 구성할 것을 주장하였다. 즉 곡선이나 사선은 피하고 주로 수평선과 수직선의 짜맞춤으로 한정하고, 색채는 청·적·황의 삼원색 과 백·흑·회색에 한정하여, 엄밀한 비례 관계에 바탕을 둔 화면 구성을 주장하였다. 이 사 고 방식은, 제1, 제2차 세계대전 사이에 우럽 각지에서 등장한 추상주의 가운데서도 가장 순 수성을 중히 여긴 경우였다. 몬드리안의 이러한 주장은, 잡지<데 스틸>에 의해 보급되었고, 건축이나 디자인 분야에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1920년 그가 쓴 이론서<네오 플라스티시 슴>이 파리에서 출판되었는데, 이것은 뒤에 독일어로 번역되어 바우하우스 총서의 한권으로 1925년에 간행되었다. 신즉물주의 1920년경부터 표현주의의 좌파에서 발전하여 독일에서 일어난 미술 운동. 표현주의가 주관 성, 환상성에 입각해 작품을 제작하려 했던 데 반해 신즉물주의는 사물 자체에 접근하여, 객 관적 실재를 철저하게 파악하려는 사실주의적 특징을 지녔다. 1925년에는 만하임 미술관에 서 '신즉물주의 전'이 개최되었는데, 제1차 세계대전의 혼란을 거쳐 나타난 합리주의와 공리 주의가 그 배경이 되고 있다. 화가로는 정밀한 기법을 써서 자연으로 돌아간 카놀트, 시림 프, 철저한 세밀 뵤사로 신랄하게 모델을 분석한 딕스, 그로츠를 들 수 있다. 특히 딕스와 그로츠는 전쟁의 공포나 사회의 퇴폐적인 면을 가차없이 그려냈다. 그들의 조형 정신은 다 다이즘, 신고전주의, 초현실주의, 이탈리아의 메타피지카 회화에서 영향을 받은 점이 많다. 이같은 독특한 묘법은 마술적 리얼리즘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신즉물주의는 현실의 객관적 기록과 초현실적인 환상의 양극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늘 기술 지상, 기계 숭배 소외와 물질화의 현상을 긍정하기 쉬운 일면을 지니고 있었다. 또 건축이나 공예의 분야에 서도 역사적 양식의 단순한 모방을 떠나, 합목적성, 실용성을 추구한 1920년대의 움직임에 대해 이 말을 쓴다. 바우하우스에서는 조형의 단순성과 기능의 합리성을 통일시키려는 방향 에서 이 운동이 추진되었다. 신즉물주의는 1933년 사회의 퇴폐적인 면을 폭로한 현실비판적 요소로 인해 히틀러 정권에 의해 퇴폐 예술로 탄압을 받았으나, 최근 다시 활발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신체예술(body art) 지난 60년대의 미술 동향의 하나로 예술가의 신체를 표현과 조형의 매체로써 사용하는데 특 징이 있다. 신체를 통한 행위의 전개를 중요한 계기로 삼기 때문에 보통은 행동미술과 동일 시한다. 이 경향의 특징이자 단점은 인간의 신체를 통한 태도와 동작을 모티브로 하는 까닭 에 대중 앞에서 일회적으로 개최되거나, 그것을 단지 비데오나 필름에 기록할 수 있을 뿐이 라는 것이다.(사적인 행위로 고착됨). 한편 이 경향은 조각과 깊은 관련이 있는데 그것은 조각이 애초 인간의 신체와 특별한 연관 을 갖고 있는 데서 기인하고 있다. 조각가들은 신체를 날카롭게 인식하고 잇으며 조각이 대 개 관객과 예술작품 사이의 생리학적인 감정이입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도 의식하고 있었다. 따라서 조각가들이 그들 자신의 신체를 예술의 매체로 사용하거나 주제 및 대상으로 다루려 는 것은 논리적인 의식의 필연적인 발전과정이라 할 수 있으며 이 경향은 나아가서 퍼포먼 스, 개념미술 등과도 필연적인 관계를 갖게 된다. 신체예술(body art) 실내장식(interior decoration) 단순히 실내를 장식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내를 가구 상태 등에 따라 설비한다는 의미에서 실내 장비, 실내 구성이라고도 한다. 실내의 구성 요소로는 천정, 벽, 바닥, 각종 조직물 등 의 고정 부분과 가구, 깔개, 커튼 등의 가동 부분이 있는데, 이들의 배치, 배합에 의한 구성 외에도 조명 및 색채를 생각해야만 한다. 또 건축물의 실내뿐만 아니라 선박, 항공기, 차량 등의 내부도 실내 장식의 대상이 된다. 종래는 건축가가 실내도 설계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근래에는 전문적인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나와 새로운 설계와 개장을 담당하는 일이 많아졌 다. 실루에트(silhouette) 그림자 그림. 윤곽이 뚜렷한 물체의 영상. 프랑스의 정치가이자 아마추어 종이오리기 공예가 였던 에틴느 드 실루에트(1709∼67)가 재무상으로 재임하던 당시 극단적인 절약을 호소하여 초사화도 그림자 그림으로 충분하다고 주장한 데서 명칭이 유래했다. 특히, 윤곽이 뚜렷이 드러나는 흑백으로 된 회화와 빛과 어둠의 대조를 통해 표현한 여러 형태의 미술을 일컫는 다. 이러한 기법은 이미 구석기 시대의 동굴 미술, 이집트 미술, 그리스의 꽃병 그림 등에서 부터 여러 시대에 결처 발견되고 있다. 실루에트 초상화가 크게 유행한 시기는 1750∼1850 년으로 싼값에 신속히 초상화를 만들 수 있다는 이점 때문에 '가난한 자의 세밀화'라고 불 리었다. 실루에트는 신고전주의의 위향에 부합되어 인기가 상승했고 1800년 이후 다양한 기 법이 개발되었다. 후에 색채, 금박, 장식적 배경의 도입으로 그 장점이 훼손되었고 1850년경 사진이 보급되면서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다. 초현실주의에서 실루에트는 종종 암?거인 수법 으로 사용된다 실크 스크린(silk-screen) 판화 기법의 하나. 세리그래프(serigraph)라고도 한다. 공판에 의한 판화로서 원리는 등사판 과 같다. 다만 등사판이 원지를 사용하는데 반해, 실크를 사용하기 때문에 이런 명칭이 붙게 되었다. 현재에는 실크 이외에도 합성섬유가 많이 쓰이고 있다. 인쇄 기법은 아주 간단하여 실크 등의 천을 틀에 넣어 고정시킨 다음, 인쇄되지 않는 부분에 종이나 아교 또는 아라비 아 고무액을 입혀, 잉크가 통하지 못하게 한 다음, 잉크를 부어 롤러나 스케이지(고무로 만 든 기구)로 누르면서 밀면 인쇄가 된다. 다른 판식에 비해 잉크가 많이 묻기 때문에 색상이 강하고 선명한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그 단순 명쾌하고 강렬한 시각적 효과 때문에 일찍부 터 포스터 등 상업미술에 많이 이용되어왔다. 실크스크린은 다른 판식, 즉 목판화, 동판화, 석판화 등이 모두 판재에 판을 만든 다음, 전사 법에 의해 인쇄가 되는 데 반해, 잉크가 스크린의 망점을 통과하여 인쇄되는 유일날염법의 공정을 취하고 있다. 따라서 다른 판식에 비해 인쇄의 대상이 넓고 또 인쇄시의 압력이 작 다는 것이 큰 장점이다. 인쇄시의 압력이 작다는 것은 유리판과 같은 물체에도 인쇄가 가능 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실크스크린은 종이나 천은 물론, 플라스틱, 목재, 금속판, 돌 도자기등 어떤 종류의 물건에도 인쇄가 가능하다. 또 캔버스나 벽 등에도 인쇄할 수 있고 특수 기계장치를 하면, 곡면인쇄도 가능하다. 이런 장점 때문에 1960년 이후, 많은 작가들이 이 기법을 활용하고 있다. 특히 팝 아트의 경우에는 실크스크린이 가장 보편적인 표현기법 이 되고 있다. 실크스크린의 제판법에는 수공으로 하는 방버보가 광화학적 방법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최근에는 천에 감광액을 직접 발라 사진 제판을 하는 방법도 개발되었다. 실크스크린은 주 로 프랑스, 영국, 미국에서 발달했다. 이 기법을 시도한 작가로서는 빅토르 바자렐리, E. 파 올로치, 짐 다인, 브리지트 라일리, 로버트 라우센버그, 데이비드 호크니, 앤디 워홀, 클래스 올덴버그, 로이 리히텐시타인 등이 있다. 실크로드(Silk Road) 중앙 아시아를 경유하는 고대의 동서 교역로. '비단길'이란 뜻으로 이 교역로를 통해 운반된 중국의 주요 수출품이 비단이기 때문이었다. 이 명칭은 독일 지리학자 리히토펜(1833∼1905) 의 저서 <중국(China)>(1877)에서 '비단길'이라는 말로 처음 사용되고, 중국부터 중앙 아시 아의 여러 나라에 이르는 교역로를 가리키게 되었다. 이것을 이란, 이라크, 시리아까지 확대 시켜 사용한 사람은 독일 역사학자 헤르만이었으며, 그 이후 헤딘과 스타인에 의해 '실크로 드'라고 영어로 번역돼 널리 쓰이게 되었다. 이 길은 내륙 아시아의 사막에 점점이 계속된 오아시스 도시를 연결해 생긴 이른바 카라반 루트로 동 투르키스탄 지역의 경우 중국에서는 한 이래로 천산산맥의 북쪽을 천산북로, 남쪽을 천산남로라 불렀다. 그리고 남로는 다시, 천 산남록을 따라가는 서역불로와 곤륜북록을 따라가는 서역남로로 되었다. 이길은 중국의 도 시 장안을 출발하여 하서에 들어가, 양주를 거쳐 국경의 돈황에 이른다. 그 서쪽으로는 옥문 관·양관이 있고, 더 나아가면 서역이다. 한 대에는 누란이 북로와 남로의 분기점이었는데, 남로는 체르챈, 코탄, 야르칸드를 지나고, 북로는 카자르, 쿠차, 아크스, 카시가르를 지나 파 미르 고원으로 향한다. 나중에 옥문관에서부터 쿠므르, 투르판을 지나 카자르에 연결되어 새 로운 도로가 생겼는데, 누란 경유의 옛 도로가 쇠퇴함에 따라 새로운 도로가 북로의 간선도 로가 되었다. 파미르 고원의 험난한 길을 넘어서면서 투르키스탄으로 들어가는데, 소그디니 아의 사마르칸드가 그 중심부이다. 여기서 남쪽은 인도 방면으로, 서쪽은 이란 방면으로 카 라반 루트가 이어져 있다. 그리고 비단을 운송하는 길이라는 의미로 본다면 이 오아시스 루 트 외에 스텝 루트(초원의 길)와 남해 루트를 덧붙여 3개의 교통로를 실크로드라고 하는 설 도 있다. 오늘날 실크로드는 동서 교통로의 의미뿐만 아니라 이 길을 통해 이루어졌던 동서 문화 교류를 상징하는 말로써 쓰이고 있다. 실험 미술(experimental art) 20세기 미술에 있어서 '새로운', '대담한', '이상스러운', '자극적인' 이라는 의미를 갖는, '실 험적'이라는 마은 '전위적(avant gard)’이라는 말과 사실상 동의어로 취급된다. 그것은 미 술 비평에서 긍정적 의미와 부정적 의미를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긍정적으로 쓰일때는 예 술가들이 뭔가 가치 있는 결과를 낳을 수 있는 좋은 기회라 기대하며 실재로 작품을 만들어 보는 것을 의미한다. 부정적으로는 '시운전', '미완성작', '과도기적인 것' 등의 의미로 사용 된다. 그 예로써 에른스트 곰브리치는 20세기의 모든 예술을 총괄해서 시험적·과도기적· 점정적이라는 의미에서 '실험에술'이라는 붉은 글씨의 항목에 넣어버렸다. 콘스타블 (Constable)은 예술에서의 실험은 과학에서의 실험과 유사하다고 믿었다. 그는 회화는 과학 이고 풍경화는 자연철학의 한 지류라고 주장했다. 비슷한 견해를 지닌 사람으로 스테판 바 운(Stephen Baun)이 있다. 또 피카소도 예술 작업을 '조사연구'라고 불렸으며, 예기치 못한 것, 의도하지 않은 것을 발견하는 것이 자신의 목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과학에서의 실 험이란 이론이나 가설을 검증하기 우해서 통제된 여건 아래서 테스트하는 것으로 우연의 요 인을 줄이는데 모든 노력을 기울이며, 놀이의 요소는 전혀 개입되지 않는다. 따라서 예술에 서의 실험을 과학에서의 실험에 비유해 설며하는 것은 타당치 못하다. 셰난(M. Chanan)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행동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예술도 과학과 같으나 그 결과를 예측도 측정도 할 수 없다는 점에 있어서는 예술과 과학은 상이하다고 주장한다. 또 다른 차이는 과학에서의 실험은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이지만, 예술가들의 실험은 그 자체만으로도 높이 평가되는 것이 보통이다. 심사정 - 沈師正 (1707~1769) 조선의 화가. 호 현재. 정선의 제자로 그림을공부하였고, 뒤에 중국 남화와 북화를 홀로연마하여 새로운 화풍을 이 루고, 김홍도와함께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화가가 되었다. 1748년 모사중수도감의 감동(監董)을 지냈다. 당시 그의 그림은 중국에까지 알려질 정도였는데, 특히 화초·풀벌레·새·짐승·산수화에 뛰어났다. 주요 작품으로는 〈강상야박도〉 〈하경산수도〉 〈모란도〉 〈맹호도〉〈파교심매도〉 〈추경산수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