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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경자 (1924~)

동경여자 미술학교졸업 1954~1974 홍익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침 초기에는 신화적이고,전설적인 소재를 작품을 함. 이후 꽃과 여인을 소재로 계속 작업을 하고 있다. 전설 1961 종이에 채색 122*148 사월 1974 종이에 채색 26*40 막간 1986 종이에 채색 40.9*31.8 무명배우 신디 1991,종이에 채색 41.5*31.5

 

청기사그룹

1911-1914년을 중심으로 활동한 청기사파는 화면의 조형적 효과를 무시하고 읺고 형태와 내용을 조화시키면서 화려한 원색의 장을 펼치고 있다. 뮌헨을 중심으로 활동한 이 그룹은 다리파 같이 독일 낭만주의에 근거하고 있으나, 집단적 인 공동작업이나 과격한 사회 비판적인 태도를 내세우지 않고, 여러 나라들의 미술가들이 함께 움직인 모임으로서 특히 프랑스 미술에 대해 좀더 개방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 그룹의 가장 핵심적인 인물은 당시 독일에 거주하고 있었던 러시아인 바실리 칸딘스키 (1866-1944)였다. 칸딘스키가 추구한 것은 회화 그 자체이며 여기서 정신적인 세계를 즉흥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이 정신적인 세계는 '절대' 혹은 '추상'이라는 성격의 회화를 형성하게 된다. 칸딘스키는 모스크바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법률학과 경제학을 공부하였고 30세기 되던 해인 1896년 뮌헨으로 가서 미술학교에 입학 본격적인 화가의 길로 입문한다. 1910년에 그린 [기 수]가 제작되던 때를 같이해 수채와에 의한 추상화를 시도하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또한 그 자신의 예술관을 이론적으로 뒷바침 해 줄 [예술에 있어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 여]란 책을 1912년에 출판한다. 1912년에 뮌헨에서 결성된 청기사파의 중심적인 멤버가 된 그는 마르크와 함께 신비롭고도 자연주의적인 회화를 제작해 나아가기 시작한다. 이 작품은 [기수]연작 중의 하나이다. 강렬한 색채의 발언과 움직임 및 대상의 극단적 자기 화 의지는 거의 추상화에 가깝다. 앞서 소개한 그의 이론서에서 그는 자신의 추상적 의지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 색채는 건반이다. 눈은 망치이다. 영혼은 많은 줄을 가진 피아노다. 예술가란 그 건반을 이것저것 두들겨 목적에 부합시켜 사람들의 영혼을 진동시키는 사람이 다 청기사파의 또 다른 중심 멤버인 프란츠 마르크(1880-1916)는 뮌헨 태생의 도시인이었음에 도 불구하고, 시골의 자연을 동경한 나머지 상막한 도시를 멀리하고 동물을 기르는 생활을 즐겼다. 그러면서 그는 그의 동물들의 모습과 생태를 직접 관찰, 꼼꼼하게 그렸다. 그러나 그가 그리는 동물은 단순한 사실적 표현이 아니라, 자연의 한 상징적인 주제였다. 다시 말해 동물은 그에게 있어서 인간의 상실해 가고 있는 순수한 존재의 한 상징으로 그려 졌던 것이다. 1912년에 그린 [붉은 사슴]에는 흰 구름이 오가는 푸른 산꼭대기에서 평화롭게 뛰놀고 있는 두 마리의 붉은 사슴을 그린 것이다. 구름과 산, 사슬과 초목 모두 같은 비중의 우아하고 부 드러운 리듬으로 표현되면서 화면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대자연의 조화라는 관점에 서 구성되었다. 그의 이런 자연에 대한 경외심과 친밀감은 한해 전에 그린[작은 푸른 말]에서도 볼 수 있 다. 초록의 들판에서 각자 몸을 다듬고 있는 세 마리의 푸른 말들이 서로 한 덩어리로, 흡사 뭉 게구름같이 엉켜 있다. 이 말들이 가지고 있는 푸른색은 붉은 사슴과 마찬가지로 비현실적 인 상징적인 색채이다.

 

청록산수 [靑綠山水]

여러 종류의 안료로 채색된 산수화. 산을 군청색 계열과 녹청색 계열로 채색하기 때문에 이러한 명칭이 생긴 것이다. 먼 산은 군청계열로 ,앞 쪽의 주산은 녹청 계열로 채색되는데 ,산정이나 산주름의 능선에는 녹청 위에 다시 군청을 덧칠하는 일이 많으며 ,금니(金泥)를 함께 사용하는 경우가 있기 때 문에,금벽 산수라고도 불린다 .리쓰쉰,리 사오따오 부자에 의하여 양식적으로 완성되었다고 여겨지는 구륵선을 갖는 것과 명말의 일부 화가에 의해서 부흥되었던 소위 몰골산이라는 ,두 가지 기법은 청록산수의 특 색이라고 할 수 있다.수묵산수화가 보편화된 당말 이후로 청록산수는 회고적,복고적 회화 활 동의 지배를 받으며 당대 산수화를 전거로 한 방고적인 의미가 강하게 된다.

 

청자(靑磁)

도자기의 일종. 태토(胎土)에 철분이 포함되고 유약에도 미량의 철분이 있어 환원염(還元焰) 번조에 의해 청록색을 띄게 되는 자기. 또한 산화염(酸化焰) 번조를 하여 황녹색과 황갈색을 띤 것도 청자라고 한다. 중국의 회유 (灰釉)에서 발달한 것으로서, 일찍이 은(殷)나라 시대부터 그 기원을 볼 수 있다. 후한(後漢)과 위진(魏晋)시대에는 회녹색을 띤 원시적인 청자가 절강성 북부를 중심으로 성 행하여 고월주요(古越州窯)로 불리워졌다. 육조(六朝)시대에는 부장용 명기에 많이 사용되었고, 당(唐)에 이르러서는 월주요(越州窯)를 비롯한 각지의 요지에서 비색청자(翡色靑磁)라 일컫는 발전된 청자가 나타났다. 송(宋)시대 에는 월주요의 전통을 계승한 용천요(龍泉窯)와 화북의 요주요, 여관요 등지에서 고전적인 순수성을 구현한 완전한 형태와 유약을 지닌 청자로 발전하게 되었으며 특히 남송 이래 중 국의 수출품 중에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 후 원대와 명대에는 청룡사 청자가 성행하였으며, 청대의 경덕진(景德鎭) 가마에 이르기 까지 다양하게 변모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초기인 10세기 무렵부터 전라도 강진과 부 안 일대에서 청자가 소성되었다. 이후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12세기에 들어서는 선이 세련되고 청아한 비색유약을 지닌 뛰어 난 고려청자를 생산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고려는 도자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상감청 자를 창안해내기도 하였다.

 

초기 기독교 미술(The Early Christian Art)

중세 유럽의 대부분의 미술이 기독교 미술이지만, 초기 기독교 미술(특히 300∼750년 사이 의 미술)은 그 주에서도 주로 이탈리아와 지중해 서쪽 지역의 미술을 지칭할 때 사용된다. 이 시기의 동유럽은 이른바 비잔틴 미술이 유행하였다. 물론 동·서 유럽 미술의 경계가 명 확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중복은 불가피하다고 말할 수 있다. 기독교 미술은 도상적 관념들을 표현하기 위해 주로 고대 고전기의 우상 숭배적인 양식과 예술 언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기독교의 정신성을 강조하기 위해 고전기의 미술이 채택되 었지만, 그것은 미의 이념이라든지 시각적 아름다움, 또는 기술적 완전성 따위보다도 상징적 의의 때문이었다. 그래서 새로운 미술 양식은 나타나지 않은 반면에 새로운 도상학이 나타 났다. 요컨대 초기 기독교 미술은 고전 후기(300∼500)와 비교해서 양식상으로는 구별되지 않고, 기교상으로는 보다 저급하며, 도학상으로는 아주 새로운 것이다. 초기 기독교 미술 중 에서도 특히 회화의 경우, 그 예를 카타콤에서 잘 볼 수 있다. 이 좁은 카타콤의 벽면(주로 천정)을 장식하고있는 벽화들이 당시 회화의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는데, 기독교의 상징주 의에 입각하여 그림의 모티브가 신중하게 선택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스도를 의미하 는 양치기, 하늘의 연회, 불멸성을 상징하는 수탉, 영혼을 의미하는 비둘기, 희망을 상징하는 닻 등이 종종 쓰이고 있으며, 구약성서에 나오는 요나의 이야기 등이 구원의 전형으로서 그 려지기도 한다. 그리스도의 기적 장면들을 묘사하는 경향은 점점 일반화되었고, 이 시기의 그리스도는 주로 수염이 없는 젊은이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건축에는 바실리카라고 불리는 커다란 교회당이 나타난다. 이 건축들은 서유럽 교회당 건축 의 기본적인 모델이 되었지만 불행히도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지 못했다. 초기 기독교의 바 실리카는 집회당과 신전과 사저의 종합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한편 당시 교회 견물의 구성 요소 중 특징적인 것으로서 모자이크가 있는데, 이것은 소박하고 단순한 건물의 외경 과는 달리 그 찬란한 광채로서 신의 영적인 위엄을 환기시키는 장엄한 세계를 연출해냈다. 조각은 회화나 건축에 비해, 보수적인 것이었는데, 기본적으로는 우상 숭배의 오명을 피하기 위해 등신대의 인물상이나 대형 예배상의 제작을 꺼렸던 당시 상황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 다. 따라서 종교 조각은 처음부터 반 모뉴멘탈한 방향으로 나아간다. 즉, 그리스 로마 조각 의 공간의 깊숙함이나 당당한 규모가 없어지고 소규모의 형태와 레이스 같은 평면 장식으로 기울어졌다.

 

초충도 [草蟲圖]

풀과 벌레를 주제로 한 그림.보통 풀꽃,꽃과 과일 등에 벌,나비,잠자리,여치 등을 그린다. 곤충을 궁전의 벽화 등에 그리는 일은 육조시대에 이미 행해졌지만 당말 ,오대에는 독립된 형식으로서 성행하게 되었다. 남당에 서는 초충화를 궁전의 벽면에 장식하고 있다.채색화가 보통 이지만 수묵화도 성행하 였다. 송대 이후 강소성의 상주에서는 지방적 화법으로서 계승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신사임당 , 심사정이 대표적 초충도 화가이다

 

초현실주의 선언

다다이즘에서 발전한 초현실주의는 원래 문학 운동인데, 이 조직적인 운동은 앙드레 브르통 에 의하여 결성되고, 1924년 그의 초현실주의 제1선언이 출판되었다. 그 근간을 이루는 사상 은 인간 상상력의 해방이며, 합리주의가 도달한 관념적인 막다른 길에 대한 반격과 타개였 다. 그는 그 선언에서 "초현실주의는 구두, 기술 기타 온갖 방법으로 사고의 첨된 작용을 표 현하려고 하는 순수한 심적 오토마티슴이다. 이성에 의한 일체의 통제 없이, 또한 미학적, 윤리적인 일체의 선입관 없이 행해지는 사고의 진실을 기록한 것이다." 라고 주장했다. 또 29년에 발표된 제2선언에서는 "예술품을 만드는 것이 중요한 일은 아니다. 우리가 거의 자 각하지 않는 미나, 애정이나, 재능으로 훌륭하게 빛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표현되 지 않았던 것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미개척 부분을 밝히는 것이 초현실주의의 목적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브르통은 프로이트의 학설애 영향받은 점이 많았 다. 즉 이성의 통제가 없는 초현실성을 인정하여 이를 상상력이나 환각력에 의하여 무의식 적으로 표출하려고 했던 것이다. 1918년 제 1차 세계대전이 종식되었을 때, 유럽의 지성인들은 전쟁과 함께 한 시대가 서서 히 떨어져 나가는 조짐을 느끼게 된다. 사회, 정치, 경제, 문화, 예술의 모든 영역에서 심각한 변화가 일어나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 는 거센 몸부림이 구체적인 형태를 띠고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의 철학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 방법을 제시하였고,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전통적인 인간학에 일대 변혁을 가져온 다. 잠재 의식의 세계를 밝히는 심층 심리학, 꿈의 해석, 토템과 터부등 프로이트의 연구는 심리학은 물론 모든 사회 전반에 깊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20세기 초반의 조형 미술계는 문자 그대로 현란한 실험의 현장이었다, 야수파, 다리파, 입체파, 청기사파 등 다양한 실험적 창조 작업이 시도되고, 상호간에 비전과 영향력을 행사하며 발전해 나갔던 것이다. 이 시기에는 또한 문학과 예술 전반에 걸쳐 기계문명의 도래를 예고하는 미래주의 운동이 일어난다. 그러나 곧이어 발발한 제1차 대전으로 미래주의는 순수한 허무주의를 부르짖고 일어선 다다 이즘에 수렴되었다가 , 60년대에 팝 아트로 그 정신이 이어진다. 전쟁 중인 1916년, 취리히에 모인 일군의 젊은 예술가들에 의해 시작된 다다운동은 "모든 것이 무료하고 연극적인 무용성에 불과하다."는 자크 바셰의 독설에 열광하며 전통적인 모 든 가치 체계를 거부하고, 부르주아 문화에 대한 전면적인 파괴와 문학과 예술의 역할에 대 한 회의를 거침없이 표명하고 나선다. 그들은 명예, 조국, 예술, 종교, 자유, 박애정신, 도덕등을 가차없이 비웃으며, "아무것에도 봉사하거나 기여하지 않겠다."는 극단적인 부정과 무정부주의적인 입장을 공표하고 실천에 옮긴다. 한동안 다다의 거센 물결은 서구의 예술가들을 혼란과 허무, 그리고 전적인 파괴의 상태로 몰아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바로 그 즈음 '파리 다다'의 핵심적 인물이었던 브르통, 엘뤼아르, 아라공 그리고 수 포 등이 다다에 반기를 들고 일어서게 된다. 그들은 시, 혹은 예술 이란 기존의 가치에 대한 거부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가치를 제시해 주는 '희망'이 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의미에 서 시는 자유, 사랑과 맥을 같이하며, 이때 자유란 카오스나 폭력, 방종과는 반대 개념이 되 기 때문이다. 전적인 부정의 정신이 다다가 그 자체 내에서 다시 부정의 과정을 거치면서, 마침내 초현실 주의로 태동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다다이즘은 초현실주의를 위한 길트기에 해당한다고 불 수 있다. 이상과 과 같은 역사적 배경 속에서 출발한 초현실주의는 문명의 속박에서 인간을 해방시 키고 이성의 횡포로 억압되어 왔던 무의식의 세계를 밝힘으로써 인간에 대한 총체적인 인식 을 추구하고자 했던 예술운동이다. 나아가 그들의 표현에 따르자면 '인간과 생의 혁명'을 노 렸던 정신운동이기도 하다. 초현실주의는 전통에 대한 거부로 시작이 되었지만, 그 사상적, 문학적 이념의 뿌리는 과거 에 맥을 대고 있다. 정신의학을 전공했던 브르통은 일찍부터 프로이트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초현실주의의 시적 혁명을 위한 하나의 해결책으로 '무의식의 탐험'을 제시했던 것은 그러한 학문적 배경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 프로이드의 정신분석 이론은 1920-30년대의 의학계 및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는 인간의 유아, 아동기의 초기 발달 경험이 그 후의 인격 발달 과정에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가에 대한 이론을 펼쳤다. 여기서 그는 인간 행동의 근원을 다양한 무의식적 본능, 혹은 충동에 의해서 발생한다고 했다. 이 기본적 본능에는 삶의 본능과 죽음의 본능이 있는데 삶의 본능 중 성 본능은 모든 형태 의 쾌락 추구에서 가장 결정적이고 기본적인 요인으로 여긴다. 초현실주의 작가들-특히 달리의 경우-는 이중 무의식 영역에 속하는 ID의 발견에 큰 관심 을 가지고 이것을 화면에 표현해 보려고 시도하였다. Sper-ego 즉 이성적 억압에 눌린 본능 에의 욕구-예를 들어 성욕구-를 여러 가지 상징물 달걀, 못을 통해 나타내려고 하였다. 또 한 자유 연상법을 예술 창작에 적용해 자동 기술이라는 창작 기법을 창안하기도 했다. 초현실주의자들의 이념에 원천이 된 문학적 배경을 살펴보자면 환상 문학의 사드, 낭만주의 의 로트레아몽, 상징주의의 보들레르를 들 수가 있다. 18세기 프랑스 작가인 사드의 작품 세계는 성도착적 속성을 가지고 악마적인 이야기들을 어 둡고 왜곡된 애정 행각을 통해 표현하였다. 특히 여성을 가학의 대상으로 그리고 있으며 죽음, 폭력등을 애정의 표현 방식으로 묘사했 다. 이러한 다소 충격적인 성관념이 초현실주의자들의 '성 해방'이념에 기저가 된다. 사드는 [소돔 120일]과 같은 작품에서 인습적인 성세계에서 벗어나려는 태도로서 성욕구를 다소 과장되거나 폭력적으로 드러냈다. 또한 그는 선의 신화 위에 구축된 부르주아 사회의 호구성을 폭로하기 위해 악의 신화를 구성했던 작가이다. 그리고 그러한 경향은 19세기의 시인 로트레아몽과 20세기 극장가 장 주네 등에 의해 그 맥 이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둘째, 19세기의 프랑스 시인 로트레아몽이 지은 [말도로르의 노래]는 사드후작의 악마적 분 위기의 맥을 잇는 작품으로서 무의식 속에 잠재한 어두운 욕구를 표출했으며 이것은 초현실 주의자들의 경탄의 대상이 된다. 로트레아몽은 사드와 마찬가지로 원죄 개념을 거부함으로써 기독교 문명과 공공연히 결별한 다. 그에게 있어서 기독교는 위선과 형식주의의 표본이고, 자비심, 우정도 사기 행위로 간주 된다. 중요한 것은 원초적 생명력, 생명을 잉태하는 잔혹한 힘이다. 그래서 [말도로르의 노래]는 파괴와 창조, 죽음과 재생의 장으로서 읽는 이에게 감추어진 것에 대한 충격을 준다. 마지막으로 상징주의 문학의 보들레르를 살펴보자. 보들레르의 시 세계는 초현실주의 예술의 지하 원천과 곧 같은 것이었다. 보들레르의 초자 연주의, 그가 해독해 내고자 했던 초현실성,이원론적 세계 인식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서도 상응을 통해 두 세계를 화해시키려는 일원론적 성향은 초현실주의 정신의 밑거름이 되었다 고 볼 수 있다. 초현실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선구자로 생각했고 또 초현실주의적인 성향을 띄고있는 작가들 을 서양 미술사 속에서 찾을 수 있다. 그 선구자들은 세 그룹- 환상적 예술, 원시예술, 심리 병리학적 예술- 중 어느 한편에 속한 다고 볼 수 있다. 혹은 어떤 의미에서 초현실주의는 이 세가지의 예술 형태를 초월해서 그 것이 모두 혼 합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초현실 이전의 환상적 예술가에 속하는 화가로서 15세기 프랑스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슈가 있다. 그는 [지상적 쾌락의 정원]같은 작품을 통해 중세인들의 가장 깊은 희망과 공포를 상징적으 로 표현했는데 그는 무의식과 의식의 세계를 상징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 재능을 보여주었 다. 그가 작품에 사용하는 수많은 상징들은 고딕 예술에서 따온 것이 많은 데 상상의 천재인 봇 슈는 그것을 재발견(구성)하여 자연, 인간성이 넘치는 삶, 비이성의 보편적인 승리 등을 강 박관념 적인 장면으로 모사하었다. 특히나 그의 그림에서는 무관심한 끔찍함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18세기 스페인의 대가 프란시스 고야는 냉철한 시각으로 리얼리티에격렬한 왜곡을 가하여 기괴한 진실들을 낳게 한 초현실주의자였다. 19세기말에 접어들어 몇 명의 상징주의 화가들 중 귀스타브 모로는 초현실주의자들이 봇슈 다음으로 평가했던 거장으로서 19세기 말엽을 지배한 화가였다. 그의 작품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수채화에는 에나멜이나 보석 및 자수 등으로 번쩍거리며 바다의 요정인 사이렌과 키메라 등의 우화적 인물이 향수 어린 화려함을 띠고 등장하고 있 다. 앙리 루소 역시 초현실주의의 유명한 선구자였다. 특히 그의 이국풍의 그림은 상상력에 의 한 것인지 아니면 경험에 의한 것인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혼동을 일으키게 한다. 또한 노르웨이의 에르바르트 뭉크는 표현주의자로 간주되기도 하지 만 그의 그림은 표현주 의를 초월하고 있으며 사랑과 고독, 원시적 공포에 대한 신비적 표현 등으로 가득차 있다. 좀더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화가로서 지오르지오 데 키리코를 들 수 있다. 몽환적 오브제들 사이의 관계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데 키리코는 달리, 탕기, 마그리트, 에른스트등 초현실 주의 화가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1914년작인[거리의 신비와 우울]을그의 대표적인 초현실적인 작품으로서, 화면천체가 어긋난 원근법과 존재를 확인할 수 없는 인물들의 그림자들의 등장, 어딘지 알 수 없는 장소등에서 음산하고도 괴기스러운 꿈을 연상하게 된다. 또한 20세기의 거장 피카소는 현대 미술에 광범위하게 영향을 끼친 화가이다. 사실 초현실 주의는 입체파의 주지주의를 반박하는 입장을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피카소에게서 선구자적 인 정신을 발견했고 그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피카소는 단 한번도 자신의 작 업에서 오토마티즘을 거론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영감의 심연을 부수고 들어가는 듯 격렬 하고 자발적인 그의 창작 방식, 이미지들의 병렬기법, 혁명적인 회화공간, 또 비록 한때의 과도기적 현상이긴 하지만 1931년에 그린 [해변가의 인물]에서 볼 수 있듯이, 물질적 몽상과 에로티즘을 결합시킨 점 등은 초현실주의 미술에 적잖은 영항을 미친다. 러시아 화가인 샤갈의 작품에는 동화와도 같은 정경이 펼쳐진다. 그는 "우리의 내적 세계는 눈에 보이는 세계보다 더욱 현실적이다.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모 든 것을 망상이라고 매도하는 것은 자연을 진실로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래서 사걀은 몽환적 이미지, 직관상들을 즐겨 표현했다. 1912년에 완성 된 [러시아, 당니귀, 그리고 다른 것들에 대하여]에서 볼 수 있듯이, 모성, 풍 요, 비행, 그리고 밤 등의 주제들은 초현실주의자들이 즉려 사용한 것들이다. 이러한 상징들은 꿈을 나타내며, 샤갈의 이 그림에서 먼저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샤갈은 꽃과 사랑 등에 대한 고전적 표현을 간직하면서 자연에서 기쁨의 원칙을 추 구했고, 그 때문에 그의 회화에는 초현실주의자들의 그림에서 느낄 수 있는 음산함이나 괴 기스러움보다는 서정성이 넘친다. 사걀이 펼쳐보인 동심의 세계, 비합리적 것의 현존등은 초현실주의 미술의 저변에 흐르게 된다. 샤갈은 큐비즘적인 기법을 사용해서 꿈과 추억의 이미지에 기초한 개인정신세계를 표출했 다. 1896년에 오른느의 텡슈브레이에서 태어난 앙드레 브르통(Andre Breton: 1896-1966)은 제 1차 대전 이후에 의사의 길을 포기하고, 수포 Soupault와 아라공Argon, 그리고 엘뤼아르 Eluard와 함께 [문학] 잡지를 만들었다. 그 잡지에서 초현실주의를 선보였으며, 그의 정치적, 문화적 활동에 따라 초현실주의 운동방향, 새로운 동맹, 추방 등이 결정되었다.그의 많은 작 품들은 생을 바꾸기 위해, 사고의 실제적 기능 작용을 겨냥한 다수의 기교들에 의해 주도된 연구들과 활동들을 나타내는 것이다. 1939년부터 1945년까지 계속된 전쟁동안 그는 남부지대로 떠났고, 이어서 미국으로 망명했 다. 그후 귀국하여 그 그룹의 방향을 다시 잡았으며, 혁명보다는 정통적인 면을 더 강조하는 원칙에 따라 초현실주의의 활동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그는 평생동안 초현실주의 운동에 매달렸으며, 그를 둘러싼 사람들에게 그의 삶이나 의식을 밝히고자 노력했고, 문학과 예술, 윤리, 또 그 시대의 감성에 막대한 영향을 행사하였다. 1904년 스페인 카탈루냐의 피그라스 태생인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 1904-1989)는 마 드리드의 미술 Beaux-Art 학교에서 공부한 후 시카고로 가서 미래주의에 심취한다. 그 후 파리로 건너와 피카소Picasso를 만나고 미로에 의해 초현실주의자들에게 소개된 그는 편집 광적 비평방법을 창안했고, 모든 수단과 기교의 솜씨를 발휘하여 환각에 싸인 세상을 묘사 했다. 또 뷔뉘엘Bunuel과 함께 [안달루시아의 개](1928)라는 영화를 제작하기도 한 그는 시 나리오 작가이기도 했다. 그런데 대중적인 과장 취향, 스캔들을 좋아하는 성향 때문에 초현 실주의자들로부터 그룹에서 축출 당하는 등 많은 일화를 남겼다. 1931년에 그린 [기억의 습작]은 그의 초현실주의를 상징하는 대표작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시간의 흐름 속에 축 늘어진 시계들과 새 모습과 사람의 눈까풀을 동시에 연상시키는 기이 한 형상들이 해변가에 놓여 있다. 달리는 꿈이라는 무의식 속에 나타난 의식의 잠재된 욕망- 특히 성적 욕망-을 이런 상징적 인 물체들로서 표현하고 있는데, 시간의 존재에 대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신비로운 의식을 드러내는 것이다. 흐물흐물한 물체의 형상은 그의 많은 회화 속에서 계속해서 등장하는데, 1937년의 [수면]이 라는 작품에서도 인간의 형상이 늘어져 있는 유동의 물체로 나타난다. 무겁고 긴 머리가 몇 개의 가느다란 장대에 위태롭게 의지해 잡을 청하고 있다. 멀리 보이는 수평선 위의 배와 마을이 이 머리의 크기를 더욱 강조하고 있다. 귓가에 걸쳐 있는 천은 무엇을 의미하며, 왼편 끝에 자리한 개는 또 무엇을 의미할까? 우리는 그의 이러한 그림들을 보면서 언제인가 한번 꾸었던 꿈의 헌 장면을 들킨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르네 마그리뜨(Rene Magritte 1898-1967)는 1898년 벨기에 레신느 태생인 그는 브뤼셀의 미술 아카데미에서 공부한 후, 회화에 대한 여러 실험을 시도했다. 어린 소년시절에 본 무성영화에서 큰 감명을 받아 상상력을 크게 키우게 되었다는 그는 1927년부터 1930년까지 프랑스에서 브르통과 가까이 지내면서 초현실주의의 화풍을 성립해 냈다. 또한 보들레르, 말라메르와 미국의 괴기소설작가 에드가 알렌 포의 문학에서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마그리뜨는 대상을 세밀히 표현하면서 동시에 관례적 틀로부터 그 대상을 떼어내어 다른 곳 으로 공간이동을 시킨다. 그는 대상을 그것의 본질로되돌려 놓기 위해서는 일상적 의미작용을 대상으로부터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또한 꿈 속의 환각과 결합하는 통합적인 비젼 속에서 현실을 창조하고자 하였다. 그의 그림에 나타나는 엄청난 형이상학 덕택에 '신비의 거장'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의 최초 초현실적 작품은 1925년과 1929년 사이에 시작되는데, 1928년에 그린 [폭풍우의 조짐]은 그 대표작 중의 하나이다. 여인의 석고 토루소, 튜바, 그리고 등의자의 서로 전혀 어울릴 것같지 않은 세 개의 오브제 가 바다위 허공에 두둥실 떠올라 있다. 토루소는 화가의 아틀리에에, 튜바는 연주회장에서 그리고 등의자는 평범한 거실에서 볼 수 있는 물건들이지만 물결이 이는 바다와 어딘지 짐작하지 못할 한적한 해변가의 상공이라는 엉뚱한 장소로 옮겨 놓아, 이들 오브제가 가지고 있는 일상의 친밀성을 완전히 배제시켰다. 그대신 우리는 세가지 물건과 바닷가, 그리고 푸른 하늘 모두에 낯설고도 엉뚱한 괴리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마그리뜨의 괴이함은 1934년에 그린 [붉은 모델]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이 작품은 마그리뜨의 콤바인 오브제(Combines Objects)즉 '혼합된 물체'라는 형식의 그림 이다. 이 콤바인 오브제는 실제 현실에서는 절대 존재할 수 없는 새로운 형체지만, 그의 꼼 꼼한 사실주의적 화법에 의해 그림안에서 그럴싸하게 존재함으로서, 보는 이로 하여금 당혹 감과 혼동을 일으키게 한다. 구두와 발이 서로 다른 물체지만 우리는 습관적으로 사람의 발과 거기에 신겨지는 신발에 대해 친밀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여기 마그리뜨의 그림에서와 같이 신발의 앞부 분이 다섯 발가락을 가진 사람의 발로, 발의 뒷굼치 부분이 낡은 구두로 연결되어 있을 때 비로서 우리는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일사으이 싱식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는 것이 다. 1896년 와즈의 발라니태생인 앙드레 마쏭(Andre Masson 1896-1987)은 파리의 미술 학 교에서 수업 받은 미술학도였다. 1924년에 초현실주의자들과 친분을 맺었고, 1929년에 그 사 조로부터 멀어졌다가 1937년경에 다시 관계를 맺게 된다.1924년에 그는 자동데생의 실험을 하였으며 그 후에 의식적 기술과 자동데생을 혼합하였다. 그의 그림은 난폭함과 정열을 통해 불안과 카오스에까지 이르는 강박 관념이 드러나며 도발 적이고도 발작적인 에로티즘을 표현하고 있다. 1926년에 그린 [물고기들의 싸움]은 그의 모래그림 중 가장 잘 알려진 작품 중 하나이다. 앙드레 마쏭의 자동주의 회화는 초생동물이 생존을 위해 경쟁하는 원시시대를 상기시킨다. 그 자신은 "물고기는 인류학 속에서 인간의 생성과 근원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동물이다"하 고 말하여 어류를 생명의 근원이자 인류의 근원으로서 상징화하고 있다. 모래와 구불거리는 연필 선으로 그려 넣은 물고기들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놓고 서로 물 어뜯으며 싸우고 있다. 화면 위에 간간히 뿌려진 붉은 물감이 마치 싸음의 흔적처럼 선명하 다. 마쏭은 이러한 야생의 동물을 통해 인간 내먼의 잠재해 있는 생명에 대한 집착과 그것에 수 반하는 폭력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1898년 바르셀로나 태생인 호안 미로(Joan Miro 1893-1983)는 1912년경에 그림을 시작했다. 고전적인 화법을 익히고 있던 중 1919년 파리로 와서 1924년 경에 초현실주의자들과 알게 되면서 그의 그림에는 환상적인 요소가 등장하게 된다. 클레(Klee)와 칸딘스키(Kandinsky)의 영향을 받은 그의 예술은 구상의 수법에서 떨어져 나 와 많은 기호들의 세계 속에서 전개되었다. 그러한 기호들에서 선이나 색채는 어린시절의 상징들과 직접적인 서정성을 나타낸다. 그는 그림을 그릴 때 창작의 재료 앞에서 느끼는 감동에서 시작하여 정열 속에서 작업을 이 루어 나아갔다. 예를 들어 한참을 작업에 몰두하다가도 때때로 한달 동안 그 캔버스에 손도 안대고 내버려둔다. 그리고는 어느날 다시 캔버스를 꺼내고 냉정하게 장인처럼 작업을 시작 한다. 그는 단순히 초현실주의자로서만 한정해서 설명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그가 초현실 회화의 중요한 기법인 자동기술법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그의 그림은 무의식이나 꿈의 내용 을 기술한 것이 아니라 고전적인 재현화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초실주 의가 막을 내린 1940년이후에도 계속해서 자신의 기법을 고수해 나가면서 자신만의 사조를 완성해 나아갔다. 1925년에 완성한 [어릿광대의 사육제]는 파리 피에르 화랑에서 개최된 첫 초현실주의 전시 에 출품한 작품이다. 여기서 나타난 기묘한 모습들은 그가 초현실주의적인 분위기에 얼마나 크게 경도 되었는지 잘 보여준다. 배경은 창문과 테이블이 있는 실내정경이지만 그 방안을 가득 메우고 있는 형상들은 연체동물과 같은 기이한 모습들을 하고 있다. 흡사 현미경을 들 여다보는 듯이 여러 가지 미생물들과 같은 유기체들이 둥둥 떠나니 거나 바닥에 놓여 있다. 미로의 이러한 오브제들은 1928년에 그린 [네덜란드 실내 1]에서 다시 한번 반복된다. 1928년과 29년 사이 미로는 17세기 네덜란드의 실내화에서 영감을 얻어 많은 작품을 제작하 게 된다. 그는 네덜란드 풍경화를 초현실주의적인 기법으로 번안해서 그리게 되는데, 환상적인 인물 표현, 몽환적인 대상의 왜곡을 통해 해학적인 형상들을 창조해 내고 있다. 커다랗고 흰 타원 형안에 류트를 타고 있는 남자의 얼굴이 붉은 달처럼 떠있다. 그의 귀와 머리는 왼편의 구 불거리는 몇 개의 선으로 생략되어 있고, 그의 얼굴보다도 큰 류트가 가는 허리를 가로지르 고 있다. 화면 속에 나타나는 이상한 물체들을 자세히 관찰해보면 그것의 원형(原形)을 발견할 수 있 는데, 예를 들어 실내바닥에 앉아 있는 개와 고양이는 비교적 사실적인 모습으로 알아 볼 수 있게 그려져 있다. 뼈를 물고 있는 강아지의 얼굴은 자못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환상적 인 형태만큼이나 색채의 사용에서도 기발함을 보이는데,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노란색, 벽 은 초록색으로 칠해져 있다. 이렇게 사실적인 요소들을 과감하게 확대시키거나 축소시키는 기법이 바로 미로의 환상미술의 특징 중 하나이다. 1891년 독일의 브뤼힐 태생인 막스 에른스트(Max Eenst 1891-1976)는 본에서 철학 공부를 한 인문학도였다. 1914년 한스 아르프를 알게 되고, 이즈음 아방가르드의 모더니즘 이념에 전도되기 시작했다. 1919년 쾰른의 다다그룹에 참여하였으며 1922년에 파리로 와서는 초현실주의에 참여한다. 1919년 부터 입체파에 의해 이미 사용된 콜라주의 새로운 활용법에 전념,1925년 초칠을 하 는 방법을 발명하였다. 초현실적인 작품이 등장하는 시기에는 데칼코마니도 사용했다. 1921 년에 그린 [셀레브의 코끼리]는 에른스트의 초현실주의 회화작품 중 첫 번째 작품으로 꼽히 고 있다. 화면 중앙에 반은 코끼리를 닮은 동물의 형태를 하고, 반은 기계와 같은 모습을 띄 고 있는 몸집이 거대한 괴물이 들어 차 있다. 이것은 한편 난로와 같은 이미지를 띄고 있는데, 중앙으로 늘어뜨린 튜브 끝에는 소머리를 연상시키는 투구를 매달고 있다. 매우 낮게 자리잡은 수평선과 하늘 위로 헤엄쳐 다니는 물 고기를 보면, 이 그림이 데 키리코의 형이상학회화에서 영향받았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한편 이 알 수 없는 괴물은 작가 자신의 어린 시절 추억과도 연관이 있다. 즉 꼬마 에른스트가 친구들과 함께 등하교길에서 점잖은 어른들을 놀리기 위해 불렀던 약간은 음탕 한 가시의 노래 속에 셀레브섬에 있는 엉덩이 큰 코끼리가 등장하는 것이다. 또한 차가운 기계 이미지와 화면 오른쪽 아래를 차지하고 있는 목이 없는 여인 누드는 에른스트가 직접 겪었던 1차대전의 악몽 같은 기억에서 기인한 것이다. [이 남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에른스트가 브르통의 동료이자 시인이었던 폴 엘뤼아르의 권유로 파리에 정착하게 된 다음해인 1923년에 그려진 것이다. 어두운 밤하늘을 가들 메우는 초생달과 둘로 나뉘어진 해, 그리고 그 바로 아래 남녀의 섹 스가 상징적으로 그려져 있다. 날카로운 직선과 사선에 의해 분열되어 있는 화면 중앙에 산인지 굴뚝인지 알 수 없는 원통 이 땅위로부터 우뚝 솟아있다. 화면 맨 아래에는 인간의 내장 같기도 한 유기체가 늘어져 있다. 제목이 암시하듯이, 관객은 이 그림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 수 없을 것만 같은 소외감을 느 끼게 된다. 괴기스러운 악몽을 연상케 하는 이 작품은 구상과 추상의 요소가 뒤섞여 평범한 감상의 시 각에는 난해하기만 하지만, 한편으로는 우리의 무의식을 펼쳐 놓은 것만 같은 상상도 가능 하게 한다.

 

초현실주의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이듬해인 1919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직후까지 약 20년 동안 프랑스를 중심으로 해서 일어났던 전위적인 문학·예술 운동. 다다이즘과 미래주의 등 20세 기에 등장한 다른 전위운동에 비해 양차 세계대전 동안 가장 폭넓게 확산되었으며 논쟁적인 예술운동이 되었다. 초현실주의는 근본적으로 경험의 경계를 넘어서려고 애썼으며, 현실을 본능적이고 잠재적인 꿈의 경험과 융합시켜서 논리적이며 실재하는 현실, 그 자체를 바라보 는 시각을 확장시키려 했던 바 이것은 절대적 혹은 초월적인 현실에 도달하기 위한 것이었 다. 이 운동의 이론적 지도자였던 부르통은 초현실주의의 목적을 "이전의 꿈과 현실의 모순 된 상황을 절대적 현실, 초현실적 상태로 변형시키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일반적인 목 적 안에서 서로 상이하면서도 모순되지 않은 수많은 주장과 기술을 상호 혼합시키면서, 이 성과 의식적인 통제의 지배를 거부하려고 한 다양한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브르통은 그 첫 단계에 대해 "초현실주의는 언어나 다른 어떤 행위, 사고의 실제적 기능, 이성과 미학적·도 덕적 고려에 의한 통제와는 다른 사고를 표현하는 것, 즉 순수한 정신적 자동기술이다"라고 정의하였다. 미술사에서 이 운동을 예시한 미술가들은 보쉬, 아르침볼도, 피라네시, 고야, 롭스, 그리고 현대에 와서는 르동, 키리코 등으로 환상적이면서도 기이한 면에 대해 새로운 관심을 보였 다. 이들과 비슷한 특징 때문에 샤갈 또한 이 운동의 선두주자로 언급된다. 이들은 무의식이 프로이트의 이성의 통제를 뛰어넘어 잠재된 충동과 상상의 세계를 해방시킨다는 학설을 원 용하여 자동기술법에 의한 다양한 기법을 개발하였다. 초현실주의 시인들은 자동기술적인 글을 썼고, 미로, 아르프, 마송, 에른스트 같은 화가들은 프로타주와 같은 꿈의 현실적 재생 산 사이를 넘나드는 기법을 통해 시각적인 등가물을 창출하려고 했다. 그러나 회화와 조각 의 복잡한 기법들은 순수한 자동기술법으로는 불완전하기 때문에 최소한 어느 정도의 의식 적인 작업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발견된 오브제'와 꿈이 강조되는 것이다. 초현실주의 회 화의 가장 특징적인 면은 과거에 꿈을 그린 그림들과 다르다는 것이다. 즉, 꿈의 공간의 단 순한 재생산(예컨대 탕기(Yves Tanguy)의 그림 속에서 볼 수 있듯)과, 논리적으로 서로 상 관이 없는 대상들을 암시적으로 병치해 꿈의 특정한 감성적 특질을 전달하는 것과의 차이점 이다. 또한 초현실주의자들은 비기능적이거나 전혀 기능성이 없으면서도 정교하게 구성된 물체처럼 보이도록 하기 위해 대상(물체)을 그들의 규범적인 대에서 끌어내려 진열함으로써 다다이스트인 뒤샹과 피카비아의 방법을 이어받고 있다. 비논리적인 병치의 방법은, 환상의 구조에 객관적 실재의 환영을 부여하려 했던 19세기 후반의 아카데믹한 그림이나, 라파엘 전파의 매우 섬세한 양식과 유사한 사진 기술과의 결합 속에서 달리와 마그리트에 의해 특 히 발전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혼란스러운 인상은 사실주의적 처리와 비현실적 주제 사이의 대조에 의해 강화되었다. 달리, 만 레이, 한스 벨머 그리고 다른 초현실주의자들 역시 막연 한 잠재의식적 연상을 유발시켜 다양하고 모호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기법을 개발하였다. 이 운동의 미학은 브르통과 엘뤼아르, 레베르디 같은 프랑스 시인들에 의해 정립되었다. 브 르통은 가장 중요한 이론가 중 한사람으로써 1924년과 1929년에 발표된 <초현실주의 선언 문>을 집필하였다. 1928년에 그는 <회화와 초현실주의>를 출판하기도 했다. 1926년에 초현 실주의자들은 그들의 전용 전시장 '초현실주의 화랑'을 설립했고, 1936(런던)년과 1947(파 리)년에는 초현실주의의 중요한 전시회가 개최되기도 했다. 초현실주의에 대한 열광은 1930 년대 이후로 점차 줄어들었지만 완전히 소멸한 것은 아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소규 모로 유지되고 있다. 20세기 미학에서 이 운동의 중요성은 이러한 것에 대한 관심이 없던 때에 놀랍고도 이국적인 것의 부활을 보여주었다는 데 있다.

 

최북 - 崔北 (?~?)

조선 말기의 화가. 호 성재. 숙종·영조 때의화가로, 김홍도·이인문·김득신 등과 가까이 지냈고, 산수화에 뛰어나 최산 수라고 불렸다. 한 쪽 눈이 멀어서 항상 반안경을 쓰고 그림을 그렸으며, 성격이 호탕하여 술을즐기며, 엉뚱 한 행동을 많이 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는 그림을 팔아가며 전국을 돌아다녔는데, 전국을 떠돌던 중 금강산 구룡연에몸을 던져 죽으려고 하였으나 실패한 적도있다. 한편, 시에도 뛰어났다. 주요 작품으로는 〈수각산수도〉 〈한강조어도〉 〈풍설야귀도〉 〈추경산수도〉 등이 있 다.

 

추상 . 창조 그룹 Abstraction Creation (불)

1931년부터 37년까지, 프랑스 파리에서 결성된 추상 예술가 그룹. 제1차 세계대전 전후에 유럽 각지에서 싹튼 추상미술은 1920년대에는 몬드리안을 중심으로 한 네덜란드의 신조형주의와 데 스틸 그룹, 칸딘스키에서 볼 수 있는 서정적. 표현주의적 경 향, 들로네 부처(夫妻)나 쿠프카로 대표되는 음악적 추상주의 등 여러 가지 경향과 그룹을 낳았지만, 그러한 서유럽 각국의 추상 예술가들을 하나의 그룹으로 조직하려는 움직임은 1930년대에 시작되었다. 우선 1930년에 포르나 토레스 가르시아가 중심이 되어 그룹 '세르클 에 카레'가 결성되었고, 이어서 1931년에는 '추상 . 창조 그룹'이 만들어져, 매년 국제적인 규모로 추상 예술가의 작 품을 모은 앨범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이 엘범은 결성된 이듬해인 1932년 제1회가 간행된 이래 5년쯤 계속되었으나, 그 후 서유럽 의 정치 정세의 급변에 의해 중지되었다. 그 멤버는 가장 많았을 때는 400명에 달하였다.

 

추상미술 (abstract art)

비대상 미술, 비구상 미술, 비묘사적 미술이라고도 불리며, 때로는 구체미술이라고도 불린다. 눈에 보이는 현실의 사물을 묘사의 대상으로 하지 않은 미술을 가리킨다. 모든 미술은 형태, 색채, 질감, 화면의 크기, 테마의 크기 및 넓이 등 추상적인 제 요소로 성랍되고 그 양식도 주로 이것들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나 과거에는 이들 제 요소가 신들을 찬미한 인간의 모습 이나 사상 등을 나타내려는 기술적, 묘사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되어 표현보다는 설명의 역 할이 지배적이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추상 미술은 19세기에나 시작된다. 이 시대에는 고대 신화나 중세 이야기에서 화제를 취하여 극명한 묘사를 주로 하는 미술이 성행하였고, 그와 동시에 들라크루아가 '회화란 이름의 음악'이라고 부르짖었던 방향으로 회화를 발전시키고 자 한 화가들은 자연주의의 전통에 의문을 품고 주관과 회화 쌍방의 시각적 사실을 접근시 키고자 했다. 더 나아가 낭만주의의 화가들은 모방과 이상화를 강조했던 고전주의를 부정하 고 상상력, 무의식 그리고 우연성까지도 본질적인 창조의 요인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주장했 다. 1890년의, 모리스 드니의 '회화는 전쟁터의 말이나 또는 나부와 같이 이야기이기 이전에 본질적으로 일정한 질서를 가지고 선택된 색채로 덮인 평면이다'는 말이 당시 진보적인 화 가들의 생각을 요약하고 있다. 그리고 선, 색채, 표면 등의 비묘사적, 표현적인 성질을 근거 로 한 아르 누보의 대담한 실험적 디자인은 회화와 밀접한 분야에서 처음으로 추상의 영역 을 확대시켰다고 볼 수 있다. 20세기 초의 십수년간에 걸쳐 주요한 운동은 모두 어떤 형태로든지 미술과 자연의 외관 사 이의 균열을 강조했다. 한편 영화는 그 자체로 이야기적 회화를 훨씬 능가하는 하나의 시각 적인 이야기 형식을 지니기 시작했다. 또 표현주의의 여러 가지 형식은 원시 미술에 고무되 어 눈에 보이는 세계의 상을 왜곡, 변형하여 표현함으로써 강한 감정을 전하고자 했다. 야수 파에서는 이미 고갱이 주장해온 색채의 해방을 추진했다. 세잔느를 선구자로 하는 입체주의 는 본질적으로 회화적인 구성을 목표로 자연의 사물을 단편화하여 화면에 재구성했다. 또 미래주의는 20세기 역사의 급속한 전개에 합치하는 속도감을 표현함으로써 일종의 시각 언 어를 창출해냈다. 미래주의의 쟈코모 발라는 대담하게도 미래주의의 틀을 뛰어넘어 기하학 적인 패턴을 그렸으나, 다른 많은 작가들의 경우, 적어도 구도란 목적 때문에 눈에 보이는 세계의 단편에서 완전히 떨어질 수는 없었다. 그러나 설사 외계의 형상이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비구상적이어도, 형상에서 추상하는 것과, 볼 수 없는 내적 세계를 그린 비묘사적 형태 만으로 작품을 구성하는 것과의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존재한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 나기 전의 4, 5년 사이에 프랑스, 독일, 러시아의 몇몇 화가들, 득 로베르 들로네, 바실리 칸 딘스키, 카시미르 말레비치, 블라디미르 타틀린 등은 근본적인 추상 미술을 추구했으나, 전 위적인 예술가가 되어 일체의 묘사를 무시하는 것은 아직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대전 중에 네덜란드의 데 스틸의 멤버였던 피에트 몬드리안, 테오 반 되스버그, 조르주 반통겔로 등과 취리히의 다다이즘 그룹, 특히 장 아르프가 출현, 추상미술의 영역을 한층 확대시켰다. 추상미술은 요소주의와 자유 추상, 두 가지로 나뉜다. 전자 속의 특히 러시아의 절대주의를 대표하는 말레비치와 신조형주의의 창시자였던 몬드리안은 작품의 표현을 최소한도의 기본 적인 형태와 색채로 한정시켰다. 다른 작가들도 구도를 결정하는 데에 기하학적 또는 수학 적인 계산을 썼다. 일반적으로 요소주의 작품이 합리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을 강조하여 그것 을 자연과 대립시켰다. 요소주의의 예술은 미술 이외의 영역, 특히 타이포그래피(인쇄술)와 건축에도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1919∼33년까지 활동한 독일의 바우하우스는 요소주의의 제 원리를 좇아서 미술 교육과 디자인 교육을 통일시키고자 했다. 한편 자유 추상은 표현주 의자(1910∼20년까지의 칸딘스키)에 의해서는 서정주의자(아르프)에 의해서든 모두가 감정 과 직관을 근거로 했고, 그 까닭에 발상은 주관적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칸딘스키의 저서 <예술에 있어서의 정신적인 것>(1912)과 잡지 <데 스틸>(1917∼30)은 이 양 방향의 기본적 인 철학을 분명히 하고 있다. 추상미술은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사이의 시기에는 그렇게 성행하지 않았다. 전 체주의 정치와 초현실주의와 같은 심상을 새롭게 강조하는 예술 운동이 성하여 그리 주목받 지 못했던 것이다. '세르클레 카레'나 '추상, 창조'란 명칭으로 전시회나 출판을 했던 파리 의 그룹이 수개국의 추상 작가를 위한 세력 만회의 거점을 제공해 주었고, 또 1930년대에는 조각에서 약간의 진전을 보였다. 알렉산더 콜더가 최초의 모빌을 만들고 또 헨리 무어와 바 바라 헤프워드가 처음엔 콘스탄틴 브랑쿠시에게서, 뒤에는 구성주의자인 나움 가보에게서 영향을 받아 영구 조각의 발전에 선구적인 역할을 한 추상 작품을 만든 것도 이 시기였다. 제 2차 세계대전 후에는 미국에서 활발한 추상미술의 일파가 나타나 큰 영향을 주었다. 회 화에 있어서는 잭슨 폴록, 윌렘 드 쿠닝에서, 보다 비개성적인 작품의 마크 로드코, 바넷 뉴 먼까지, 또 차갑고 억제된 기법에 이르기까지 작푸므이 범위가 확대되고 있다. 유럽 대륙에 서는 막스 빌이나 빅토르 바자렐리 등이 요소주의의 원리를 주구했고, 또 루치오 폰타나나 조르주 마티외 등은 자유 추상, 혹은 유럽에서 '앵포르멜'이라고 불리는 예술을 새로운 극한 까지 이끌어갔다. 추상미술이 너무 눈의 감각에만 호소한다는 비난이 있다. 그러나 이 감각적인 어필은 음악 에 있어서와 같이 지적이고 분석적인 수단에 의해서 달성되어진 것이다. 확실히 추상미술은 미술 일반의 추상적 가치에 대한 감수성을 세련화하였고 또 설명적 묘사에 의하지 않은 커 뮤니케이셩의 이해를 증대시키는 데 기여한 바가 있다.

 

추상주의(Abstraction)

신조형주의의 몬드리안과 표현주의의 칸딘스키에 의하여 시작하였으며, 표현의 대상이 없고 조형의 요소와 원리에 의해 작품을 표현했다. 차가운 추상과 뜨거운 추상으로 분류되며, 현 대의 보편적인 양식이 되었다. 추상 미술이란 넓은 의미로는 대상을 사실 그대로 묘사하지 않는 입장의 예술을 총칭하고 있다. 1910년 무렵, 유럽 각지에서 거의 동시에 발생하여 활발히 전개되었다. 현대 미술에서 인상주의에 반발하며 색채, 형태 등에서 전통적인 회화 관념을 거부하는 추 상미술은 몬드리안을 시조로 하는 `기하학적 추상` 과 칸딘스키를 시조로 하는 `서정적 추 상`등 두 가지로 나뉜다. 기하학적 추상은 선과 색채의 엄격한 구성에 의한 조형의 원리를 탐구하고, 흔히 차가운 추 상이라고도 불린다. 이에 반해 서정적 추상은 색채나 형태에 내면적인 심리를 표현한 것으로,뜨거운 추상이라고 도 불린다.

 

추상표현주의(Abstract Expressionism)

추상표현주의는 미국에서 일어난 전후 미술 양식으로 앵포르멜과 비정형의 맥락을 같이 하 며, 순수 추상과 기하학적 추상에 대립하는 경향의 명칭이다. 질감과 화가의 신체적 동작에 의한 격렬하고 생명감 넘치는 긴장의 표출을 특징으로 하며, 드리핑기법으로 균질 회화를 추구하였다. 추상표현주의는 1930년대 경제 대공항이후, 1940년대 중반에서 1950년대 초반 까지 'New York 10번가' 를 중심으로 가장 활발하게 생성된 미술운동이다. 1929년 미국에서 전시회를 열고 있던 러시아의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의 초 기 작품의 자유 분방한 형상에 대해 미술 평론가 알프레드 바(Alfred Barr)가 '형식은 추상 적이지만 내용은 표현적' 이라고 말한 것에 유래된다. 1945년 '뉴욕커' 지의 로버트 코츠 (Robert Coates) 기자가 당시 맹활약을 보였던 잭슨 폴 록 (Jackson Pollock) 과 윌렘 드 쿠닝 (Willem de Kooning) 의 작품에 이 명칭을 부여함으 로써 널리 알려지게 된다. 추상표현주의는 자연의 재현이 아닌 작가의 내면 세계를 중시하는 추상형태나 무의식의 상 태에서 발생한 우연한 결과를 존중하는 20세기의 현대 미술의 변화된 요소들을 바탕으로 예 술활동의 중심 무대인 유럽을 떠나 미국을 중심으로 새롭게 출발한다. 작가 자신의 직관적인 표현의 행위를 예술로서 나타내게 함을 원칙으로 하는 추상표현주의 는 회화에 있어서 무의식성을 강조한 초현실주의의 오토마티즘(Automatism)에서 강한 암시 를 받았으며 전쟁전에 현대 미술사에 등장한 다양한 경향을 종합시켜 유럽에 종속적으로 이 끌려 오던 미국의 현대 미술을 독자적으로 분리시킨다. 나아가 추상표현주의는 현대미술을 새로운 영역으로 확장시키는 전환점이 된다. 어떤 의도성 있는 계획적인 표현의 궁극적 목표가 없이 오직 내적인 직관의 표현으로 화면 에는 예기치 않았던 우연한 이미지가 개입된다. 추상표현주의의 대표적인 화가로서 잭슨폴록, 윌렘 드쿠닝, 샘 프란시스, 프란츠 클라인, 마 크 로드코, 클리포드 스틸등은 액션페인팅 (Action Painting) 과 색면추상 (Color-Field Abstract) 이라는 두 흐름으로 나누어진다. 폴록과 뉴만 그리고 로드코 등의 추상표현주의 작가들은 일찌기 전면회화(All-Over)와 무관 계(Non-Relational)로 불리우는 화면의 전면구성을 통하여 회화 본래의 평면성에 대한 주의 를 환기시킨다. 액션페인팅- 순간의 행위를 통하여 나타난 우연성의 효과를 새로운 미의식으로 발전시킨 액션페인팅화가 들은 드리핑(Dripping), 타시즘(Tachisme), 컬리그래피(Calligraphy)와 같은 개성적인 표현으 로 자신들의 회화세계를 구축해 나갔으며 액션 페인팅에 의해 표현된 추상표현주의 화면은 자유롭고 율동적인 선으로 인해 비정형적이고 우연적인 형태를 나타냈다. 폴록과 드 쿠닝, 프란시스와 같은 액션 페인팅 화가들은 행위를 통한 순간적 우연의 효과를 추구하였으므로 그들의 즉흥적이고 속도감있는 특성의 표현은 단순한 색채보다는 다채로운 색채를사용함으로써 더욱 효과적으로 발휘된다. 따라서 화면에는 어두운 색채의 사용과 강렬한 원색, 명도가 높은 파스텔 계열의 다양한 색 채들이 혼합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올오버(All-Over)의 구성과 명암, 대조의 제거로 인한 색 의 균질성은 색의 위계를 무너뜨림으로써 궁극적으로 2차원의 평면성을 창출한다. 색면추상- 이와 대조적으로 색면추상화가들은 전쟁의 허무감을 극복하기위해 실존적 입장에서 좀더 근 원적인상징물이 필요함을 자각하여 우연과 임의보다는 그들의 철학적 이념을 바탕으로 단순 하고 강렬한 색면 회화를 추구한다. 색면회화는 원시미술과 마티스를 연상시키는 강렬하고 단순한 색채를 통하여 그들이 도달하 고자한 숭고의 이미지를 넓은 색면 위에 나타내고 있다. 폴록의 꿈틀거리는 선의 표현과 로드코의 풍경같은 선명한 색면은 시각적으로 거의 유사함 이 없으나 이들은 모두 심리적인 자아표현을 중시하였고, 2차원의 평면성을 가진 거대한 화 면을 통해 작은 이젤화의 개념을 넘어서 존재의 영역을 확장하였다는 데에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