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임종두 한국화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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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두의 작품세계

-天,地,人의 조화-

三合의 세계와 채색의 심미
          
 김 상 철 / 공평아트센타 관장

임종두의 작업은 채색이다. 그것도 원칙적인 것이다. 수없이 반복되는 덧칠하기의 수고와 우려냄을 통하여 발현되는 채색 특유의 심미를 추구하는 것이 작가의 작업이다. 오늘날과 같이 모든 것이 쉽게 변하고 또 그러한 것들이 미덕으로 간주되는 시대에 이러한 전통적인 채색 방법에 의한 조형 작업은 종종 이미 지나간 시대의 산물이거나 어쩐지 오늘의 상황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 것이라는 선입관을 주게 마련이다 실제로 오늘의 한국화단을 통하여 보더라도 비록 채색에 의한 조형 작업을 하는 작가의 숫자는 적지 않지만 대부분은 현대적이라는 적당한 구실을 바탕으로 절충적인 작업을 하는 것이 보통이다

혼합 재료라는 새로운 재료 개념의 도입과 보다 적극적이고 직접적인 표현을 선호하는 세태적 경향은 이른바 전통 채색에서의 은유적 표현을 간접적으로 도태시키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종두의 작업은 극히 전통적인 방법적 전개를 고집하고 있다. 일견 우직해 보일 수밖에 없는 물리적인 축적과 수고를 통하여 하나 하나의 화면에, 그리고 구석구석의 자리에 숨결을 세기고 있다.

사실 작가의 이러한 작업 과정은 차라리 장인적인 것에 가까운 것이다 섣부른 재치나 날렵한 세련됨보다는 마치 잔 논바닥을 소가 쟁기를 끌며 갈아 엎듯이 우직한 뚝심으로 밀어 부치는 작가의 숨소리는 바로 가지가지의 조형들을 통하여 형상화되고 있는 것이다. 재료 자체가 가지는 특성이 그러하기도 하지만 작가의 재료에 대한 몰입과 집착은

사실 긍정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앞서의 지적과도 같이 빨리, 새롭게가 절대 가치로 숭상되고 있는 오늘의 현실에서, 그리고 그러한 가치들의 창궐로 인하여 오늘의 한국화가 처한 질곡의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이는 단순히 작가 개인의 우직함, 혹은 개별적인 작업 취향으로 치부하기에 앞서 새삼 그 가치와 의미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수묵을 돈오( )로 표현하고 채색은 점수( )로 이야기한다. 이는 두 가지 상이한 재료에 의한 조형의 방법에 대한 형용에 불과한 것이지 결코 특정한 매제에 대한 포현의 의미는 아닐 것이다. 그것이 돈오이든 혹은 점수이든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 혹은 도달하고자 하는 곳은 모두 같은 것이다. 작가가 추구하고 지향하는 조형적인 방법은 전형적인 점수의 그것이다. 화면의 바탕 질을 고르고 여기에 수없이 반복되는 색 올리기 작업을 통하여 비로소 어렴풋이 드러나게 마련인 화면은 그야말로 점차 쌓아 가면서 이룬다는 점수의 그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채색이 가지는 특유의 미감은 이러한 수고와 물리적인 노고를 수반하지 않고는 발현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재료 적인 특징 역시 발휘되기 어려운 것이다. 앞서 작가의 작업에 있어서 일단 긍정의 시각을 보내는 것은 바로 이러한 재료 적인 측면에 대한 작가의 집요함과 철저함에서 기인하는 바 역시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이전에 작가가 보여주었던 작업들에는 거의 어김없이 인물들이 등장하고 있다. 특히 특정한 메시지를 내재하고 있는 한 전형을 이루는 인간들은 작가의 작업에 있어서 특징적인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소외된 인간, 혹은 문명, 또는 도시라는 공간적 상황에서 절박한 한계에 내 몰린 듯한 그림자를 드리운 인물 군들은 작가에 있어서 중요한 소재적 대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일정 부분 왜곡되고 변형된 인간 군들을 통하여 작가는 삶이라는 처연한 미학을 형상화하려 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작업들은 그 소재가 대변하고 있듯이 다분히 구상적인 것이자 아카데믹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인물에 대한 정확한 포착과 이의 효과적인 표현, 그리고 여기에 수반되는 재치 있고 숙련된 필선들의 어울림은 그 소재가 드러내고자 하는 내용과 더불어 작업에 있어서 기능적인 면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들을 아카데믹한 것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기능적인 표현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작가는 이번 전시 역시 하나의 과정에 불과한 것이라는 겸양을 보이고 있기는 하지만 그러한 속에서도 작가 내부에서 진행되고 있는 치열한 변화의 내용들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다. 예의 재료에 대한 집착과 몰입은 여전한 것으로 오히려 더욱 정교해지고 감각적인 감수성을 드러내고 있다 할 것이다. 더불어 재치 있고 탄력 있던 선의 미감들은 이제 사물의 외곽을 결정 짓는 일차적인 기능에서 하나의 조형적 요소로 새롭게 자리하는 보다 자유스러운 것으로 자리메김 되고 있음 역시 두드러진 변화의 한 양상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작가의 작업을 이전의 것들과 구분이 되는 새로운 것으로 인상 지우는 것은 바로 작가의 사물에 대한 인식이 비로소 보다 구체적이고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는 점이다. 이전의 '생토'로 명명되었던 일련의 작업들이 인간의 삶과 그 언저리에서 묻어 나오는 무엇인가에 대한 감수성 짙은 반응이었다면, 이번의 작업들은 보다 형이상학적인 원칙적 내용에 그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할 것이다.

이른바 '삼합'은 작가가 새롭게 화두로 삼은 작업의 명제이다. '천,지,인'의 조화를 의미하는 삼합은 단순한 작업의 제목 혹은 하나의 고전적 지식의 새삼스러운 차용은 아니라 할 것이다. 이는 바로 작가의 작업을 지탱시켜 주는 기본적인 조형관이자 외부 세계에 대한 작가의 관점이기도 하다. 작가는 삼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정감이 듬뿍 어린 고향 마을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고, 이러한 고향 마을에는 공동체적인 정신과 문화가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생동감 넘치는 삶의 현장을 꾸며 나간다. 남도 지방에서 볼 수 있는 완만하고 여유 있는 정취와 나를 낳고 길러준 산과 강의 삶의 터전 그리고 현대 사회의 물질 문명을 조화롭게 반영하는 것이 삼합의 주축이 된다."

즉 작가의 조형에 있어서 가장 근저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바로 누구나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게 마련인 유년 시절의 아련한 정서와 남도라는 특정한 공간에서 파생되는 정감이라 할 것이다. 사실 이러한 정서와 정감은 새삼 독특한 것이라기 보다는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유년 시절의 정서와 태생적 환경으로부터의 영향은 비단

작가에 국한된 것만은 아닐 것이다. 작가는 이를 바탕으로 다음과 같이 이른바 (삼합)의 의미를 풀어 나가고 있다

「자연이란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보일 뿐 여하한 경우에도 하나의 통일적 성격을 지녔으며, 자연계에서 관찰할 수 있는 어떠한 차이점도 모두가 같은 바탕 위에서 있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인간을 구성하는 성분마저도 자연계를 이루는 원소와다를 것이 없기 대문에 근원은 하나이다. 형체만 다를 뿐 하나에서 분화된 상태로서의

삼합이다」

작가의 삼합에 대한 이론은 도가적인 우주관에서 기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만물은 도, 혹은 기라 표현되는 하나에서 비롯되고 여기에서 다시 음과 양의 둘이 생성되고, 음양이 조화를 이루어 만물을 이루어 내니 어차피 세상의 만물은 "도, 혹은 기"라는 하나에서 비롯된 것으로 근본적인 차이는 없는 것이라 인식하는 것이다. 다분히 형이상학적인 이러한 관념적 이론이 바로 작가가 새로 이고 앉은 절대 화두인 셈이다. 삶, 혹은 그 언저리의 상황에 탐닉하던 작가의 조형관은 이제 사색과 사변을 동반한 천리적인 것으로 전이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형이상학적인 조형 의식을 여하히 구체화하고 형상화할 것인가 하는 것이 될 것이다

작가의 새로운 작업은 일단 철저하게 평면성을 지향한다. 원근과 크고 작음의 구별도 무시된 체 나열식, 서술식의 화면 구조가 기본적인 조형의 얼게이다. 사실 평면성은 동양 회화가 가지는 특징중의 하나이다. 이른바 모필로 대변되는 동양 회화의 특징은 바로 평면적이고 서술적인 것이다. 작가의 경우 앞서의 지적과 같은 조형관, 혹은 우주관을 바탕으로 한 평면성의 추구는 화면에 등장하는 모든 사물에 대한 등가의 가치를 부여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사물을 바라보는 인간의 구성 요소마저도 자연의 그것과 다를 것이 없는 조화로운 삼합의 경지에서는 크고 작음은 물론 어는 것 하나 중요하지 않거나 존재의 이유가 없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작가 역시 동양 회화의 평면성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작업이겠으나 더욱 중요한 것은 작가가 각 사물에 부여하고 있는 등가의 원칙이다. 이에 이르러서는 인물만이 화면의 주인공이랄 수도 없는 것이며, 특정한 소재가 전체를 장악할 수도 없는 것이다 전체라는 커다란 질서 안에서의 무리 없는 어울림, 자리 메김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와 같은 조화의 경지에서는 바탕 역시 단순히 구체적인 사물을 돋보이게 하는 부수적인 기능에 그 역할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엄연한 하나의 조형 요소로 자리하게 된다 마치 수묵에서의 여백이 그려 진 부분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중요하듯이 작가의 '삼합'에서는 바탕 역시 단순한 조연이 아닌 나름대로의 기능과 역할을 부여받고 있는 것이다

더불어 작가는 현상계의 찬라적이고 현상적인 것, 그리고 가변적인 것들에 대하여 이른바 삼합의 이론으로 재해석을 시도한다. 일반적인 생태적 상식은 철저하게 무리되고 자연물들은 작가에 의하여 새로운 질서를 부여받고 있다. 봄에 피는 꽃과 가을에 피는 꽃이 한 자리에 등장하기도 하고, 한 나무에 매화가 피기도 하고 목련이 달리기도 한다. 또 경우에 따라서는 그것은 나무이자 길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하나이며 다른 것은 단지 보는 각도가 다를 것 뿐이라는 작가의 조형관은 화면을 해체하고 이를 다시 새로운 질서, 즉 보다 큰 질서 속에 자리잡히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작가의 화면에는 절대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다. 모든 것은 상대적으로 존재하며 이른바 작가의 '삼합'이란 이러한 상대적 존재물들에 대한 등가의 가치 부여에 다름아닌 것이라 할 것이다

언뜻 피상적인 듯한 작가의 이러한 조형관은 화면의 분방함과 인간 중심의 가치 체계, 나아가서는 문명이라고 풀이되는 현대적 합리성과는 배치되는 것이다. 물론 작업이 과학적인 합리성을 담보로 진행되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작가의 합리성에 대한 해체는 화면에 있어서는 마치 족쇄를 풀어 줌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과거의 작업들이 순수한 의미에서의 아카데믹한 것이었다면 이제 작가의 작업은 한 걸음 더 나아간 사변적인 것으로 전이되고 있음이 여실하다 할 것이다.

작가의 '삼합은 분명 수준 높은 정신적인 경계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구체화하고 형상화한다는 것은 그만큼 용이하지 않은 일일 것이다 문제는 이를 단순한 문자에 의한 부연적인 설명을 통하지 않고 그림이라는 근본적인 내용으로 풀어낼 것인가 하는 데에 있다고 할 것이다 화면에 부분적으로 거칠게 드러나고 있는 작가의 화두에 대한 집착은 오히려 짐스러운 것이라 할 것이다 더불어 직설적인 어법과 같이 그 내용이 이미 정형화되어 나타나고 있는 양식화의 경향은 경계 되어야 할 것이다. 도를 도라 하였을 때 그것은 이미 도가 아니라는 말과 같이 작가가 추구하는 정신적인 화두가 하나의 양식적 특성으로 얽매이게 된다면 이것 역시 내용보다는 그 외피에 집착하는 우가 될 것이다.

작가의 작업이 오늘에 가지는 의미는 단지 바탕을 정성스레 고르고 수십 번에 이르는 칠하기와 말리기, 그리고 이러한 수고를 거쳐 동양 안료의 오묘한 효과를 잘 나타내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더불어 이러한 장인적 수고에 대한 무미건조한 상투적 치사는 더 더욱 의미가 없는 일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작가가 제시하고 있는 문명과 자연, 그리고 인간에 대한 성찰에 귀기울여 보는 것이다. 인간 중심의 물질문명의 폐해가 두드러지고 있는 오늘의 상황에서, 그리고 동서 문화의 무제한적인 충돌을 독전에 둔 오늘에 작가의 '삼합'은 그 의미하는 바가 심중한 것이라 할 것이다

1997.6.18-6.24. 서울 공평아트센타    1997.7.1.-7.7. 광주 남봉갤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