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임종두 개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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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두의 작품세계

生土 - 자기세계의 의미탐구

1. 전통적인 채색화법에 의해 분채를 수십 번 우려낸 화면-즉 여러 겹으로 밀어 올라오는 투명한 그러면서도 무게감 있고 깊게 가라앉은 침착한 색조로 조율된 바탕 위에구성지고 친근하게 풀어져 있는 먹

生土-L.A 한지에 분채(149×83cm)

선의 미끄러짐으로 이루어진 인물을 능숙하게 그려 보이고 있는 것이 임종두의 작업이다.

그는 시적 여운과 감성적으로 이루어진 배경공간의 독특한 처리와 그 위로 촉감적으로, 탄력적으로 스며드는 인물의 유니크한 묘사에 있어 뛰어난 기량을 보여주고 있다. 이 같은 회화적 역량은 일부 작가들에게서도 엿보이는데 이들의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능숙한 데생력, 감칠맛 나는 선의 흐름, 구수하고 포근하게 회화적으로 연출되는 화면경영은 한편으로는 자칫 가볍고 유형화될 우려를 주는 반면 친근하고 성실한 작업세계를 찬찬히 떠올려준다는 생각이다.

그는 수려한 풍광으로 유명한 조계산 자락이 펼쳐진 승주에서 태어나 농촌의 생활과 자연을 체득한 작가이다. 또한 일찍부터 부모와 고향을 떠나 자취생활을 했고 그 같은 삶은 이후 지금의 서울 생활까지 이어져오고 있는데 그에 따라 지속적으로 밀려드는 외로움과 뿌리 뽑힌 자로서의 상실감 혹은 막연한 고독과 무력감, 우울, 일종의 향수 등이 혼재된 감정이 그림의 표면위로 짙게 베어나오는 듯도 하다.

이 외로움은 그래서 소박하게나마 삶에 대한 반성과 거리 두기, 세상살이의 가파르고 고단한 길 위에 얹힌 사연과 절망하는 모든 것, 부폐와 상실로 타락하는 세속의 모든 모순에 대한 순박한 거부의 몸짓으로 가시화 된다. 그래서인지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웬지 비근하고 상념에 뒤척이는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침몰되고 있는 듯한 촌부나 도시의 샐러리맨 등이다.

'生土'라는 일련의 주제로 일상을 살아가는 현대인의 고뇌와 아픔 혹은 개인적, 자존적, 실존적 공간에서 솟아나는 문제들을 조금은 어눌하고 담담하게, 고즈넉하게 들려주고 있는 작가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말처럼 '다분히 촌스런 사람들'을 성실하게 그려내고자 한다.

소 한 마리 키우는 농부의 얼굴, 고엽제로 시달리는 윌남전 참전용사, 외로운 도시의 군상들, 조금씩 훼손되고 망가져 가는 현대인들의 초상을 통해 존재의미를 되묻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그는 인물의 형상을 시간적 추이에 따라, 역사의 흐름에 따라 변질되고 망가져 가는 모습으로 흡사 부식된 철판 마냥, 세월의 두께가 얹힌 토우 마냥 왜곡시키거나 변형시켜 표현한다.

그것은 단지 인간에만 국한된 것이라기 보다는 타락한 문명, 지식, 역사, 관습, 도덕, 이데올로기를 또한 상징한다.

사실적인 묘사로 이루어진 초상 및 군상과 나이프로 거칠게 빗겨 그린 흔적 및 석상에서 엿볼 수 있는 질감을 지닌 인물들의 공존은 그 타락과 변질의 과정에 다름 아니다. 운석으로 표현된 인간의 삶은 그래서 한 인간이 태어나 거쳐가는 수없이 많은 사연과 경험 속에서 뒹군다. 그 돌이 뒹구는 곳은 현실이고 떠나는 곳은, 찾고자 하는 곳은, 세속의 미진을 떨치고 나아가는 곳은 바로 자연이다.

훼손되거나 타락되지 않은 본연의 삶으로, 생명의 세계로 상정된 그의 자연은 그림 그리기의 고통 속에서 추구된다. 그의 그림 그리기는 누구나 그러하겠지만 (그에 따르면) 일종의 수행과도 같다.

2. 그는 어려운 살림살이 속에서, 외로움 속에서도 지금껏 자신의 삶의 척추를 부여잡아준 그림 그리기를 성실하게 밀어 올리고 있고, 탄탄한 기본적 공정을 거쳐 진지한 주제의식과 완성도 높은 작업세계를 지향하고자 한다. 비록 그의 그림이 '공모전'풍의 다분히 교과서적이고, 꾸며져 있다는 지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하더라도 일단 모든 것을 착실하게 소화하고 기본기를 튼튼히 한 후에 빠져 나오려 한다는 그의 말은 마음과 몸을 편하게 내던지고 손쉽게 그려내는 그림이 난무하는 작금의 화단을 염두에 둔다면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외곽을 점유한 인물의 상반신과 나머지 여백을 메꾸고 있는 장식적인 면 처리, 자유로운 표현으로 배려된 그 추상화된 배경의 조화는 구상과 추상, 선과 면, 먹과 채색 등의 이율적 요소의 대립을 조화롭게 공존 시킨다. 그 공존은 구체성의 인간이 추상적인 세계 속에, 자연 속에 왜소하게 짓눌려 있는 듯한 상황성을 암시해주는 한편 그의 감각적인 먹 선과 나무젓가락 등을 예리하게 깎아 만든 목필로 섬세하게 그어댄 그 독특한 필치로 살아나는 인물상은 핵심적인 한편으로는 가볍고 삽화풍으로 비쳐질 수 있을 듯하다. 그러나 채색의 독창적인 쓰임 즉 부분, 부분을 역광처리 하거나 인공적인 조명아래 불현듯 섬��하게 들춰지는 듯한 혹은 색채의 가장 감각적인 어우러짐을 어두운 배경과 함께 대비시켜 드러내므로서 화면에 강한 긴장감과 생기를 불어넣는 솜씨는 주목을 요한다

특히나, 그의 그림에 묻어나오는 순환론적 인생관은 자뭇 동양적, 불교적 세계관을 연상시키는가 하면 화면 곳곳에 흙 냄새처럼 스며 나오는 농부의 삶, 소, 자연, 돌 등은 우리 것에 대한 애정의 메타포이며, 궁극적으로 그가 추구하는 원형의 공간으로서의 본연적 자연에 따른 자연친화와 외경사상을 또한 은연중 드러내 주고 있다.

자연에 대한 작가의 관심에는 실상 인간존재에 대한 절망적 인식, 혹은 욕망으로서의 인간에 대한 혐오에 따른 일종의 상실감이 숨어있는 듯도 하다.

아울러 가장 신변적이고 생활의 감각적인 현장에서 받아들여지는 아픔 등을 얘기하고, 나아가 인간의 자기실현이라는 이상적인 삶의 상태에 대한 소망을 꿈꾸는 이 작가의 자세는 지향적인 대상을 인식해내는 주체로서의 개인의 확립을 반영한다.

그것이 조형적 배려와 힘겹게 공존하고 있지만 그는 현실 대응에서 중요한 것은 대응되는 현실이 아니라 대응하는 작가라는 소중한 인식을 지니면서 우리 삶의 근거 상실에 대한 문제를 지속적으로 추구하면서 산업화로 인해 변질된 오늘 우리의 삶을 수습하고자 한다. 물론 그 같은 인식이 소박한 소외론적 시각이라는 다소 협소한 문제들에 걸려있다 하더라도 그는 훼손된 원형에 대한 탐구쪽으로 적극 자신의 작업을 밀어대고 있다. 존재의 자의식은 자율적인 주관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회구조의 내면화의 과정을 통해 구성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아무쪼록 그가 지향하는 작업세계가 실현되지 않은 삶의 가능성을 읽어내는 일로, 보다 확장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믿음으로 이 작가가 부디 자기세계의 의미탐구를 탁월한 조형성으로 버텨내 주길 지켜보고 싶은 것이다.

전시기간 : 1993. 3. 4 - 3. 10.      전시장소 : 서울 백악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