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세황 (姜世晃/1712~17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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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 자화상 | 강세황 영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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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문인·화가·평론가. 본관 진주, 자 광지, 호 첨재·표옹·노죽·산향재·표암. 시호 헌정. 서울 출생.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나, 8세 때 시를 짓고, 13~14세 때는 글씨에 뛰어난 솜씨를 보여, 소년기에 쓴 글씨조차도 병풍을 만드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아버지의 사랑과 교육을 받았으며, 매형이었던 임정의 영향도 크게 받았다. 처남 유경종 외에도 허필·이수봉 등과 절친하게 지냈으며, 이익·강희언 등과도 교유하였다. 당대의 유명한 화가였던 김홍도·신위 등도 그의 제자들이다. 벼슬에 뜻이 없어 젊은 시절에는 주로 작품활동에만 전념하였다. 32세 때 가난 때문에 안산으로 이주한 뒤에도 오랫동안 학문과 서화에만 전념하였다. 처음 벼슬을 한 것은 61세로, 영조의 배려에 힘입어 관계에 진출하게 되었다. 이후 64세 때 기구과, 66세 때 문신정시에 장원급제하였으며, 영릉참봉·사포별제·병조참의·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하였다. 72세 때 북경사행, 76세 때 금강산 유람을 하고, 기행문과 실경사생 등을 남겼다. 시·서·화의 삼절로 불렀으며, 식견과 안목이 뛰어난 사대부 화가였다. 그 자신은 그림제작과 화평활동을 주로 하였는데, 이를 통해 당시 화단에서 ‘예원의 총수’로 한국적인 남종문인화풍을 정착시키는 데 공헌하였다. 이밖에도 진경산수화를 발전시켰고, 풍속화·인물화를 유행시켰으며, 새로운 서양화법을 수용하는 데도 기여하였다. 평생 동안 추구한 그의 서화의 세계는 궁극적으로 습기도 속기도 없는 경지에 이르는 것이었다. 산수·화훼가 그림의 주소재였으며, 만년에는 묵죽으로 이름을 날렸다. 작품으로는 《첨재화보》 《벽오청서도》 《표현연화첩》 《송도기행첩》 《삼청도》 《난죽도》 《피금정도》 《임왕서첩》 등이 있으며, 54세 때 쓴 《표옹자지》에 있는 자화상을 비롯하여 7~8폭의 초상화를 남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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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세황
영정 조선시대 서화가 강세황의 초상화 2폭. 보물 제590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 강세황자필본:견본채색의 족자 1축. 크기 60×88 cm. 1782년 작.무릎을 꿇고 앉은 전신상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머리에는 오모를 쓰고 유복을 입었으며 칠분좌안을 하였다. 초상화 윗부분에 다음과 같은 강세황이 쓴 찬문이 있으며, 끝에 ‘姜世晃印’의 음각으로 된 방인과 ‘光止’의 양각 방인이 찍혀 있다. 이 영정은 표암초상 4폭 중에 자작찬문을 곁들인 유일한 그림이다. (2) 이명기필본:견본채색의 족자 1축. 94×145 cm. 화원이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호피의자에 앉아 칠분좌안한 상으로 녹색도포 단령에 쌍학흉배에 사모를 썼다. 오른손을 무릎 위에 살며시 두고 양 무릎간의 의문의 표현이 개방적이며 보다 안정된 형식이 표출되어 있다. 옷의 굴절이 구체화되었고 묘사는 매우 밝으며, 형식이나 옷은 중후하고 심오한 작풍을 띠었다. 화면의 오른편 위 여백에 “豹菴 姜公七十一歲眞”이라 제목을 붙인 글이 있고, 그 아래 어제제문이 씌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