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안 (姜希顔/1417~1464)


고사관수도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
지본수묵 15.7×23.4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 전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배경으로 바위 위에 양팔을 모아 턱을 괸 채 수면을 바라보는 선비의 모습을 묘사하였는데, 명나라 때 원체화풍과 절파화풍의 뚜렷한 구분이 생기기 전 중국화의 영향을 받은 작품으로 간주된다. 15세기 중엽 북송 회화의 영향을 받은 안견 일파를 중심으로 웅장한 산수를 묘사하고 그와 대조적으로 인물을 미세하게 나타내는 것이 그 당시 화단 추세였다. 이러한 화단 추세와 관련시켜 볼 때 인재의 《고사관수도》에 나타난 화풍은 매우 새롭고 첨단적이다. 필치가 활달하고 세련되어 사대부의 기품이 나타난다. 이러한 인물과 덩굴풀로 드리워진 가파른 절벽의 모습을 담은 소경산수인물화의 구도는 16세기 화가들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강희안 (姜希顔)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 진주, 자 경우, 호 인재.   희맹의 형이다. 1441년(세종 23)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 돈령부주부로 벼슬을 시작하였다. 43년 정인지 등과 세종이 지은 정운 28자에 대한 해석을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44년에는 의사청에 나아가 신숙주·최항·박팽년 등과 운회를 언문으로 번역하였으며, 45년에는 최항 등과 《용비어천가》를 주석하였다. 한편 조정의 추천을 받아 명나라가 보낸 ‘체천목민영창후사’의 8글자를 직접 옥새에 새기기도 하였다. 47년 이조정랑이 되어 최항·성삼문·이개 등 집현전 학자들과 《동국정운》 편찬에 참여하였다. 54년(단종 2) 집현전 직제학이 되어 수양대군, 양성지, 정척 등과 조선 8도 및 서울 지도를 만드는 데 참여하였다. 55년(세조 1) 세조가 등극하자 원종공신 2등에 책봉되었으나, 56년 단종복위운동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신문을 받는 등 고초를 겪었다. 60년 호조참의 겸 황해도관찰사, 62년 인순부윤이 되었으며, 사은부사가 되어 명나라를 방문하였다. 성품이 온화하고 조용하여 말수가 적었으며, 청렴하고 소박하여 출세에 연연해 하지 않았다. 의정부에서 일찍부터 검상에 추천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시·그림·글씨에 뛰어나 세종 때의 안견·최경 등과 더불어 3절이라 불렀다. 문집에 원예에 관한 《양화소록》이 있으며, 그림으로 《고사관수도》 《산수인물도》 《강호한거도》 등이 전하는데, 산수화·인물화 등 모든 부문에 뛰어났다. 글씨로는 아버지의 묘표인 《강지돈녕석덕묘표》 등이 남아 있는데, 왕희지와 조맹부의 작품에 비견되기도 한다. 또한 세조 때 임신자(壬申字)를 녹여 활자를 새로 주조할 때도 자본(字本)을 썼는데, 이를 을해자(乙亥字)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