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위미술
1. 머리말 'Avant garde' (아방가르드)- 이른바 '전위'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군사상의 용어였으나 예술, 그것도 자율적인 성격의 현대예술에 적합한 말로 되어, 그 말로 대변되고 있는 많은 예술 운동들이 있었고, 그것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중이다. 그 말이나 그에 의해 대변되고 있는 예술의 현상이 다른 어느 시대에서도 찾아질 수가 없는 것이라면, 그것은 다같이 현대세계의 소산이며, 그러므로 '전위예술'은 이 시대의 예술을 대변하고 있는 말이 될 것이다. 실제로 그러하다는 증거는 현대예술을 논할 때 많은 비평가들이 이 말을 빠트리지 않고 있으며, 예술가들 역시 어느 점에서 전위적이 아니어서 큰 걱정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찾아질 수가 있다. 이 같은 사실은 전위적인 예술가들이 하고 많은 '프로그램'과 '매니 훼스토', 이 두 말은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전위적인 예술가들이 전위적이기 위해 사용했던 일종이 전문적인 용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전위'라든가 '전위예술'이라는 말을 이처럼 많이 쓰고는 있지만 그렇게 사용되고 있는 중에라도 이 말은 전혀 모호한 채다. 정확히 규정될 수 없는 까닭이 있었겠지만, 그래서인지 전문적인 사전에도 이 말의 항목은 빠져 있다. 현대예술의 과정 속에서 특히 어느 한 이즘이나 경향을 지시하고 있는 말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것의 항목이 빠져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어떠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말일까?
2. '전위' : 두 가지 의미
전위라는 말의 기원과 그 사용은 포찌올리
(R.Poggioli)의 책자 [ 전위의 이론] 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 말은 스페인 문화와 스페인-미국(Spanish-American)문화에서 아주 빈번히 사용되고 있다. 그래서 토레 (Guillermo de
Torre) 가 이 말을 문학에서 일어난 전위적인 여러 운동들과 그 현상을 연구하는 책의 표제로서 이용하고 있는 것은 상당한 통찰력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가제트
(Ortegavy Gasset) 즉 전위 일반의 문제에 직면하여 그것을 논의하려 했던 아마도 최초의 사람인 가제트는 비록 특수한 관점에서 이기는 하지만 그 말을 피하고 대신 '비인간화 예술'. '추상예술'. 혹은 '젊은 또는 참신한 예술' 이라는 말을 더 즐겨 쓰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그가 한편으로는 이 운동의 극단적 주지주의를 강조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 운동이 새로운 세대의 출현과 일치되고 있는 현상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랬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이 말이 보다 깊이 착근을 하게 되고, 보다 잘 적용되었던 풍토는 다른 어느 나라에서보다도 불란서가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그것은 불란서인의 경우에 있어서처럼 예술과 문화를 특히 그 사회적 관점으로부터 바라보려는 경향의 문화적 전통 속에서 보다 생기를 얻을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독일에서의 경우는 이 말의 라틴어적 성격 때문에 '신낭만
(Neu-Romantik) 이라는 말을 더 즐겨 사용하고 있었는데서도 그러한 사정이었음을 짐작할 수가 있는 일이다. 구라파 낭만주의의 극우로서 이 독일적인 대안이 최소한 잠재적으로는 전위의 역활을 떠맡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 말의 사용이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다른 한편, 영국과 미국 같은 나라에서는 그 명칭이 고정되어 있지 않은 채, 때로는 불어 그대로 ' avant-garde' 로, 때로는 'vanguard' 나 'advanced guard' 라는 영어로 쓰여지고 있다. 실제로 영-미 비평에서 이 말이 사용될 때라면 그것은 주로 불란서의 문학과 미술 자체에 국한되어 있거나 혹은 그로부터 영향을 받은 어떤 국제적인 예술 현상에 대해서이다. 그런 중에 이 말은 불란서의 지성 곧 정신적인 갤리시즘 (Gallicism) 의 한 표본인 것처럼 간주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그들 영-미의 예술 속에서 전위적이라 할 것들이 발전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현재의 뉴욕은 그러한 예술의 중심지로서 역할을 하고 있는 중임을 상기하면 좋을 일이다.
순전히 문자적이라든가, 언어적 입장에서 말할 때 '전위예술' 이라는 용어를 갤리시즘의 한 경우인 것처럼 다룬 이 말의 현대적 어법과 의미는 -비록 그 기원이 확인되기 쉬운 성질의 것이 아니기는 하지만-분명 불란서 인들의 소산이요 실제로는 파리쟝들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이 우리 시대의 예술을 특징적으로 규정하는 데 적용되기 훨씬 전에 그것이 다른 것으로 사용되고 있었음은 지극히 흥미로운 일이 될 것 같다. 왜냐하면 애초 이 말은 예술적이기 보다 정치적인 관심을 가지고 색다른 운동을 전개하고자 했던 사람들에 의해 사용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예술은 곧 사회의 표현이며, 가장 진전된 사회의 경향을 드러내준다. 그러므로 예술이 시동자로서 그의 고유한 임무를 가치 있게 성취하고 있는지, 또한 예술가가 진정으로 '전위'의 예술가인지 아닌지를 알기 위하여 우리는 인간성이 어디로 진행되고 있는 중인지, 또 인류의 운명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행복의 찬미와 함께 음울하고 절망적인 송가를 불러라… 우리 사회의 바닥에 깔려 있는 잔인함과 부패함을 폭로하자.
이와 같은 말을 하고 있는 문맥 속에서 그는 이 '전위'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위의 인용문 중 마지막 두 구절은 라베르당의 글이 예언적이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심지어 예술계에 있어서 마저 전위의 상이 애초에는 예술적이 아닌 정치적인 급진주의 (Radicalism) 의 이상에 종속되고 있었던 것" 임을 보여 주는 '최초의 가장 중요한' 인용구절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전위'는 애초 예술적이 아닌 정치적 급진주의 이상에 종속되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 말이 무정부적이고 극단적인 자유주의 사도들에 얼마만큼이나 친밀했었는가 하는 사실은 후에
[L'avant-garde] (1878)라는 표제의 정치적 선전을 위한 한 간행물이 출판되었다는 사실에 의해서도 입증되고 있다.
따라서 1870년대에 있어서 이 말이 정치적인 문학 밖에서 사용되는 경우를 찾기란 심히 힘드는 일이 되고 있으며, 아마도 그 전 1860년대에 있어서 라면 거의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한 사실을 밝혀줄 수 있는 한 사례로서 보들레르
(Baudelaire)의 기록을 예시해 볼 수가 있다. [Mon coeur mis a' nu] (1862~1864) 라는 사적인 기록 속에서 그는 이 말을 염두에 두고 조롱조로 '전위적인 문학인들' 이라고 쓰고 있음을 주목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군대식의 비유를 즐겨 쓰는 불란서 인들의 취향을 증명해 보일 목적으로 기술된 일련의 긴 사례들을 열거하는 과정의 마지막 대목에서 나오는 말이다. 그 같은 말을 조롱하고 있다는 바로 이 같은 사실은 그것이 이미 기존의 용어로서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냉소적이었던 보들레르를 통해 보더라도 '전위적인 문학인들' 이란 말은 예술적이라기보다 정치적인 작가, 다시 말하면 급진주의적인 작가들을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보들레르와 같은 시인이나 그 밖의 예술가들에게 있어서 이 말은 그 자체가 잘못된 비유였다는 점에서 뿐 아니라 그에 함축된 의미 때문에 조롱적인 질책을 면할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프러시아 전쟁과 콤뮨 (Commune)의 대두와 그 진압으로 대변되는 국가적 위기와 사회적 동요를 극복한 듯한 1870년 이후의 몇 년간을 통해서 이 말은 서서히 예술적인 별도의 의미로서도 사용되고 있는 변화된 면모를 찾을 수 있게 된다. 여전히 사회적-정치적 전위를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되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따라서 두 전위의 병행이라 할 현상이 나타났으며, 이 같은 병행이 가능했던 것은 잠시나마 두 전위들이 우연히 기존의 낭만주의적 사고와 1830년과 1848년 사이의 세대에 의해 확립된 전통을 새롭게 하는 입장에서 연합전선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특히 이 후자의 세대는 문학적이었을 뿐 아니라 정치적이었다. 따라서 전세대의 보수주의 대신 이세대의 교리는 민주적 이상이 되어왔고, 심지어는 극좌의 이상이 되어 오기까지 했다. 여기서 우리가소름 끼치는 해' 를 경험하고 , '해빙' 에 가담했던 세대에 게는 - 정치적 좌파와 문학적 좌파 간의 제휴는 아주 분명한 것이었고 중요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정치적 급진주의와 예술적 급진주의 간의 이 같은 제휴, 두 전위들간의 이 같은 연합은 한동안 지속되었다. 그것은 [La revue
indepe'ndent] 이라는 표제의 조그마한 현대 문학지의 첫 권에 이르기까지 계속되는 것이었다. 1880년경에 창간을 보았을 이 잡지는 정치와 예술의 두 방면에서 이른바 두 전위적인 대변자들을 동류의 관계로 결합시켜 놓고 있는 아마도 최후의 기관지이다.
그러나 그 이후로부터 급작스레 두 전위들의 결별이라고 할 현상이 눈에 띄게 진행되었다. 그것은 불란서 인들이 그렇게 부르기를 좋아하는 '황금시기'의 출발과 더불어 결별은 더욱 촉진되어 갔다. 오랫동안 찾아온 평화와 번영과 예술적인 갈등 속에서 새로운 예술의 탄생으로 인도되는 이 황금의 시기란 1885년부터 비롯되는 약 30년간에 걸친 시기임을 말한다. 그리고 바로 그 해 5월 , 낭만주의 거성이었던 위고 (V. Hugo)의 성대한 장례식이 있었다는 사실은 어떤 점에서 예술에 있어서의 새로운 진행이 곧 전개될 것임을 암시해 주는 것이기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이후 그처럼 짧은 시일 내에 그처럼 많은 주의(ism)와 유파와 그룹들의 대두와 몰락을 체험한 시기는 아마 다른 어느 역사적 시기를 통해서도 찾아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한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듯, 1885년을 전후로 해서 예술가들은 각기 한 시대의 종언과 새로운 시대의 출발을 감지하면서 마치도 신호등을 기다렸던 사람들처럼 방향을 바꾸기에 급급했던 것이다.
실제로 1886년엔 인상주의자들의 마지막 그룹 전시가 있었고, 고갱과 반 고호는 아를르에서 함께 작업을 하는 가운데 인상주의를 떠난 새로운 회화의 길을 개척하고 있었다. 음악의 방면에서 바그너의 인기는 최소한 1900년대까지 상승세를 보이긴 했으나, 1883년에 있은 그의 죽음은 불란서의 음악을 독일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키는 데 커다란 전기를 마련해주게 되었고, 샤브리에
(Chabrier)와 포레 (Faure')의 작품들이 곧 뒤를 잇기 시작했다. 또한 문학에서는 베르레느, 랭보, 특히 말라르메의 실험적인 작업이 마침내 상징주의라는 이름으로 귀결된 것 역시 그때쯤 이였다. 예술활동의 이와 같은 전개와 더불어 그 당시까지 예술현상에 단지 비우적으로 사용되어 왔던 '전위'라는 말이 당시의 예술적 활동 바로 그것을 지시해 주는 말로서 전의케 된 것이다. 비로소 '전위'라는 말이 정치적으로 이용되어 왔던 이제까지의 제일의 의미가 그로부터 완전히 탈거 되었다는 말이다. 따라서 '전위의 예술과 문학'이라는 표현이 그로부터 광범하게 유행되게 되었다. 이처럼 불란서 언어와 문화의 배경 속에서 잉태되어 물려진 이 말은 불란서 국경을 넘어, 서서히 사상의 국제시장에로 유입되면서 오늘날 보는 것 같은 현대 예술의 어떤 특징을 말하는 일반 용어가 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므로 전위와 비슷한 내용과 의의가 있을 용어나 개념들이 사상의 역사 속에서 또 다시 발견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지극히 힘든 일인 것 같다. 형식적인 입장에서 비슷한 사례를 찾고자 해도 기껏 낭만주의나 혹은 고전주의적 전통이 와해를 겪게 되는 전 낭만주의적 시기 이상으로까지 소급되기는 힘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전위예술에 있어서의 '전위'라는 말은 형식적으로나 실질적으로 참신함을 지니고 있는 말이며, 그러므로 예술사의 진행 속에서 진정으로 예외적인 현상을 가리켜 주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현대예술은 곧 '전위예술'이요, 전위적인 성격의 예술이라는 것이다.
3. 전위예술의 특징 : 운동의 생리
과거의 예술과 구별되는 현대 전위예술의 전위의 성격은 무엇이며, 또 그것은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학원(academy)이라든가 학파(school)와 같은 기구의 틀 속에서 성장한 전 시대의 예술과는 달리 운동(movement)의 형태로서 발전된 예술의 진행이었다는 점에서 우선 한 가능한 구분의 근거가 마련될 수 있다고 본다. 설립의 근거와 목적, 그리고 그 진행과정을 통해 짐작할 수 있는 일이듯 아카데미는 확립된 이상-곧 보편적 자연의 모방과 그러한 이상의 실현을 위한 절차-곧 규칙-와, 그러한 이상의 모델이 되고 있는 대가나 전통-곧 고대 희랍과 르네상스-을 본뜨고 답습하는 교육의 장이었다. 고로 어떤 의미에 있어서 아카데미 예술은 역사를 고려하지 않고 시간만을 고려 했던 예술이 아닌가도 생각될 수 있는 일이다. 그런 만큼 그것은 정말로 고전적이고 정적인 예술이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낭만주의의 등장은 지극히 의미 있는 일이다. 그것은 어느 누구도 아카데믹하다고 부를 수 없는 문화적- 예술적 출현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그 후로 늉諍?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지고자 했던 것이라고 말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운동의 시동자들은 항상 운동 그 자체 속에 내재된 목적의 입장에서 일하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학교는 지식의 보고로서의 문화의 이념 밖에서는 존재를 생각할 수 없다. 반면 운동은 문화를 증식으로서가 아니라 창조로서, 곧 활동과 힘의 중심으로서 상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어떤 성격의 어떠한 형태로 나타나 활동을 했건 일반적으로 말해 유미주의 신봉자들은 학파의 추종자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전위적인 예술가들이 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아카데믹한 예술의 성격을 이상적 아카데미의 병리인 정체와 달리 새로운 장으로 길을 터 준 운동의 생리 속에서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운동은 어떤 구체적인 목적에 대해 긍정적 결과를 획득하기 위해 구성된다. 인간의 창의적인 힘의 자각과 그에 대한 확신으로부터 출발되고 있다. 이러한 출발로 인해 전위 예술가들은 스스로 고립을 자초하기도 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끼리의 좁다란 씨족사회와 비슷한 그룹들을 형성하기도 했다.
현대예술에 성격을 부여한 바로 이들 운동의 계기로부터 제 3 계기가 유도되고 있응訣?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했던 예술의 장이 되고 있다. 따라서 그것은 어떤 확립된 규범 속에서의 활동을 가능한 한 탈피하려 하고 있고, 또한 가능한 한 무한히 가변적인 본질을 파헤치고 드러내면서 문제를 해결하려 하기보다는 계속 문제점들을 제기하는 방향에로 인도해 왔다. 바로 이러한 사실 때문에 그것은 실험에 실험을 거듭함으로써 어떤 공식을 도출해내려는 미학의 입장을 계속 궁지에 몰아 넣어 왔다. 생각해보고, 반성을 해봄으로써 어떤 이해의 단서를 마련해 볼 틈도 주지 않은 채 과거의 부정과 미래를 위한 실험만으로 일관해 왔던 것 같은 인상이다. 그것은 무엇인가를 알아보려고 그때 그때마다 열심히 뒤를 좇던 미학은 결과적으로 다양했던 예술의 경향들만큼이나 수다한 예술론만을 낳아주었을 뿐이다. 예술의 다양함과 함께 초래된 이론의 복잡함, 이것이 곧 현대미학의 특징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다면 전위적이라는 이름의 현대미술은 왜 이처럼 실험적인 작업으로 일관되어 왔을까? 고대 희랍시대 이래로 미술에 있어서 서구인들의 제 1의 관심은 무엇보다도 외적 대상, 혹은 외적 세계에 대한 객관적 관심의 표명이었다. 이 대상이란 눈 앞에 보이는이즘'들로 점철된 지난 100여년 간의 현대미술의 역사였다.
'전위적'이라는 이름의 현대미술은 흔히 이해하듯 창조라는 곡명의 행진곡을 구가하며 걸어온 축복 받은 과정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어느 분야에 있어서나 주도적 기준의 상실과 마비로 혼미와 방황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되게끔 된 불안한 시대의 상황 속에서 태어난, 그것을 반영하고 있는 예술적 증상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그러기에 전시대의 예술이 그 힘을 잃고 있는 이 시대에 예술가로서의 운명을 타고 났음을 자각하게 되었을 때라면 그는 불가피 그것을 회피해야만 했고, 모험의 정신을 가지고 반발과 파괴를 서슴지 않은 중에 어떤 기대를 도모해보게 되었던 것이다.
이같은 현상이 '새로움의 추구'라는 말로 강조되고, '실험'이라는 말로 변호되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이같은 실험은 그것이 불확정적이기도 하고 때로는 무의미한 것이기도 해서 그만큼 우리에게는 불안한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달리 생각해 볼 때라면 그러한 현대미술이기에 활동의 장은 무한히 열려 있고 많은 자유가 미술가에게 주어져 있다고도 할 수 있지만 그러하다는 사실은 곧 현대미술가가 따라야 할 분명한 행로 혹은 일반적으로 인정된 기준이 없다는 사실을 반증하고 있는 것이다.
5. 전위예술 : 현황과 공통성
M. 뒤샹, J. 케이지, J. 팅글리, R. 라우센버그 그리고 M. 커닝햄 등 다섯 명의 예술가들에게서 나타나고 있는 어떤 특징들을 살펴 보기로 하겠다. 그들은 어떤 그룹이나 어떤 유파도 형성하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며, 또 그들 간에 어떤 공통적인 관점이 나누어지고 있지도 않다.
케이지는 작곡가이며, 커닝햄은 스스로 무용가이면서 이론가이다. 이 두 사람은 수년간 친밀한 협조를 하는 가운데 작업을 해왔지만 케이지의 지적 엄격성은 보다 본능적인 작업방식의 커닝햄에게는 전혀 생소한 것이 되고 있다. 팅글리에의 접근에 초점이 되고 있는 파괴의 요소는 때로 다른 네 사람에게도 나타나기음들로 하여금 그 자신이 되도록'하게 한 기도일 뿐이라고 말한 것이나, 라우센버그가 회화에 대한 그의 작업을 '재료들의 결합'이라고 한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노력의 입장에서 나온 말들이다.
그러나 언뜻 갖게 되는 생각과는 달리, 자기 자신의 취미나 편견을 극복하기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닐 뿐더러 그렇게 하기에는 오히려 교묘한 재간까지 부려야 가능한 일이 된다. 그러므로 위에 말한 다섯 예술가 모두가 어떤 점에서 공통적이라 할 방법들을 개발하고 응용해왔다는 사실은 조금도 놀랄 일이 아니다. 개인적인 구상을 지양코자 해서 개발된 가장 명백한 대안은 우연이라는 방법으로서, 그것은 20년간이나 케이지의 실험의 기초가 되었던 것이고, 다소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여타의 네 사람들 모두에게도 이용되고 있는 방법이 되어주고 있다. 다음으로, 항시 변모하고 있는 인간의 본질과 그 모습에 접근하기 위해 개발된 방법으로 운동이 있고, 이것은 팅글리의 기계를 닮은 조각과 뒤샹의 초기 작품에서 명백히 보여지고 있으며, 라우센버그의 만화경 같은 캔버스와 케이지의 음악 속에서 은밀히 작용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무용의 경우, 커닝햄에 있어서는 그 미디엄이 움직임이 되고 있는 만큼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처럼 전통적인 예술가 상을 청산하고자 하고 있고음악적인'인 음조를 벗어나서 도시환경 속에서 '발견되는 음'을 음악에 흡수시키는 방향으로 움직여온 것 역시 이미 오래된 일이다. 뒤샹, 팅글리, 라우센버그 같은 조형 예술가들에 있어서는 그들의 작품 속에 눈 치우는 삽이든가, 거리의 간판이라든가, 폐품자에서 줏어 온 조각난 부품들이라든가 하는 것이 수용되고 있다.
이같은 보잘것없는 재료들을 예술가들이 사용해 온 것은 현대미술에 있어서는 별로 새로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런 중에도 두드러진 차이점이 있으니, 그것은 이전의 미술가들과는 달리 그처럼 보잘것없는 재료들을 사용하고 있는 그들의 태도에 있다고 할 것이다. 그 같은 재료들에 대한 오늘날 예술가들이 태도는 어떤 이미지와 심볼 을 위한 그들 재료의 기능 때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 자체만을 위해 그것을 액면 그대로 수용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범상적인 것을 예술로 구성-변모 시키려는 일에 관심을 두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하등의 손때도 묻히지 않은 채, 어떠한 채색도 가하지 않은 채, 우리가 매일 살고 있는 삶 속의 생생한 편린, 그대로를 내보이고자 할 뿐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작업은 예술이 아니요 반 예술이라는 빈번한 비난에 직면하게 되지만,
또 스톡하우젠은 의심할 여지없이 케이지로부터 유도된 작품-즉 음악적이기도 하고 연극적이기도 한 작품-을 무대에 올려 놓고 있다. 이오네스코와 핀터의 연극, 로브그리에의 의해 씌어진 이른바 '신소설'의 경향, 또한 새로운 해프닝의 운동, 오늘날의 실험영화 그리고 무용가들의 무용보 등은 모두가 다 의미 있는 예술, 실재 해석의 예술이라는 관점에 대한 강력한 반발의 면들로서 추진되고 있는 것들이다.
전통적인 예술의 관념에 대한 이와 같은 반발은 그것을 수용하는 쪽의 대중에게까지 어떤 변화를 초래해 놓고 있다는 점이 또한 중요하게 거론되어야 할 것 같다. 즉 작품 속에 개인적인 어떤 의미를, 집어넣음으로써 대중들에게 그것을 전달시켜주려는 대신에 오늘날의 주도적 전위 예술가들의 작업방식에는 대중들로 하여금 자기들의 작업과정에 직접적이고 능동적으로 관여케 하려는 기도를 보여 주고자 하는 측면이 있다. 의미가 배제된 채 진행되고 있는 작품자체에 그 스스로 가담해서 그 스스로 경험케 하고, 어쨌든 그 스스로 해석케 하자는 의도가 발견되고 있다는 말이다. 사실 이러한 의도가 억지라고 될망정 그것은 그들 주장의 한 귀결로서 논리상의 일관성만은 인정해야 될 것 같다. 왜냐하면 작품에 의미부여를 포기하고자 한 입장에서 그들이 주로 이용한 방식은 우연과 운동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구성의 계기가 우연으로 대체되고 동시에 운동 그 자관조적 태도'라든가 '심적거리'를 취하고 그 앞에 서 있게끔 인식되고 있다. 그런 만큼 예술가는 현실로부터 구할 수 없는 그 무엇-그것이 일종의 지식이든 특수한 감정이든-을 그 속에 투영해 놓기 위해 사물을 재구성하거나, 혹은 상상적 이미지를 창조해야 함을 당연한 것으로 알아 왔다.
최근의 전위 운동은 예술에 대한 이 같은 제 관념들에 대한 적개요 반발인 것이다. 앞서 알아 보았듯이 예술가에 의한 의미 부여는 사물을 옳게 보는 방법을 가르치기 보다는 혼란만 일으킬 뿐 오히려 유해한 것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따라서 작품이 사물 그 자체로 대체되어야 함을 주장한 것이다. 그러한 방향전환의 입장에서 보는 이를 관조자가 아니라 참여자로 되게 한 묘안을 짜내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들 작품 속에 우연의 계기며, 운동의 계기를 궁리 끝에 도입시켜놓게 된 것이다. 실상 예술의 영역에서 일어난 이 같은 전환은 자아가 세계를 구성한다라는 주관적 관념론에 대한 비판이 대두된 현대철학의 경향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현상학 쪽으로부터는 의식의 분석을 통한 삶의 세계 혹은 상호 주관성의 개념이, 분석철학 쪽으로부터는 언어의 분석을 통한 삶의 형식의 개념이 좆뭡?이 아니라 '사건'이 있을 뿐이라는 라우센버그의 말 속에 들어 있는 이 사건이 귀중한 것일지, 우스개 꼴로 전락될지 현재로서는 재단키 어려운 중에 그들이 물려 받은 실험정신 만이 수다한 방식으로 계속되고 있을 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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