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파엘로 < Raffaello Sanzio >(1483.4.6~1520.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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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화가·건축가. 우르비노 출생.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와 함께 르네상스의 고전적 예술을 완성한 3대 천재 예술가의 한 사람이다. 궁정시인의 아들로 태어나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11세 때 아버지마저 잃어 사제인 숙부 밑에서 자랐다. 시인이며 화가였던 아버지에게서 그림을 배우다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동향인인 T.비테에게서 배웠다. 1500년 P.페루지노가 완성한 페루지아 어음교환소의 벽화 중 우의상은 당시 17세였던 라파엘로가 조수로서 그린 것이다. 1500년경의 작품으로 알려진 콘데미술관(샹티유이)의 《삼미신》, 내셔널갤러리(런던)의 《기사의 꿈》은 청순한 색채와 감미로운 음악적 리듬이 보이며 격정이나 위대성을 강조하지 않고 부드러운 매력을 나타내려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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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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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에 교차하는 화음의 물결을 민감하게 포착하는 음악적인 감각은 루브르미술관의 《성
미카엘》 《성 게오르기우스》에서도 볼 수 있는 것으로 예술의 기조를 이룬다. 페루지아에 나온 후로는 페루지노풍의 최고의 기법을 급속히 익혔으며, 특히 《성모대관》(바티칸미술관) 《그리스도의 책형》(런던)
《스포잘리치오(성모의 결혼)》(밀라노) 등은 페루지노 작품으로 착각할 정도이다. 공간처리나 환상적인 표현에는 그의 스승에게서 볼 수 없는 신선미를 보이고 있다. 1504년 피렌체에서 예술적 전통에 고취되면서 F.바르톨로메오의 장대한 화면구성과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명암법을 배워 페루지노의 영향을 탈피하고 피렌체파의 화풍으로 발전하였다. 《도니 부처상》이나 기타 이 시기의 초상화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영향을 다분히 받았고, 이 시대에 가장 많이 그려진 성모자상에서도 성모의 자태나 피라미드형 구도에 있어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영향이 뚜렷하다. 나아가 《그리스도의 매장》(로마)에서는 미켈란젤로의 선의 움직임까지도 모방하였다. 그러나 그는 선인의 기법을 자기의 것으로 소화하여 화면구성에 있어서 선의 율동적인 조화라든지 인물 태도의 고요함이나 용모의 청순함 등에는 언제나 독자성을 나타내었다. 1509년 로마교황 율리우스 2세를 위하여 바티칸궁전 서명실의 장식에 종사하여 천장화를 그린 후 사면의 벽면에 《성체의 논의》 《아테네의 학당》
《파르나소스》 《삼덕상》 등을 그렸다. 로마의 고대유적과 고전 연구에 힘을 기울이는 한편, 완성단계에 있던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성당 천장화에서 조형적 파악법을 배워 공교한 율동적 구도를 바탕으로 고전적인 격조 높은 걸작을 이룩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무렵 교황 측근으로부터도 계속 제작의뢰를 받아 《어느 추기경의 초상》
《토마소 잉기라미의 초상》 《폴리뇨의 성모》와 같은 걸작을 남겼다. 파르네지나궁전의 벽화
《갈라테아의 승리》의 제작의뢰를 받은 것도 역시 이 무렵이다. 그때 파르네지나궁에서 작업 중이던 베네치아파 화가 세바스티아노 델 피온보와 알게 되어 그의 채화법을 배웠다. 이 색채묘법의 변화는 11∼14년에 제작한 바티칸궁전의 스탄차 데 엘리오도로의 벽화
《헬리오도로스의 추방》 《볼세나의 미사》 《성 베드로의 해방》 《로마에서 격퇴당하는
아틸라》 등에 나타나 있는데, 빛과 그늘을 양괴적으로 대치시킨 명암효과는 이전에 볼 수 없었던 활기를 띠었다. 베네치아파적인 색채효과는
《율리우스 2세상》을 위시하여 《베일을 쓴 여인》 《발타사르
카스티요네상》 《작은 의자의 성모》 등에 나타나 있다. 한편 건축에도 손을 대어 14년 동향 선배인
B.L.브라만테의 뒤를 이어 성베드로대성당 건조에 관계하였고, 14∼17년 바티칸궁전의 스탄차델 인첸디오의 벽화장식에도 종사하였으며, 15년부터는 고대유적 발굴의 감독관이 되었다.
《산시스토의 성모》(드레스덴)는 이 무렵의 걸작으로 아카데믹한 형식주의가 싹트고 있으며
《산타 체칠리아》(볼로냐)에서 그 경향이 더욱 뚜렷하다. 그 사이에도 키지예배당의 설계와 장식, 바티칸궁전의 로지에의 장식, 빌라마다마의 건축 등에 종사하였다. 그런데 많은 제자들을 거느린 화려한 궁정화가로서 일에 쫓기던 그의 예술은 종교개혁운동을 계기로 차차 쇠퇴하였고, 제자들과 함께 그린 파르네지나궁의 천장화
《프시케의 이야기》에서는 지난날의 감미로운 리듬은 사라지고 고대 조각의 영향을 조악하게 반영하여 채색한 조상과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러나 18년의
《레오 10세의 초상》에서는 군상을 훌륭한 솜씨로 처리하여 뛰어난 초상화가임을 증명하였다. 만년에 명예회복을 위하여 심혈을 기울인 《그리스도의 변용》(바티칸)을 완성하지 못한 채 요절하였으나, 천상의 신비스러운 광휘와 지상의 소란을 대조시켜 S자형의 분방한 구도로 동적 표현을 시도한 이 작품은 이미 고전양식을 해체한 것으로 바로크양식의 싹이 엿보인다. 짧은 생애에 많은 걸작을 남긴 그가 미술사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며, 19세기 전반까지 고전적 규범으로 받들어졌다. 그 후 근대회화사조에 의하여 경시된 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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